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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_20240328

시나브로 봄이 왔고, 그걸 뒤늦게 눈치챈 뒤에야 겸연쩍어 시선을 낮춰 그 컬러의 향기에 잠시 여유를 찾는다.벌써 이 들판의 존재들을 깨우고 있었음에도, 비가 내려 행여 흩어지고 달아날까 물방울 아래 가뒀음에도 뭐가 그리 건조한 삶을 추종한 건지 파릇하던 봄의 기대를 잊고 지냈다.그리 작은 프레임과 그 작은 세상에 가둬둔 내 삶을 이렇게 달래 보는 것도 그나마 좋은 방법 아니겠나.퇴근길에 동탄역 인근에 내려 이발하러 가는 길에 생소한 고수부지를 지나면서 개나리에 이끌리듯 데크로 향했고, 개나리 안내로 세상의 봄에 초대받았다.개나리 십장생처럼 공간에 스스로 갇히지 말라고.이발을 하고 나와 커피 한 잔을 손에 들고 집으로 걸어가는 길에 여울공원 봄소식이 무척 싱그러웠고, 특히나 만개를 시작한 목련과 그 꽃잎에..

냥이_20240224

커피잔을 비우는 동안 녀석과 함께 앉아서 유튭을 시청, 하나 정도는 녀석이 좋아하는 영상을 틀어줬다.그러면 한 동안 시선 고정이었다.오후에 녀석이 선호하는 쇼파 인견 방석에 자리를 잡고 곧 쏟아질 잠에 빠져들 예정이었다.눈이나 자세만 봐도 이제는 선무당이다.그 기회를 이용, 카메라로 녀석을 찍어주자 이번엔 기분이 괜찮은지 고개를 돌리지 않고, 가만히 자세를 잡아줬다.물론 잠들기 전까지 누군가 옆에서 앉아 있다는 방증이다.오후 느지막이 나와 동네를 걷던 중 산수유 꽃망울을 발견했다.바야흐로 봄이 다가왔음을 폐부로 느끼는 것 이상으로 이제는 시각적인 정황들이 포착되기 시작했다.예전엔 그리 기다리던 봄이었는데 이제는 특정 계절을 기다리기보단 떠나는 계절의 아쉬움도 만만찮아 그 매력을 즐길 궁리도 곁들였다.

이른 가을 흔적 봉화와 안동 고산정_20221002

유구한 역사가 각인한 강변 기암절벽에서 가을 내음 한껏 실은 바람과 만났다.북녘에서 불어온 바람은 철새처럼 사뿐히 날아와 녹음의 둥지를 깨우고, 그 맹약의 속삭임을 뒤로하고 우린 집으로 향했다.얼마 남지 않은 삶을 한탄할 바에 숙명에 순종하는 꿀벌은 잠시도 쉴 겨를 없이 꽃잎의 매혹적인 향취를 나누고 다듬으며 우울한 가을을 애써 떨쳐내는 날갯짓으로 참을 수 없는 조바심에 맹렬히 경련했다.무명 배우처럼 이름 없는 기암절벽은 오늘도 숨죽인 채 남은 한 해를 다듬었다.이튿날 가족 모두가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식사를 끝내고 간단히 소일거리로 청소, 정리를 분담했다.아무래도 산골이라 수도권에 비해 가을이 일찍 물들기 시작했는데 땅에 붙어 생명을 유지하는 식물의 경우 마지막 불꽃 대신 화려한 꽃망울을 활짝 열어젖혔다..

유희의 찬가, 치악산 종주능선과 남대봉_20220504

칼날 같은 능선은 아니지만 치악산의 종주능선길을 걷는 건 무어라 단정 지을 수 없는 유희로 가슴 벅차다. 전형적인 오솔길로 길 폭은 한 사람 지나기에 자로 잰 듯 알맞고, 길가 유기물은 어느 하나 특별한 것도 없지만 그렇다고 하찮은 것 하나 없이 여느 길과 완연히 다른 기분으로 착색시켜 이따금 정신 나간 사람처럼 충족된 목적에 한숨 응수하며 오를 때의 고단함을 잊게 만들었다. 길이 아름다운 건 그 길의 필연을 역설하기 때문이고, 또한 오래된 시간의 자취 때문이기도 하다. 자연이 잉태된 땅에 불쑥 들어서 환영 받지 못하는 불청객은 길로 인해 손님이 되고, 친우가 되며, 때론 제자가 된다. 비록 뿌연 대기가 세상으로 뻗어가는 시선을 시샘하고, 용인하지 않지만 이 길에서 만큼은 세속과 다른 민낯을 하나씩 열거..

치악에 대한 중독, 치악산 남대봉 계곡길_20220504

모처럼 치악산에 도전, 산으로 가기 전 든든한 식사는 기본이라 가까운 원주 혁신도시에서 에너지 보충과 더불어 커피 한 사발 짊어지고 떠난다. 회사 계단 오르는 것도 턱 밑까지 숨이 차는데 치악산 남대봉에 오를 수 있을까? 첫걸음이 어려워서 그렇지 일단 발을 떼고 나면 어떻게든 오르는 것 보면 저질체력이 아니라 스스로 위안하고 다독거리는 수밖에. 원주혁신도시는 처음 밟는데 무척 깨끗하고 잘 짜여져 있었다. 게다가 외곽으로 치악산이 감싸고 있어 무척 부럽기도 했다. 또한 아침 햇살이 어찌나 강렬한지 산행을 하기 전부터 등짝이 촉촉해질 정도로 날씨 또한 포근했다. 치악산의 눈물, 영원산성_20210809 이 하늘에 모든 망설임을 털고 첫걸음 내딛는다. 티 없이 맑던 하늘의 화폭에 치악산의 미려한 선이 수놓듯 ..

