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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의 진중하고 경쾌한 발걸음, 해인사_20210428

해인사 가는 길에 함께 걷는 봄의 동행으로 말미암아 미소 짓고, 말미암아 감동한다. 천년 고찰이라는 엄숙한 무게감에 첫 발을 내딛는 기억도 잊고 어느새 봄의 친근한 조잘거림에 역시나 자연의 위대함을 느낀다. 나부끼는 연분홍, 새하얀 손짓에 이끌리다 보면 엄숙 했던 취지는 망각되고 주객은 전도되어 인위로 축조된 사찰은 욕망의 과대포장으로, 천년 시간을 거스른 나무는 진정한 경전이 된다. 봄인데도 벌써 나무 터널은 견고해진다. 보기 힘든 대나무 꽃이라고? 봄의 설렘을 녹색으로 표현한다면 이런 색깔과 모양일까? 왕벚꽃이 활짝 만개하여 연신 연분홍으로 감염시킨다. 아래 밭을 갈던 보살(?)의 구수한 훈수에 잠시 주변을 둘러볼 여유를 챙긴다. 바위에 걸터 앉은 철쭉 한 송이. 해인사로 향하는 길에 여러 사찰이 많..

봄마루 정상에서, 오도산_20210428

봄이 늦게 찾아오는 1천 미터 고지에도 결국 봄이 오기는 온다. 높은 고지에 봄이 늦은 건 늑장을 부려서가 아니라 등정하며 깊은 잠에 빠진 생명을 일일이 흔들어 깨우기 때문이고, 겨울의 황막한 횡포에 일침을 가하기 위함이다. 오도산 정상에서 언제나처럼 천리안의 능력을 빙의받아 사방을 훑어본다. 육신은 자리에 머무르지만 상상의 날개는 이미 바쁜 날갯짓을 하며 너른 세상을 유영한다. 여지껏 가장 대기가 뿌연 날이다. (오도산 정상에서 천리안의 시선으로_20191126, 우뚝선 한순간, 오도산_20200615) 호수 너머 황매산 조차 어렴풋하다. 전날 머물렀던 휴양림 숙소가 바로 발치 아래 있다. 비록 대기는 뿌옇지만 산 틈틈이 피어나는 신록의 싱그러운 망울은 미세 먼지의 횡포에도 굴하지 않는다. 염주괴불주머..

오도산 가는 날_20210427

여행의 출발과 함께 늦다는 핑계로 미뤄뒀던 성묘를 꽃피는 춘삼월 끝물에서야 감행했다. 이미 세찬 바람에 잔뜩 실려 세상을 떠도는 송화가루가 자욱하지만 도심을 벗어나 뺨을 간지럽히는 숲 속 향기는 간절한 휴식의 내음과 흡사했다. 매번 방문 때마다 같은 자리에 서서 정독하는 계절의 정취를 보는 재미는 마치 애써 찾는 파랑새의 자취를 쫓는 것 마냥 졸립던 눈마저 초롱해진다. 최종 목적지인 오도산 휴양림으로 출발하여 고령을 지나는 길에 식사를 해결하고 동네를 둘러보던 중 시간의 흔적이 역력한 한옥에 발걸음이 멈췄다. 너른 마당 본채와 문간 사랑채는 고전적인 한옥을 그대로 살렸고, 옆채는 현대식의 단촐한 현대식인데 나무를 잘라 인간이 편의에 따라 만든 형태를 보면 꽤 오래전 부터 지붕을 받들어 나무 특유의 무늬와..

고행과 안심의 교착점, 1차 백신_20210426

지난 겨울에 독감 백신, 이번 봄에 코 백신. 나와 내 가족, 그리고 내 주위 아끼는 사람들을 생각하면 이까이꺼~ 간호사 스킬이 워낙 좋아서 거의 무통증에 가까웠다. 백신 접종 후 기저질환 판단을 위해 잠시 대기 중. 백신 접종 후 하루 동안 오한이 찾아와 몇 년 동안 손도 대지 않던 타이레놀과 친하게 지냈다. 지나고 나면 늘 생각하는 거지만 감염되고, 감염시키는 고행에 비하면 이까이꺼~ 물론 48시간 지난 시점에선 완전 멀쩡해졌지만, 아픈 사람치고 태연할 수 없는 것처럼 마음 약해진 상태에선 체온계 수치에 민감해질 수밖에 없다. 12시간 정도 지나 37.7도가 나왔다. 몇 년 동안 이런 수치를 가진 적이 한 번도 없었는데 그래서 몸살의 통증보다 이 어색한 불편함이 더 이질적이다. 38도를 넘어선 순간,..

나른한 4월 눈_20210405

4월 눈이 내리던 나른한 오후에 봄이 지나던 길목에서 꽃잎의 콧노래를 따라 걷는다. 계절은 등을 보이지 않고 시나브로 이 길을 따라 떠나지만 이미 지난 발자국이 구구절절 아쉬울 때, 그때마다 모든 계절이 머물던 자리에서 피어나는 싹에게서 품은 감사의 씨앗을 추스른다. 얼마나 머나먼 길이기에 떠난 자리의 여운은 이다지도 클까? 퇴근길에 벚나무가 줄기차게 늘어선 길은 때마침 부는 한차례 바람이 햇살과 버무린 눈송이를 휘감는다. 봄의 전령사가 떠나기 전에 작별 인사를 나눌 수 있어 참 다행이다. 사진들을 연속으로 넘기면 우수수 떨어지는 눈발이 살아서 번뜩인다. 그래도 아직은 눈구름이 두텁다. 봄의 쾌청한 기운에 맞춰 가슴 이끄는 걸음 또한 경쾌하다. 신록이 눈발을 밀어내는데 그 또한 봄의 하나다. 녀석은 하루..

