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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마루 정상에서, 오도산_20210428

봄이 늦게 찾아오는 1천 미터 고지에도 결국 봄이 오기는 온다. 높은 고지에 봄이 늦은 건 늑장을 부려서가 아니라 등정하며 깊은 잠에 빠진 생명을 일일이 흔들어 깨우기 때문이고, 겨울의 황막한 횡포에 일침을 가하기 위함이다. 오도산 정상에서 언제나처럼 천리안의 능력을 빙의받아 사방을 훑어본다. 육신은 자리에 머무르지만 상상의 날개는 이미 바쁜 날갯짓을 하며 너른 세상을 유영한다. 여지껏 가장 대기가 뿌연 날이다. (오도산 정상에서 천리안의 시선으로_20191126, 우뚝선 한순간, 오도산_20200615) 호수 너머 황매산 조차 어렴풋하다. 전날 머물렀던 휴양림 숙소가 바로 발치 아래 있다. 비록 대기는 뿌옇지만 산 틈틈이 피어나는 신록의 싱그러운 망울은 미세 먼지의 횡포에도 굴하지 않는다. 염주괴불주머..

나른한 4월 눈_20210405

4월 눈이 내리던 나른한 오후에 봄이 지나던 길목에서 꽃잎의 콧노래를 따라 걷는다. 계절은 등을 보이지 않고 시나브로 이 길을 따라 떠나지만 이미 지난 발자국이 구구절절 아쉬울 때, 그때마다 모든 계절이 머물던 자리에서 피어나는 싹에게서 품은 감사의 씨앗을 추스른다. 얼마나 머나먼 길이기에 떠난 자리의 여운은 이다지도 클까? 퇴근길에 벚나무가 줄기차게 늘어선 길은 때마침 부는 한차례 바람이 햇살과 버무린 눈송이를 휘감는다. 봄의 전령사가 떠나기 전에 작별 인사를 나눌 수 있어 참 다행이다. 사진들을 연속으로 넘기면 우수수 떨어지는 눈발이 살아서 번뜩인다. 그래도 아직은 눈구름이 두텁다. 봄의 쾌청한 기운에 맞춰 가슴 이끄는 걸음 또한 경쾌하다. 신록이 눈발을 밀어내는데 그 또한 봄의 하나다. 녀석은 하루..

따스한 봄비 내리던 예천_20210327

봄나물 중 하나인 머위를 뜯으러 왔으나 아침부터 기세 좋게 내리는 비에 얼마 지나지 않아 자리를 접고 돌아오게 되었다. 산중 비를 피할 생각 없이 고스란히 몸을 두드리는 빗방울은 마치 함께 음악을 연주하듯 재즈선율로 피어나 봄이 움트는 골짜기에 진동하며 강인한 잡초처럼 새 생명의 씨앗을 곁 뿌린다. 때마침 지나는 낮은 구름도, 텅 빈 도로를 질주하는 시골 버스도 평온의 품 안에서 흥겨워하는 작은 정취의 조각으로 모여 거대한 평화의 속삭임에 빗방울은 신명 난다. 강인한 생명력을 자랑하는 민들레는 겨울에도 종종 볼 수 있을 만큼 봄꽃이라 한정 짓기에 지나치게 과소평가되어 왔다. 오는 길에 괴산에서 비상식량을 미리 마련, 교촌과 콜라보로 나온 크로켓이라 간장 치킨이 속에 들어있고, 겉은 쌀로 바싹바싹하다. 머..

냥이_20210327

집사 냥반, 요즘 왜캐 늦게 기어들어와? 도통 추워서 말이지. 여기서 나를 품어 주던가, 아님 날 안고 쇼파에 앉게나. 낮에 집사 얼굴 오랜만에 보네, 그려. 가까이 와서 등 좀 두들겨 보게나. 말귀를 참 못 알아듣네. 등 두들기고 품어 달랬지, 이런 걸 덮으랬나? 노답일세. 봄을 한아름 따다 입에 넣자 새벽의 시원하면서 향긋한 내음이 은은하게 퍼진다. 물론 사유지에서 딴 진달래라 위태로운 비탈길이라도 맘 편하게 땄지만 벌레가 눈에 종종 띄인다. 꽃 씻은 물에 까만 벼룩 같은 게 동동 떠서 통통 튀어 다닌다. 먹기 전에 신중하게 봐야 되겠다. 냥이가 냉큼 다가와 호기심을 나타내다 자기 취향이 아닌지 나중엔 시큰둥해지고 대화하는 입을 뚫어지게 쳐다본다. 꽃에서 까만 벌레들이 나와 흐르는 물에 씻어 널어놓자..

안타까운 절경, 서강 선돌_20210304

함께 하지만 만나지 못하는 숙명에 구슬픈 서강 줄기는 말없이 흐른다. 어느덧 선돌 머리에 봄을 예고하는 전령사들만 분주할 뿐 여전히 그를 둘러싼 세상은 바람 소리만 사치로 들린다. 산수유 망울이 여차 하면 터질 기세다. 여차 하면 봄이 뿌리 내린다는 것. 양지바른 곳이라 주변을 세심히 둘러보면 봄소식을 품은 흔적들이 보인다. 영화 '가을로'에서 바로 이 구도로 나왔다. 바닥에 넙쭉 달라붙어 매일 조금씩 봄이 전해주는 기운을 영양 삼아 땅을 박차고 나온다. 만나려 해도 만날 수 없는 두 수직 바위는 갈망에도 불구하고 보이지 않는 숙명의 거대한 장벽에 가로막혀 있다. 그 슬픔을 절경이라 부르고 감탄이라 되씹는다. 흥행하지 않았지만 소설로, 영화로 가을 매력을 흠뻑 발산한 교과서 같은 '가을로'에 살짝 언급되..

