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 자연 그리고 만남 498

벌판에 솟구친 칼바위 능선, 순창 채계산_20210120

칼바위 능선으로 정평난 채계산은 세상이 온통 설원으로 뒤바뀐 평원과 그 사이를 가르는 섬진강의 번뜩이는 줄기가 마치 살아 움직이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자연에 우뚝 솟은 나지막한 산이다.동강 절벽길 이후 칼끝과도 같은 위태한 길을 걷는 건 오래된 기억이지만 아찔한 관문 뒤엔 늘 그렇듯 베일에 싸인 절경을 보여주는 답례도 잊지 않았다.언젠가부터 순창을 찾으리라 마음먹은 것도 바로 채계산이 꾸며 놓은 세상이야기를 듣고자함 인데 어느 계절에 오더라도 그 계절 아래 버티고 있는 자연은 같은 관용의 미덕으로 지나는 시간들을 쉴 수 있도록 큰 가슴 한 켠을 비워 놓는다.이제는 칼끝과도 같은 바위 능선에 문명의 도구를 덮어 절경 이면의 위험은 사라졌지만 과대한 위선을 배제하고 살짝 그 위에 배려만 덫대어 놓은 덕..

빛의 언어, 함벽루_20210103

잠깐 주어진 시간에 텅 빈 공원 거리를 산책하며 뺨을 찌르는 겨울 강바람과 잠시 시간을 보낸다. 속삭이는 귓속말처럼 강 너머 공원 불빛은 각양각색의 은은한 스펙트럼을 연주하며 청력이 받아들일 수 있는 향기를 발한다. 10여 분간 누각에 서서 처음 밟아본 땅의 무지개빛 소리와 코끝 알싸한 바람의 향기, 잠시지만 새로운 공간의 흥겨움에 잠시 냉철한 현실을 잊는다. 잠시도 소홀하지 않고 약속한 때가 되어 불빛이 바뀐다. 강에 기댄 그 컬러가 아른거리며 혀 끝의 달콤한 캔디 같다. 도심가를 등지고 있어 멋진 도시 야경은 기대할 수 없지만 텅 빈 세상에 홀로 선 기분을 선물해 준다. 강가 전망을 적나라게 알려주는 누각으로 빛과 강의 질감이 눈으로 전해진다. 불 꺼진 작은 절을 지나 강변길과 산책로를 걷는다. 계속..

창 너머 새해 일출_20210102

1월 1일은 살짝 흐린 하늘로 인해 적절한 일출을 놓쳤지만 이튿날은 보상이라도 해주려는 듯 구름 한 점 없이 화창한 하늘을 보여준다. 매일 뜨는 해라 특별한 일은 없지만 특별한 날의 의미를 덧씌워 연일 우울한 사회적 분위기를 스스로 타파하는 시도가 있기에 정신적 건강을 유지할 수 있다. 시간이 지나면 되뇌이게 되겠지? 그 해 겨울은 코로나19가 기승을 부렸고, 제야의 종소리와 해돋이는 은둔 속에서 조용히 맞이했었노라고. 산 너머, 바다 건너 솟구치는 태양이 아닌 올해는 특별하다 여기자. 고층 건물과 아파트를 박차고 나오는 특이한 일출이니까.

설경에 함락된 충주산성_20201218

눈이 소복이 덮인 성벽을 따라 걷는 동안 무심한 시간을 탓할 겨를 없이 허공을 채우고 있던 연무와 햇살이 뿔뿔이 흩어져 버렸다. 일상을 한발 벗어나고, 인파를 잠시 등지고 있던 찰나가 마치 정적에 휩싸인 허공처럼 한결 같이 머릿속을 맴돌던 잡념은 갈피를 잡지 못한 채 뿌연 안개처럼 걷히며 무념의 가벼움에 도치되었다. 대부분의 산성들이 근래 들어 고증된 역사를 발판 삼아 복원되었지만, 그 땅에 서린 처절 했던 흔적과 달리 마냥 평화롭기만 했던 건 어쩌면 수 없이 흘린 피의 궁극적인 신념과 바램 아니었을까? 위태로운 비탈길을 따라 밟는 오르막길보다 더욱 긴장되는 내리막길은 양귀비의 마력에 혼이 나간 나머지 제 생명을 압박하는 권력의 추악한 이면을 반증하는 만큼 때론 중력이 잡아 끄는 방향을 모르는 게 약이라..

가을 서사시, 담양_20201118

햇살이 어디론가 숨어 버렸지만 대기의 화사함은 오롯이 숨 쉬고 있는 만추의 전형적인 날에 메타세쿼이아 가로수길을 거닌다. 이따금 갈 길 바쁜 바람결에도 낙엽이 우수수 떨어지지만 그 또한 희열에 대한 남은 미련처럼 길 위를 거닌 감촉은 아득한 추억처럼 폭신하고 간드러진다. 계절보다 더 찰나의 순간과도 같은 낙엽 자욱한 만추는 그래서 기억에 더 선명한 각인을 새겨 넣는지도 모르겠다. 저마다 오고 가는 차들도 이 길을 지날 즈음이면 가던 조급함을 잊게 되고, 앞만 보던 시야의 긴장을 늦추며 일 년 중 찰나의 이 순간을 위해 굳게 닫힌 마음의 창을 열게 된다. 뽀얀 눈이나 오색찬연한 꽃잎이 아님에도 아름다움을 마주칠 때 터져 나오는 감탄사는 어디서 나오는 걸까? 도보길이 아닌 일반 도로라 지나는 차량이 위험한데..