따스한 봄비 내리던 예천_20210327

봄나물 중 하나인 머위를 뜯으러 왔으나 아침부터 기세 좋게 내리는 비에 얼마 지나지 않아 자리를 접고 돌아오게 되었다. 산중 비를 피할 생각 없이 고스란히 몸을 두드리는 빗방울은 마치 함께 음악을 연주하듯 재즈선율로 피어나 봄이 움트는 골짜기에 진동하며 강인한 잡초처럼 새 생명의 씨앗을 곁 뿌린다. 때마침 지나는 낮은 구름도, 텅 빈 도로를 질주하는 시골 버스도 평온의 품 안에서 흥겨워하는 작은 정취의 조각으로 모여 거대한 평화의 속삭임에 빗방울은 신명 난다. 강인한 생명력을 자랑하는 민들레는 겨울에도 종종 볼 수 있을 만큼 봄꽃이라 한정 짓기에 지나치게 과소평가되어 왔다. 오는 길에 괴산에서 비상식량을 미리 마련, 교촌과 콜라보로 나온 크로켓이라 간장 치킨이 속에 들어있고, 겉은 쌀로 바싹바싹하다. 머..

냥이_20210327

집사 냥반, 요즘 왜캐 늦게 기어들어와? 도통 추워서 말이지. 여기서 나를 품어 주던가, 아님 날 안고 쇼파에 앉게나. 낮에 집사 얼굴 오랜만에 보네, 그려. 가까이 와서 등 좀 두들겨 보게나. 말귀를 참 못 알아듣네. 등 두들기고 품어 달랬지, 이런 걸 덮으랬나? 노답일세. 봄을 한아름 따다 입에 넣자 새벽의 시원하면서 향긋한 내음이 은은하게 퍼진다. 물론 사유지에서 딴 진달래라 위태로운 비탈길이라도 맘 편하게 땄지만 벌레가 눈에 종종 띄인다. 꽃 씻은 물에 까만 벼룩 같은 게 동동 떠서 통통 튀어 다닌다. 먹기 전에 신중하게 봐야 되겠다. 냥이가 냉큼 다가와 호기심을 나타내다 자기 취향이 아닌지 나중엔 시큰둥해지고 대화하는 입을 뚫어지게 쳐다본다. 꽃에서 까만 벌레들이 나와 흐르는 물에 씻어 널어놓자..

일상_20210319

퇴근길에 만난, 우수에 찬 삼색이가 회사 앞 화단에 볼일을 본 건지 열심히 흙을 훑고 있다. 가까이 다가가 츄르 하나 주고 싶은데 처음과 달리 무척 예민해져 경계심 장난 아니다. 요 녀석아, 내 가방엔 늘 츄르 하나 챙겨 둔단다. 널 만나게 되면 주려고 그런 건데 그냥 '걸음아, 날 살려라'하면 주전부리의 유희를 모르잖아. 여전히 표정은 우수 가득했다. 화단에 흙으로 무언가 일을 하다 주변을 삼엄하게 경계한다. 가만 쳐다보자 눈이 마주침과 동시에 쏜살 같이 도망가다 안전거리 확보되는 지점에서 녀석도 나를 빤히 쳐다봤다. 녀석의 시그니처가 바로 살짝 고개를 숙여 자존감이 저하된 것만 같은 우수에 찬 표정이다. 바로 요런 표정이 내 기억에 각인된 모습이다.

정상을 향한 욕망, 단산 모노레일_20210307

오를 땐 가장 뒷좌석에, 내려올 땐 가장 앞 좌석에. 소문 듣고 찾은 단산 모노레일은 생각보다 한산하다. 국내 최장이라는데 20여 분이 넘는 시간 동안 가파른 경사를 꾸역꾸역 넘어가다 보면 어느새 지겨워질 무렵에서야 승강장에 도착한다. 길어서 오래 걸리는 것보다 느려서 오래 걸리는 게 더 맞겠다. 정상에 다다를 무렵 급경사 구간이 나오고 얕은 함성도 들리는데 비교적 경사가 급하긴 하나 짧은 구간이고 나머지는 뿌듯한 오르막이다. 호기심에서 타보면 괜찮은데 가장 멋진 경험은 문경 일대 백두대간과 완만한 지표면에 홀로 우뚝 솟아 있던 크고 작은 봉우리를 통틀어 그 경관이 멋지다. 서울과 남부지방에서의 접근성을 이점으로 근래 각광받는 문경은 역시나 백두대간의 큰 품에 기대어 멋진 산세를 쉽게 관망할 수 있다. ..

문경새재 '우리 마을 고양이 급식소'_20210307

모닝 커피 한 잔 하기 위해 카페 들렀다 식사를 기다리는 녀석들이 배고프다고 아우성이다. 건물에 마음씨 착한 누군가가 녀석들을 챙겨 거두는지 동네 냥이지만 그리 경계심이 많지 않았고, 커피를 다 비워 나갈 때쯤 식사 배달이 끝났는지 그릇에 가득 담긴 밥을 정신 없이 먹는다. 행여 식사 방해 될까 "오도독오도독" 밥 먹는 소리를 뒤로하고 자리를 뜬다. 이리 구슬피 울어 대는데 늘 가지고 다니던 밥을 챙겨오지 않았다. 카오스는 망부석처럼 굳어 있어 인형인 줄 알았다. 어린 삼색이. 사회엔 이렇게 선한 마음을 가진 분들이 많다. 눈에 띄지 않을 뿐, 어쩌면 이런 분들로 인해 사회는 별탈 없이 유기적으로 움직인다. '우리 마을 고양이급식소' 흥해라, 흥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