이른 봄의 전주곡, 태안_20210220

서해의 바람이 지치지 않는 태안에서 진지하고, 유희 넘치는 대화를 나누던 날, 들판에서 소생하는 봄소식에 한껏 부풀어 오른 가슴을 되짚어 바람에게 묻노나니... 불현듯 찾아온 손님의 반가움이 바로 이런 기분일까 싶어 또한 같은 마음이려나. 빼곡한 장독대에서 부서지는 햇살이 아직은 찬 바닷바람에 냉점을 마비시킨다. 마당 한켠에 장독이 쨍한 햇살을 받아 반사 시킨다. 봄을 예고하는 양지 바른 곳이라 파리가 날아다니는 건가~ 노숙자 스타일. 소리소문 없이 봄을 전해주는, 땅에 나지막이 달라붙어 작은 꽃을 피워 몰래 봄을 데리고 왔다 갈 때도 몰래 데리고 간다. 하루 일과가 무척 짧게 느껴져 어느새 기웃거리던 해가 멀리 도망가 버렸다.

골짜기 작은 갤러리, 컨츄리 블랙 펍_20200709

한이와 같이 감곡에서 만나 여주 행님과 감곡 형을 찾아뵙는다. 여주 행님은 어차피 은사와 같은 분이라 언제든지 찾아뵙게 되지만 감곡 형은 도대체 얼마 만인가? 그렇다고 먼 곳에 사는 것도, 연락이 끊어진 것도 아니고, 유체이탈한 것처럼 바쁘지도 않건만 거의 1년 만에 뵙는다. 늘 서글서글한 인상에 매끈한 어투, 진정한 삶은 곧 끊임없는 변화와 능동적 대처이기에 늘 발로 뛰는 형인만큼 감곡, 장호원에서는 마당발이다. 그런 형을 여주 행님과 고향 친구와 함께 찾아갔으니 지극 정성에 멋진 자리로 안내했다. 작긴 해도 산 중턱이라 사람들이 오려나 싶었지만 입소문이 그래서 무서운지 저녁 시간이 되자 알흠알흠 주차장에 차가 들어서 금세 너른 주차장에 반 이상 들어찬다. 거의 1년 만에 만나 뵙는 반가움이 무색하게 ..

일상_20200530

화창한 날씨에 맞춰 가벼운 차림으로 만보 걷기에 도전한다. 일상처럼 피부에 쏟아지는 햇살이 부쩍 다가온 여름의 숨결을 느낄 수 있어 어느새 흥건해진 등짝을 달래며 꾸역꾸역 길을 오로지 하는 사이 꽤나 많은 걸음수를 채웠고, 집안에서 솟구치는 게으름을 떨치는 보람을 정직한 숫자에 위안 삼는다. 휴일 시곗바늘은 조급한 성격을 감추지 못하고 질주하는데 그럼에도 더위를 뚫고 가슴에 안기는 간헐적인 바람이 개운함만 남긴 채 피로를 망각시키는 휴일은 여전히 행복에 겹다. 장미의 미소? 살짝 물 빠진 듯한 이 색감이 도리어 자극적이지 않아 좋다. 정상 인근 낙엽무늬 전망데크에 서서 사정없이 흐르는 땀방울을 어르고 달랜다. 더불어 눈은 시원하다. 호수공원으로 내려와 바삐 움직이는 꿀벌의 꽁무니를 쫓아 몰입의 희열도 맛..

일상_20200522

해 질 녘 둘레길에 발을 들여놓고 쉴 새 없이 한 바퀴를 둘러보며 아카시꽃이 떠난 흔적을 되짚어 본다. 미려한 향과 형형색색 다른 표정을 지닌 봄의 결실을 이어받아 곧 찾아오는 여름은 과연 어떤 모습 일까? 겨울이 훑고 간 황량한 스케치북에 하나둘 그려진 신록의 싹과 자연의 붓이 찍어낸 고운 색결, 거기에 더해 심심한 여백 사이로 비집고 나오는 역동적인 생명들. 조만간 신록으로 그득히 채워질 약속만 남겨 두고 한 계절을 풍미하던 시절의 흔적들은 이따금 지나는 빗방울에 용해되어 시간처럼 흔적 없이 사라졌다. 노인공원에서 둘레길 곡선에 발을 들인다. 얼마 전 지나간 태풍의 풍마로 쓰러진 아카시 나무지만 여전히 왕성하고 집요한 생존 본능으로 새 생명을 잉태시켰다. 큰 나무들이 또 다른 세상을 만든 것 같은 둘..

냥이_20200520

보통 현관문을 열고 귀가하게 되면 녀석은 현관까지 어떻게든 마중 나오는데 어쩐 일인지 제 쿠션에 퍼질러 누워 빤히 쳐다보기만 한다. 뒤늦게 녀석이 부시시 나와 간식 하나를 상납하자 언제나처럼 가족들 껌딱지가 된다. 베란다 정원 한 켠 영산홍이 이제서야 만개했다. 늦은 건 게으름과 기만이 아니다. 신뢰와 인내의 시선에선 화답과 확신이며, 인생과 매한가지로 꽃은 매력의 본분이 최선일 수도 있다. 하나의 꽃망울에 두 빛깔이 어우러져 단색의 편견을 뛰어넘는 경이로움처럼 한계는 언제나 내 편견의 부산물이다. 때마침 맑은 대기로 인해 석양의 물결이 흥겨움에 춤을 춘다. 테이블 파수꾼? 테이블 위 모든 것들에 대한 호기심과 관심의 눈빛이라 이렇게 똘망똘망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