가을 여운조차 아름다운 강천산_20201117

가을이 되어 단풍이 익으면 꼭 찾으리라 다짐했던 강천산은 3대 단풍산이라 칭해도 좋을 만큼 나무도 많지만 이파리 또한 아리따운 선홍색으로 유명세가 한창이다. 더불어 걷기에도 좋고, 주변을 장벽처럼 두른 산들이 있어 큰 힘을 들이지 않고 계절의 매력과 일대의 멋진 풍경들을 감상하기 좋다. 계곡길의 지나친 가공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도 많지만 월정사 전나무길이나 내소사 전나무길처럼 시간이 지나면 걷기 좋은 명소로 입소문을 타고 널리 알려지는 건 시간 문제다. 이미 절정의 단풍을 훌쩍 지나 대부분 낙엽으로 뒹굴고 있는 늦은 시기지만 여전히 찾는 발길은 끊이지 않았고, 미리 예정한 대로 광덕산을 거쳐 좀 더 오래 머무르기로 한다. 최고의 시기에 오면 좋지만 늦었다고 해서 모든 기회를 잃는 게 아니라 새로운 인연도..

단아한 주왕산 계곡, 절골_20201111

이미 가을은 떠나고 머물다 간 흔적만 공허하게 남아 무심히 불어오는 바람에 희미해져 가는 내음 뿐이다. 많은 사람들이 찾는 길을 버리고 그리 많이 알려지지 않은 계곡은 간헐적으로 방문하는 사람들의 모였다 이내 흩어지는 메아리만 수직 절벽 사이로 금세 사라진다. 자연이 아닌 인위적으로 이런 기이하고 미려한 솜씨를 발휘할 수 있을까? 낙엽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았는지 젖지 않고 수면 위를 유영하는 형형색색 이파리를 보노라면 일그러진 수면이 다시 평온한 모습을 찾듯 안타까움은 시간의 동정을 기대하긴 어렵다. 태고적부터 무던히 인내한 자연의 현재 모습은 지금까지 조급 했던 내게 한시도 가르침을 게을리하지 않는 위대한 스승과 진배없다. 단 하루의 짧은 밤이 못내 아쉽지만 그렇게 몸 기댄 안락함에 감사를 드리며, ..

찰랑이는 은하수 물결, 청송자연휴양림_20201110

얼마 만에 만나는 은하수인가!온통 암흑 천지 속에서 별빛이 쏟아지는 밤하늘을 보는 동안 바람도 잦아들어 함께 별을 헤아린다.출렁이는 별빛 파도를 따라 총총히 흐르는 은하수는 어디로 바삐 가는 걸까?하늘을 향해 손을 뻗어 한 움큼 쥐어 보면 향긋한 가을 내음이 손가락 사이로 뻗어 나와 천사처럼 날갯짓을 하며 암흑 속에 잠자고 있던 자연을 흔들어 깨운다.홀로 밤하늘을 즐기는 밤이다. 휴양림 통나무집을 홀로 빠져 나와 작은 능선 따라 밤하늘을 향해 올라 수없이 반짝이는 별빛 하모니에 넋 놓고 한참을 앉아 있었다.미세 먼지 수준이 보통임에도 은하수를 볼 수 있는데 청명한 날엔 얼마나 휘영청 밝을까?은하수를 만나 각별한 순간이었다.능선의 작은 산마루에 인적이 거의 닿지 않는지 무성한 풀숲 헤쳐 덩그러니 놓여있는 ..

가을 편지 속 책갈피, 불영사_20201110

쓸 수 있다면 가을 색동옷 차려 입은 이파리에 편지 하나 새겨 띄우고 싶다. 숨을 쉬고 있음에 감사하고, 결고운 빛 파도의 출렁이는 눈부심에 행복의 단물에 현혹되는 기분이 이 얼마나 감사한지를... 지나친 시간이라도 가을옷을 입은 추억은 더욱 각별해지고, 유희 넘치는 햇살 아래 시선을 시기하는 시간 조차 내겐 너무 특별하다. 이따금 지나는 여울의 조잘거림도 경쾌한 곡조 마냥 어깨가 들썩이고, 삶의 힘든 순간도 이토록 현란한 자연의 춤사위 앞에선 언제 그랬냐는 듯 망각의 어깨 너머로 사라질 때 지금까지의고난도 미쳐 깨닫지 못했던 뼈저린 통찰이었음을, 지금 살아 있고, 이 넘치는 자극에 감탄할 수 있는 것 또한 난 행복하다. 그래서 지나친 가을이라도 투정도, 안타까움도 없는 건 다음 해에 다가올 가을이 있기..

여명이 지고 은하수가 핀다, 태백에서_20201109

겨울 같은 만추, 여명이 나리는가 싶더니 찰나의 인연처럼 해는 순식간에 동녘마루를 박차고 뛰어올라 단숨에 어둠을 깨친다. 가을은 그리 짧은 게 아니지만 떠나려 할 때 뒤늦은 아쉬움처럼 아침의 고요 또한 분주한 세상이 펼쳐지고 나서야 애닮음을 아쉬워한다. 치열한 일상을 잠시 뒤로하고 맞이하는 휴식에 비로소 평온에 눈이 트이고, 지저귀는 새소리에 귀가 기지개를 켠다. 눈이 제대로 뜨이지 않는 깊은 졸음을 애써 누르고 베란다로 나와 새벽 여명을 맞이하며, 태백의 평화로운 대기에 추위를 잊는다. 마치 모든 세상이 깊은 잠에 빠져든 것만 같다. 찰나... 잠시 사색에 빠졌을 뿐인데 성급히 동트며 이글거리는 햇살의 촉수를 뻗어 세상을 흔들어 깨운다. 사용하지 않는 구형 아이폰과 아이패드를 집에 설치하여 CCTV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