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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그친 오지를 떠나며_20210826

어여쁜 호랑나비의 날갯짓에 넋 잃고 그 뒤를 총총히 따라 밟는다. 어릴 적엔 곤충 표본으로 메탄올 주사를 놓아 즉사시켰다면 이제서야 그 생명의 고귀함을 알게 되었고, 그러기까지 무척 많은 시간이 걸렸다. 너도 나처럼 고결한 존재임을, 그래서 요즘 보기 힘든 곤충의 아름다움과 우아함을 깨닫는다. 내가 미행하는 것을 녀석은 아는지 모르는지 그저 제 할 일과 제 몸짓에 충실하다. 가을 장마를 피해 구름 위로 살짝 모습을 드러낸 소백산 연화봉과 지날 때마다 신기한 산능선나무숲. 백두대간을 지날 무렵 끝없이 펼쳐진 장벽 위에 망루처럼 솟아난 구조물이 소백산 천문대로 고교 졸업 후 친구들과 오르면서 개고생한 추억을 묻은 곳이다. 장벽처럼 앞을 가로막는 백두대간을 지나기 전, 무겁던 하늘이 가벼워지려 한다. 백두대간..

어머니가 가르쳐준 행운, 네 잎클로버_20210818

행운도, 행복도 준비한 사람에게 마련된 운명일 수 있다. 내가 할 수 있는 도전, 내가 해야 되는 노력도 어쩌면 지난한 인내와 비례해 좀 더 머나먼 미래의 성찰을 위한 것, 명확히 규정 지을 수 없는 안갯속 불분명한 형체 같지만 점점 그 형체가 규명되고 선명한 관념화될수록 나는 또 하나의 통찰을 조각한다. 어머니가 건네준 네 잎클로버는 이기적인 아들의 어떤 깊이로도 심연에 다다를 수 없듯 난 그 한계를 느끼며 성숙해져만 간다. 어머니가 자식에게 주고 싶은 건 형상화한 네 잎클로버가 아닌 염원이다. 꿈은 이루어진다고 확신의 단계는 필요하기 때문이다.

적막의 비가 내리는 금성산성_20200624

아침에 간헐적으로 내리던 빗줄기가 정오를 지날 무렵부터 굵어져 금성산성으로 가는 길 위에 작은 실개울을 만들었다. 전날과 같은 길을 답습한 이유는 내리는 비로 인해 텅 빈 금성산성에서 바라본 풍경이 궁금했기 때문이기도 하고, 충용문에서 만난 굶주린 어미 고양이가 눈에 밟혔기 때문이기도 했다. 비교적 화창한 담양은 가지런히 정렬된 새침한 느낌이라면 비 오는 날엔 슬픈 곡조를 목 놓아 부르는 망부석 같은 느낌이었다. 제법 많은 비가 내리는 가운데 빗소리는 상당히 정제되어 풍경과 달리 고요했고, 아무도 찾지 않은 산성은 희로애락을 극도로 배제하며 차분한 모습은 잃지 않는다. 어디론가 서서히 흘러가는 물안개는 지상에서 남은 슬픔을 모두 껴안고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집으로 가는 길... 나도, 안개도 ..

졸업 이후 첫 재회_20200506

까까머리 학생은 어느새 중년으로, 당시 중년에 접어들었던 스승은 자글한 주름이 얼굴을 뒤덮은 장년으로 시간이 변화시켜 버렸다. 사시는 댁 가까이에서 마주쳤을 때 뒷모습만으로도 그 분임을 알아차렸고,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린 스승께서도 금세 익숙한 듯한 눈빛으로 화답하셨다. 스승을 모시고 산세가 빼곡한 숙소 부근 카페로 모셨고, 강이 발치에 보이는 야외 테라스에 나와 그간의 미뤄왔던 이야기 보따리를 각자 풀어놓았다. 점심 조금 지난 시간에 만나 꽤 오래 이야기를 나눴는데 스승의 입담은 여전하셨고, 덕분에 어색할 틈도 없었다. 여기 카페 경관이 꽤 좋았는데 카페 뒤뜰 지나 강이 흐르고 그 강 너머엔 경사가 급한 산이 장벽처럼 둘러쳐져 있어 눈앞이 완전 녹지나 마찬가지였다. 테라스에서 강과 산을 바로 앞에 ..

곡성의 유명인사, 소머리국밥_20200319

드뎌 소머리국밥집에 도착, 역 주변이라 전형적인 정취가 남아 있으면서도 잘 정비된 도로에 맞춰 반듯한 첫인상은 놓치지 않았다. 식당 내부도 오래된 집의 분위기는 남겨 두고, 현대식 깔끔한 분위기를 더해서 한결 편한 식사가 가능하다. 이른 아침을 대충 챙긴 터라 국밥을 한 술 뜨자 잡내가 없으면서도 특유의 구수함은 잃지 않았는데 서울에서 이 가격을 구경하기란 쉽지 않으면서도 그렇다고 내용물이 허술한 것도 아니라 오히려 건더기조차 푸짐하다.-물론 특을 시키면 오지게 만족하겠지- 슝슝 썰어 놓은 대파를 국물에 들이붓고 한술 한술 뜰 때마다 속은 편안해지고, 마지막 한술마저 비울 때까지 깔끔한 첫맛은 변함없는 걸 보면 전라도 맛집이라 소문나면 별 의심하지 않아도 되겠다. 어떻게 식사를 끝냈는지 모를 만큼 마지막..

