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에 대한 넋두리

적막의 비가 내리는 금성산성_20200624

사려울 2022. 10. 17. 05:03

아침에 간헐적으로 내리던 빗줄기가 정오를 지날 무렵부터 굵어져 금성산성으로 가는 길 위에 작은 실개울을 만들었다.

전날과 같은 길을 답습한 이유는 내리는 비로 인해 텅 빈 금성산성에서 바라본 풍경이 궁금했기 때문이기도 하고, 충용문에서 만난 굶주린 어미 고양이가 눈에 밟혔기 때문이기도 했다.

비교적 화창한 담양은 가지런히 정렬된 새침한 느낌이라면 비 오는 날엔 슬픈 곡조를 목 놓아 부르는 망부석 같은 느낌이었다.

제법 많은 비가 내리는 가운데 빗소리는 상당히 정제되어 풍경과 달리 고요했고, 아무도 찾지 않은 산성은 희로애락을 극도로 배제하며 차분한 모습은 잃지 않는다.

어디론가 서서히 흘러가는 물안개는 지상에서 남은 슬픔을 모두 껴안고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집으로 가는 길... 나도, 안개도 무거운 발걸음으로 담양을 떠나는 날이다.

이런 정취가 너무 좋다.

담양이면서 잘 정비되어 있고, 북적이지 않으면서 자연과 어울리는 가운데 사방에 정적을 깨고 내리는 비가 사각사각 세상과 부딪히는 이 소리와 정취.

이로 인해 담양을 떠나는 마지막 날임에도 심리적인 숙제도, 근심도 없는 상태에 담양은 제격이었다.

길에서 달팽이를 만나 처음엔 깜놀했다.

마치 비를 맞으며 허물을 탈피하려 기다리는 뱀과 같았다.

자세히 보니 달팽이로 여전히 느리지만 어딘가 명확한 목적지를 향해 한 치 망설임은 느껴지지 않았다.

얼마 가지 않아 또다시 깜놀!

거대 두꺼비가 아장아장 기어가다 서로 마주치며 함께 깜놀했다.

한숨 슬어 내리며 몇 마디 던졌더니 녀석은 다시 갈 길을 재촉했고, 멀어져 가는 뒷모습을 보며 나 또한 가던 길을 재촉했다.

산성에 도착할 무렵엔 출발할 때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빗줄기가 굵어져 있었다.

보국문 앞 꽃잎은 전날과 달리 움츠린 채 비를 피한다.

요란한 빗소리와 달리 물안개는 익숙한 침묵을 지키며 산기슭 따라 천천히 산을 오르고 있었다.

충용문 너머 물안개 무리가 지나고 있었다.

담양에 남은 슬픔을 안고 떠나는 걸까?

요란한 세상도 빗소리를 제외하면 적막 뿐이다.

그 적막 사이로 산기슭에서 잠자고 있던 물안개가 세상을 향해 꿈틀거린다.

뜬구름인 양 충용문을 지나던 물안개는 사라지고 뒤돌아 보국문은 홀로 덩그러니 고독에 떨고 있었다.

이틀 연속 금성산성을 찾은 이유 중 하나인 요 녀석들.

충용문에서 비를 피하며 행여 하는 마음에 녀석을 불렀고, 주위를 둘러싼 두터운 빗소리 때문인지 녀석의 흔적은 전혀 찾아볼 수 없어 그냥 내려가려던 찰나 내리는 비를 뚫고 녀석이 다가와 반가운 인사로 끊임없이 몸을 비비며 냥냥거렸다.

반가움에 챙겨 온 밥을 풀자 허겁지겁 먹는 걸 보면 꽤나 굶은 상태로 새끼들한테 수유를 했고, 어렵게 버티고 있나 보다.

비를 피한 채 냥이와 오래 있다 녀석이 이끄는 곳으로 무작정 따라갔고, 그 길엔 동자암이 있었다.

녀석이 힐끗힐끗 쳐다보며 자기를 따라오는지 체크했었는데 동자암에 다다라 녀석이 보이지 않아 사뿐사뿐 걸으며 아기자기한 암자를 둘러보던 중 처마 아래 가족들이 비를 피하고 있었다.

이게 바로 반전, 암자에서 돌보는 냥가족이었다.