봄을 만나러 금호강변을 걷다_20220430

인가와 불쑥 떨어진 강변의 봄은 움튼 녹색 물결이 출렁이는 가운데 그 물결 위로 이따금 손짓하는 봄꽃이 바다 파도의 하얀 물거품을 대신했다. 강을 따라 힘차게 흐르는 바람이 신이 난 이유는 어디든 내민 손을 맞잡아줄 새로운 생명이 강변 위에 공백 없이 자라 심지어 바람의 신명에 덩달아 밝은 색의 물결을 잘게 부숴줬고, 때마침 황사도, 미세 먼지도 어디론가 숨어 세상은 넘치는 유희가 강이 되고, 산이 되던 날이었다. 고산서당에서 나와 반대 방면인 금호강과 합류하는 방향으로 걸어 얼마 지나지 않아 야구 꿈나무들이 비지땀을 흘리는 리틀야구장에 다다랐고, 봄에 맞춰 각종 야생화들이 지천에 흐드러지게 폈다. 꿈나무들의 재능 잔치라 꽤 많은 가족들이 한데 모여 열기도 높았고, 좁은 길가에 아슬아슬하게 세워놓은 차량..

봄꽃 너울대는 평온한 고산서당_20220430

꽃들의 잔치가 미치지 않는 곳이 없을 만큼 온갖 색상이 풍년을 이루는 길을 따라 찾는 이가 없는 서당을 들러 잠시 흐르는 시간을 잊었다. 만발한 아까시 꽃이 강바람 따라 흥겨운 춤을 추는 마당에 꼬리표처럼 따라붙는 그 매혹적인 향은 어디론가 사라져 공허한 정취가 자욱한데 잠시 위안 삼아 작은 언덕 아래 몸을 숨긴 서당을 산책하며 평온의 한숨을 들이켰다. 오래된 나무와 근래 끼워진 목재, 아무렇게나 핀 들꽃은 마치 뒤엉킨 것처럼 난무했지만 나름 자연이 살아가는 질서에 따라 오랜 시간 익숙해져 비교적 그들만의 규율에서 절제와 절도가 공존하는 작은 세상이 평온을 떠받드는 곳이었다. 호텔에서 출발하여 용무차 서변동으로 가기 전에 금방 다다를 수 있는 동대구 IC 부근 금호강으로 향했고, 율하동 육상 선수단지 인..

여주와 부론을 오가며_20211002

전형적인 가을 날씨라 아침부터 온 세상을 태울 듯한 강한 햇살에 은사 따라 덩쿨마 터널로 향했다. 덩쿨마가 만들어 놓은 녹색의 터널이 무척 인상적이다. 주렁주렁 매달린 덩쿨마는 크기가 제각각. 덩쿨마? 흔히 알고 있던 뿌리에 열매가 '주렁주렁' 맺는 녀석이 아니라 이건 가지가 덩쿨로 자라는 줄기에 열매가 '덩실덩실' 맺힌다. 맛은 영락없는 마에 모양은 연밥 같기도 하고, 돌덩이 같기도 하다. 모처럼 은사를 찾아뵙고 '덕지덕지' 붙은 피로와 잡념을 떨치던 날이었다. 아궁이와 가마솥은 조만간 문화재로 등재되더라도 하등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점점 사라져 가는 동시에 시간의 짙은 향수가 매캐하다. 이 정취가 마치 가을 초저녁에 어디선가 전해져 오는 낙엽 태우는 향 같다. 앞마당을 둘러본 뒤 점심 식사도 하고 드..

평범한 존재들의 아름다움, 이끼계곡_20210910

초록의 천국은 과연 얼마나 있을까? 마치 세상과 격리되어 숨겨진 천년숲처럼 온통 이끼가 자생하고 있는 곳을 5년 만에 들러 폐부에 정체된 공기를 계곡의 텁텁한 내음으로 환기시킨다. 모든 식물이 서로 위로하고 의지하며 심지어 외부의 이질적인 습격에도 그들은 첨예한 배척보다 밀도 높은 습도로 접촉되는 모든 세포로 포근히 환영의 양팔을 편다. 새로운 생명을 잉태시킨 이끼는 힘겹게 뻗은 뿌리의 위태로운 생에 진정한 공존공생을 노래하며, 잊혀진 어미의 품과 입맞춤이 모든 생명에게 그리운 향기와 온기였음을 반추시킨다. 화려하지 않아도, 향긋하지 않아도 충분히 아름다운 이끼의 세상이 추억으로 바래지 않길. 만항재에서 어평재로 내려와 짧은 휴식 후 집으로 향하는데 가는 길에 가장 궁금하던 이끼계곡에 들렀다. 때마침 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