냥이_20200205

집으로 가면 조용하게 반기는 새가족. 서 있을라 치면 다리 사이를 꿀벌처럼 바삐 오가며 눈을 맞히고 싶어 한다. 틈만 나면 눈을 맞히고 여전히 살갑게 다른 가족들을 쫓아다니며 말은 할 수 없지만 눈빛과 몸짓을 보더라도 '넌 내가 특별히 간택한 집사니까 얼른 냥이 언어를 배우렴' 이렇게 설득 시키는 느낌이 농후하다. 잠시 일어났다 사람처럼 자기. 대부분 잠 잘 때의 배치기 포즈로 입이 한글 'ㅅ'에서 영문 'Y'로 바뀐다. 하루 일과 중 대부분 잠을 자면서 잠꼬대를 한다. 지금껏 찍은 사진들 중 가장 제대로 된 증명 사진이다.

눈부신 서리를 도사곡에서 만난다_20200204

파크로쉬에서 이틀 묵고 다음 숙소로 잡은 곳은 정선 사북에 위치한 도사곡 휴양림으로 전날 하늘숲길에서 얄팍한 체력이 바닥나 정신 없이 자는 사이 벌써 해는 중천에서 눈부신 미소를 짓고 있었다. 봄 같던 겨울 속에서 추위를 예고하는 서리가 배수의 진을 쳤지만 미세 먼지가 물러간 날이라 모든 게 반가웠다. 도사곡에서 하루를 쉬고 다음 여정으로 잡은 곳은 영월 어라연. 그리 먼 곳은 아니지만 어라연에서 긴 구간 도보로 여행을 해야 되는 고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38번 국도로 차를 올리는 바람에 도사곡 휴양림이 어떻게 생겨 먹었는지 조차 모르겠다. 하는 수 없이 여기도 다음을 기약하는 수 밖에.

하얀 하늘숲길을 거닐다_20200203

원래 계획되었던 하늘숲길은 기존에 출발점으로 삼았던 화절령과 만항재가 아닌 두 고개 사이, 하이원CC 인근에서 화절령 방면으로 출발했다. 서울 수도권은 코로나19로 인해 심리적으로 잔뜩 위축되어 마스크 구하기는 하늘에 별 따기고 바깥 외출은 극도로 기피하는 것과 달리 여행 떠나온 3일 동안 강원도 일대는 마스크를 끼지 않고 다니는 사람도 많았고, 식당 같은 곳에서도 마스크를 착용하지 않아도 하등 이상하게 보는 사람도 없었지만, 나를 포함하여 지나가는 몇몇은 마스크를 착용하고 다녔다. 코로나 관련 뉘우스가 나오면 강원도는 괜찮다는 주변 이야기도 드문드문 들리는 걸 보면 아직은 경각심을 가진 사람이 많지 않구나 싶은데 평소 서울 수도권에서 정선 사북/고한으로 오는 여행객이 많았던걸 대비해 보면 지금은 여행객..

포근한 둥지로_20200202

이른 시간에 파크로쉬로 돌아와 저녁을 기다리던 중 주변을 둘러 보다 이색적인 것들을 만났다. 산중 추위는 서울의 추위와 비교할 수 없이 매섭지만 공기 내음이 향그롭다. 그래서 잠깐 둘러본다고 옷 매무새를 허접하게 꾸렸던 후회도 들었지만 적막을 뚫고 타오르는 불꽃들이 온기를 대신 채워줬다. 우선 숙소에 들러 편한 옷차림으로 변신하고 창밖을 내다봤다. 실제 가리왕산의 위용은 거대하다. 처음 여길 왔을 때 창 너머 가리왕산자락을 보고 나도 모르게 감탄을 뱉었더랬지. 우측이 서편 가리왕산 정상 방면이라 그쪽으로 해가 지고 땅거미도 진다. 파크로쉬에서 볼 수 있는 야경들 중 진짜 불도 있다. 장작 대신 석탄인데 첨엔 진짜 불인가 싶어 다가섰다 온기를 느끼고 잠시 눌러 앉았다. 불을 보고 있자니 문득 미스터션샤인의..

추억 속 간이역의 출발이자 종착지, 정선역_20200202

기차역의 낭만을 보고 싶거들랑 정선역으로 가야된다. 막연한 그리움, 기대와 설렘. 기차역은 예나 지금이나 특유의 감성은 변색되지 않는다. 곡선의 철길은 직선화 되면서 의도와 결과만 중시되지만, 기차역은 문명의 혁명에도 결국 건재할 수 밖에 없는 운명이다. 처음 정처 없이 기차 여행을 떠나 도착한 곳이 정선역이라 몇 년 동안 기억을 고스란히 숨겨둔 채 애써 외면했던 진실은 봄의 기지개처럼 견고한 땅을 비집고 나오듯 어쩌면 나는 정선역이 변화하지 않길 바랬지만 발아하는 호기심을 막을 순 없었다. 시간의 흔적이 완연하지만 묘하게도 수채화 같은 추억의 담담한 행복은 어떤 상흔도 없다는 걸 확인한 게 뜻 밖의 수확이랄까? 시간의 이야기가 그토록 많던 간이역은 대부분 사라지고, 기차의 정취도 이제는 많이 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