어미는 한 자리에 조랭이떡 자세로 가만히 앉아 있고 종이 박스 안에서 쉬고 있던 새끼냥들이 발자국 소리에 하나둘 바쁘게 피하기 시작했다.

모퉁이 돌아 두 녀석이 피하고, 한 녀석은 막 피하는 중이었으며, 남은 턱시도는 경계심과 호기심 사이에서 갈등 중이었다.

녀석들을 부르자 모퉁이로 피하던 녀석이 가던 길을 멈추고 돌아보고, 턱시도 냥은 가마솥 뒤에서, 나머지 두 녀석은 여전히 모퉁이 뒤에 숨어있다 치즈 녀석은 안전하다 여겼는지 모퉁이 너머 고개를 빼꼼히 내밀고 쳐다봤다.

어미 냥은 나와 가벼운 교감이 있었던데다 원래 사람에 대한 경계가 없는지 요지부동.

이렇게 냥가족과 눈인사를 나눈 뒤 작별하며, 곧장 하산했다.

연동사 길을 통해 산성을 내려와 텅 빈 아스팔트 도로를 걷는데 발끝에서 전해지는 느낌이 무척이나 좋았다.

빗줄기는 비교적 가늘어져 걷는 속도를 조금 올려 주차장까지 걷는 동안 스쳐 지나는 평이한 풍경이 평온한 마음을 깨웠다.

내려오는 길은 오를 때와 달리 작은 사찰을 가리키는 이정표를 따라왔는데 여느 사찰과 달리 거창하게 치장한 법당은 없고, 절벽 아래 작은 동굴에 불상이 있는, 이제 들어서기 시작하는 사찰 같았다.

그 사찰을 지나면서부터 매끈한 아스팔트 길이 있어 그 길 따라 작은 저수지를 지나 약 2km가 조금 넘는 거리 동안 확고한 의지로 인해 낯선 불안감은 없고, 비를 맞는 들녘의 휴식에서 무르익는 내음이 물씬 풍겼다.

길섶에 출렁이는 개망초 군락지의 물결과 적막한 오토캠핑장을 지나면 크게 굽이치는 오르막길 넘어 주차장이 있다.

주차장까지 얼마 걸어가야 하는데 다니는 차도, 사람도 전혀 보이지 않는 도로를 따라 음악과 빗소리에 젖어 힘든 줄 전혀 모르고 걷는 사이 어느새 주차장에 도착, 금성산성 진입로 초입에 있던 온천으로 향했다.

온천에 들러 너른 노천탕에서의 거리낌 없이 맞는 빗방울이 끈적한 여운을 몰아내고 피로와 더위를 쫓는다.

여전히 비는 내리지만 어느새 가늘어진 빗방울이 노천탕에 연신 동심원을 그리는데 그런 기분이 묘하리만큼 여행의 알싸한 기분에 양념 같다.

갈 길이 먼데도 어디서 나오는 여유인지, 막연히 먼길을 가기 위해 앞만 본다는 게 까칠한 거부감이 들 때가 있다.

먼길 떠나기 전 순창에 들러 저녁 식사를 해결하기 위해 유명한 순대집에 들러 국밥으로 해결했다.

시장은 전체적으로 무척 조용했지만 유독 찾은 식당은 테이블 몇 개를 이어 놓고 대낮부터 술판이 벌어졌다.

배를 든든히 채우고 포장한 순댓국을 들고 나오는데 어느새 빗줄기는 무척 가늘어졌다.

상행 고속도로를 따라 앞만 보고 열심히 달려오는 사이 희미하게 남아있던 낮은 완전히 사라져 완연한 밤이 되었다.

입장 휴게소를 지날 무렵 어린 냥이 하나가 핫도그를 손에 쥔 남성 앞에서 냥냥 울길래 차량에 남아있던 냥이 밥을 꺼내 녀석에게 가져다 주자 급하게 먹던 중 다른 냥들도 눈에 띄어 그 녀석들에게도 밥을 내밀었다.

일 년 채 되지 않은 어린 녀석들이 얼마나 배가 고팠으면 경계심을 벗고 지나는 사람 발끝에 매달렸을까?

편견만큼 무서운 게 본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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