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 자연 그리고 만남 512

봄에 만날 결심, 진천 농다리_20250406

봄과의 약속처럼 굳어진 농다리 여정은 어느 하나를 콕 찝는 게 아닌 작은 다리를 넘어 펼쳐지고 짜여진 모든 것들에 대한 매력 때문이었다.농다리를 건너며 기대감은 잔뜩 부풀어 오르고 거길 건너는 순간 미르숲에 거미줄처럼 촘촘히 짜여진 길이 있고, 어떤 길로 방향을 잡든 작은 길 옆에 숨 쉬고 있는 잉태된 봄이 있으며, 숲 너머 무대의 막을 열어젖히듯 펼쳐지는 초평호가 유기적으로 엮여 있었다.주차장을 가득 메운 차량 이상으로 많은 사람들이 찾는 농다리는 미로만큼 다양하고 많은 길이 직물처럼 엮여 있어 사람들이 많은 곳은 북적대지만 거짓말처럼 한적한 곳 또한 곳곳에 숨어있어 마치 모래 속에 진주를 찾는 재미가 있어 적당한 호기심을 충족하는 재미도 있었다.그런 압도적인 기대감에 올해 역시 농다리를 찾았고, 하필..

봄이 흐르는 대로 청계천 걷기_20250328

다시 청계천을 밟아 동대문 부근까지 걸어가던 중 교육에 참석했던 강사를 만나 거리에서 잠시 이야기를 나눈 뒤 다시 가던 길을 재촉했다.강의 내용이나 발성이 좋아 인상 깊었는데 청계천에서 만나게 될 줄이야.헤어지고 다시 걷는 길엔 봄의 진수가 홍수를 이루고 바다가 되었다.하루가 다르게 무르익어가는 봄의 청량함과 청순함.파릇함은 무르익으면 퇴색되는데 봄의 품에서는 퇴색이 아닌 성숙이며, 잃어버리고 지워지는 게 아니라 깊이를 더했다.점심 식사를 끝낸 사람들과 제 갈길 가는 사람들이 함께 어우러져 길은 흐르는 물길처럼 경쾌했다.이제 청계천으로 내려와 동대문 방향으로 걸어갈 차례.무료하던 겨울이 있던 자리에 이따금 솟아나는 봄은 그래서 즐겁고 시선을 끌었다.때마침 하늘도 맑고 청명한 날이라 목적지까지 용무를 보고..

영천에서의 봄 구경을 흘려 버리다._20250323

바야흐로 봄은 봄인가 보다.영남지방은 이른 더위로 전날 대구 결혼식에서부터 영천 시내 저녁 식사 때까지 얇은 셔츠차림도 두껍게 느껴질 만큼 연신 땀이 흘러내렸고, 숙소는 밤새 더위가 빠지지 않았던 데다 댕댕이 짖는 소리로 잠을 설쳤다.그런 가운데 이튿날에도 이른 더위는 지속되어 단숨에 봄을 건너뛰고 여름이 오는가 싶었는데 부스스 아침잠을 떨치고 들판에 나오자 봄꽃이 고개를 내밀어 밤새 짜증 난 앙금을 떨칠 수 있었다.봄에 소리소문 없이 다가왔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불현듯 사라지는 꽃을 보면 봄을 실감하게 되는데 이게 제법 많이 펴서 멀리서 보면 낙엽 자욱한 들판처럼 보이다 가까이서 보면 낙엽 사이를 뚫고 만발해 있었다.어제 만났던 냥이들을 보러 왔지만 녀석들은 어디에도 없어 밥을 줄 수 없었다.멀리 고가..

겨울과 봄의 협주곡, 세평하늘길 2~3구간_20250308

양원역에 도착하자 예상과는 다르게 한 팀이 다른 세상에 발을 디딘 것처럼 신기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며 같은 한국이 맞나 의심과 호기심 어린 대화를 나눴고, 승부역에서 내릴 때부터 비슷한 시차를 두고 걷다 앞서 나갔던 한 분은 양원역 뒤편 전망대 같은 자리에서 휴식과 더불어 요기 중이었다.지난해 들렀던 기억과 대비해 큰 변화가 없어 잠시 대기실 내 둘러보는 걸로 만족하고 이내 가던 길을 출발, 여기서부터 세평하늘길 2구간이 시작하여 비동 임시승강장까지의 체르마트길이었는데 지난해 비동 임시승강장을 지나는 길이 굳게 잠기며 폐쇄되어 이 구간은 처음이라 사뭇 설레는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바로 출발했다.[이전 관련글] 숨어 숨쉬는 협곡과 만나기, 세평하늘길 1구간_20250308문명을 거부한 산과 강, 그리..

숨어 숨쉬는 협곡과 만나기, 세평하늘길 1구간_20250308

문명을 거부한 산과 강, 그리고 자연이 숨어지는 곳, 오랫동안 사람의 발길을 허용하지 않은 낙동강이 조각한 협곡은 그 흔한 이름조차 없이 태고적부터 삶을 영유하다 뒤늦게 산책길이 닦이며 걷는 수고를 마다한 자들만 만나는 곳이었다.지난해 허리가 끊어진 길을 위태롭게 지나며 고된 시간을 통한 추억이 돈독해졌고, 때마침 끊어진 길이 다시 이어졌다는 소식에 잠재된 욕망을 딛고 이곳으로 향했는데 거의 1년 차이에도 불구하고 지난해와 달리 이번엔 겨울을 연상시키는 눈으로 모든 길이 오롯이 덮여 있어 그로 인해 더욱 뜻깊은 추억이 한층 견고해질 수 있었다.길은 마찬가지로 승부역에서 출발해 세평하늘길을 시작하여 마지막 구간인 분천역까지 완주하기로 결심했고, 눈이 덮여 발걸음마다 미끄러웠지만 후회는 뽀얀 눈아래 덮여 털..

세평 겨울 둥지처럼, 승부역_20250308

분천역을 운행하는 3종류 열차는 다른 선로와 기형적으로 빠를수록 가격이 저렴했고, 가장 느린 협곡열차는 상대적으로 가장 비싼 열차였는데 세평하늘길을 걷기 위한 내게 있어 때마침 가장 빨리 닿는 열차가 가장 신속하게 승부역까지 실어줘 타이밍이 절묘한 덕에 첫걸음부터 물 만난 물고기처럼 경쾌했다.초봄에 쌓인 눈과 하늘을 잔뜩 가린 협곡을 탐방하기 위해 비교적 많은 사람들이 승부역에 있었는데 나처럼 열차를 이용한 사람들도 있었지만 대부분 개인 차량이나 단체가 통째 전세를 낸 버스를 이용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이전 관련글] 세 평 협곡 간이역, 봉화 승부역_20240309문명은 시간도 거칠고 세차게 현혹시켰다.하루가 다르게 변화에 길들여진 세상과 달리 2004년 이후 20년 만에 찾은 승부역은 시간도 더디게..

그리움을 싣고 달리는 열차의 간이역, 분천역_20250308

문득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매끄러운 길이 그리웠는지 간소한 아침 끼니를 때우곤 주저할 겨를 없이 분천역으로 왔다.아직은 봄의 소식이 이 깊은 골짜기엔 소원했지만 떠나는 겨울이 무척 그리워질 거란 예감이 엄습해 왔고, 기어이 협곡을 비집고 꿈틀대는 고독한 외길이 지난번 허리가 끊겼다 다시 연결된 반가움이 더해져 우발적인 선택을 손꼽아 기다렸다.분천역에 도착하자 주차장은 한적했고, 주차장에서 보면 장벽처럼 휘두른 죽미산을 이은 능선들이 마치 만년설의 깊은 잠에 빠진 양 하얀 단잠에 빠져 있었다.[이전 관련글] 황혼의 간이역_20141102흥겨움 뒤엔 항상 아쉬움이란 후유증이 남기 마련. 이제 올해의 저무는 가을을 떠나 보내고 나도 집으로 가야겠다. 영동고속도로는 이미 가을 단풍객들의 귀경길로 강원도 구간..

삶과 삶 사이로, 오산 오색둘레길_20250303

적당한 맛과 멋, 적절한 땀과 그때그때 주어지는 보상.게다가 사람들이 살아가는 둥지와 터전 사이로 지나가는 오산의 오색둘레길은 냉정하게 말하면 동탄에서 허벌나게 돌아다닐 때만큼 흥겹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집 가까이 자연과 문명을 버무린 길이 있어 다행이었다.2009년 동탄에 이사를 했을 때 회사 사람들은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었다.동탄이 어딘지 모르는 사람들이 열에 아홉이었고, 그마저 아는 사람들은 부정적인 편견으로 한 마디 거들었다.그 먼 곳에서 서울까지 어떻게 다니냐, 동탄이 화성? 살인의 추억에 나오는 그 화성?, 반도체 공정에서 불산이 나오면 어쩌나 등등막상 동탄에서 사는 난 그 쾌적함에 처음부터 대만족이었다.사람들이 많지 않음에도 매끈하고 깔끔하게 정돈된 주변과 하루 종일 찾아오는 사람이 없을 법한..

봄 내음이 묻어나는 동탄 만의사_20250225

봄을 준비하는 무봉산 자락 아래 만의사에 들렀고, 봄의 기운이 느껴지는 사찰은 또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언제부턴가 만의사로 가는 길목엔 대형 카페가 생겨 꾸준히 찾는 사람들이 늘어나 줄지어 카페로 향하는 차량 행렬과 달리 카페를 지나면서 거짓말처럼 한적한 산사의 민낯을 그대로 드러냈다.이따금 무봉산행을 즐기는 사람들이 오고 갔지만 사찰 내엔 봄을 예견하는 겨울 끝자락 특유의 휑한 포근함이 남아 있었다.사찰 내 주차된 차량은 무봉산 등산객들을 위해 만들어 놓은 초입의 작은 주차장보다 더 한적했고, 구름은 봄을 실어 나르느라 분주했다.만의사 내 시멘트가 굳기 전 댕댕이들이 찍어놓은 발자국들이 있었다.이 귀여운 장면을 지나치기엔 아까워 쪼그려 앉아 사진으로 담았는데 막상 사진으로 보면 발자국이 볼록하게 보였..

청명하던 하늘 아래 오산 독산성_20250224

4일의 휴일 중 셋째 날, 용인 부아산으로 향했다 오르는 길을 찾지 못해 그냥 발길을 돌렸고, 마땅히 여정을 즐길 만한 곳이 없어 주저하는 사이 차량은 어느새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그렇게 결정 장애를 일으킬 때면 만만하게 찾을 수 있는 곳이 바로 반석산이나 독산성이었는데 반석산의 경우 가을 이후로는 거의 가지 않았지만 뻔질나게 드나들던 장소라 이렇게 시간을 쏟고 싶지 않아 독산성으로 급히 방향을 선회했다.평일이라 독산성으로 향하는 길은 한적했는데 길가에 아직도 건재한 빙판이 한몫을 한건지도 모르겠다.[이전 관련글] 초여름의 신록, 오산 독산성 세마대를 가다.땅거미가 질 무렵, 거실에서 문득 서남쪽 방면에 희미한 실루엣의 나즈막한 산이 하나 보이고 봉우리엔 가느다란 불빛이 반짝였다. 그게 무얼까? 궁금증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