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 자연 그리고 만남 498

산수화 같은 정선 설경_20210302

이번 정선 여행에서 가장 매력적인 설경은 흔하디 흔한 동네 외곽에 몰래 움츠려 있던 한 폭의 산수화 같은 별어곡 부근이었다. 마치 가로로 넓게 펼친 한지 위에 정성스레 먹인 먹물로 한땀 한땀 보드라운 붓으로 휘갈긴 듯 여백과 바위 절벽, 단조로울 새라 드물게 서 있는 소나무가 어우러져 담채화의 진수를 보여주고 싶은 자연의 진면목이다. 물론 편집에 대한 귀찮음에 메타데이터를 올리지만 단지 시각적인 심상만으로도 꽤나 수려하다. 산재한 의미 중 여행의 진면목은 이런 예기치 않은 감탄 때문일까? 느림의 미학처럼 평소 인적이 거의 없는 도로에서 속도를 줄인 만큼 자연의 진면목이 들어차 공간을 가득 채웠던 중력의 끈을 놓았다. 가슴이, 머리가, 심장이 여전히 살아 있어, 그래서 고맙다. PS - 정선? 정선. 어쩌..

떠나지 않은 겨울의 끝, 검룡소_20210301

이른 오후까지 내리던 비가 어느새 따닥따닥 소리가 나서 허리를 낮추자 동글동글한 얼음 알갱이로 변신했다. 강원도 고지대는 눈이 올 수 있다는 예보를 미리 접하긴 했지만 막상 눈앞에 싸락눈이 내리는 모습을 보자 발걸음이 무거운 건 어쩔 수 없다. 허나 눈에 보이는 얼음 알갱이가 보석처럼 반짝이며 아름답다. 고생길은 차치하더라도. 검룡소에 오는 날엔 꼭 눈을 만난다. 처음 왔던 가을에 그랬고, 작년 4월 중순 봄(한강의 세상 만나기, 검룡소_20151128, 평온의 눈이 내리는 검룡소_20200412)에 그랬으며, 이번 또한 마찬가지다. 초입에서 맞이하는 세찬 바람 또한 약속이나 한 것처럼 변함없고, 검룡소에 도착하여 바람이 거의 불지 않는 이중적인 얼굴 또한 마찬가지. 겨울은 떠날 채비를 하지 않았는데 이..

시선의 확장, 하늘숲길 화절령_20210228

꽃을 꺾던 나그네는 어디로 가고, 석탄을 나르던 둔탁한 소리는 언제 사라졌을까? 큰 고개 넘어 한숨을 돌려도 사방엔 첩첩산이 끝없는 선을 잇고, 어느새 오르막길에 대한 가쁜 숨이 송이송이 진달래처럼 피어나 감탄사가 되어 피로와 설움을 잊는다. 평지에서의 절망이 깊은 산중에서 희망이 되어 먼 길 마다 않고 달려왔건만 시간에 쫓긴 변화는 어느새 희망을 절망으로 변질시켜 버렸고, 거리와 빼곡하던 인가는 휑한 공허만 남아 깨진 소주병이 자욱하다. 삶의 시름도 태고의 역사에 비하면 찰나에 불과하건만, 그 찰나의 통증은 그다지도 서슬 퍼런 여운이 사무치던가. 공허와 땀내만 남은 운탄고도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추파를 던진다. 2014년 이후 화절령은 처음 밟았다. 그 이후 몇 차례 올 기회가 있었지만 강원랜드에서 ..

불빛 가득한 야경, 사북 둘레길_20210227

과거의 모습을 탈피하고자 거칠게 몸부림치는 사북의 밤은 여느 지방의 마을처럼 일찍 찾아와 깊은 잠에 침묵 중이다. 따스한 남쪽 나라와 달리 여전히 겨울 기운이 웅크리고 있어 끼고 있는 마스크 내부엔 어느새 이슬이 맺혀 인중을 간지럽히며 먼 길 찾아온 수고에 구수한 사투리처럼 입술 촉촉한 대화를 이어간다. 어두운 밤에 어디를 갈 엄두는 나지 않아 지난번 봐두었던 둘레길을 밟으며 오랜만에 찾아온, 오랜 공백을 깨듯 연탄 내음이 코끝 살랑대는 밤공기를 폐부로 맞는다. 여전히 사북의 밤은 일찍 찾아오지만, 대기를 가득채우는 빛잔치는 기세등등하다. 퇴근 뒤 열심히 달려 사북에 도착, 복지 프로그램으로 미리 예약한 메이힐즈에 짐을 풀고 바로 사북 지장천 둘레길로 이동했다. 지나는 길에 지장천을 중심으로 잘 다듬어진..

이른 봄의 전주곡, 태안_20210220

서해의 바람이 지치지 않는 태안에서 진지하고, 유희 넘치는 대화를 나누던 날, 들판에서 소생하는 봄소식에 한껏 부풀어 오른 가슴을 되짚어 바람에게 묻노나니... 불현듯 찾아온 손님의 반가움이 바로 이런 기분일까 싶어 또한 같은 마음이려나. 빼곡한 장독대에서 부서지는 햇살이 아직은 찬 바닷바람에 냉점을 마비시킨다. 마당 한켠에 장독이 쨍한 햇살을 받아 반사 시킨다. 봄을 예고하는 양지 바른 곳이라 파리가 날아다니는 건가~ 노숙자 스타일. 소리소문 없이 봄을 전해주는, 땅에 나지막이 달라붙어 작은 꽃을 피워 몰래 봄을 데리고 왔다 갈 때도 몰래 데리고 간다. 하루 일과가 무척 짧게 느껴져 어느새 기웃거리던 해가 멀리 도망가 버렸다.

강, 산 그리고 사람이 만나는 오작교, 수주팔봉_20210128

오죽하면 강산이 고유명사처럼 사용 되었을까? 뗄 수 없는 인연의 골이 깊어 함께 어울린 자리에 또 다른 강이 함께 하자고 한다. 태생이 다른 세 개의 사무친 그리움이 심연의 갈망을 이루기 위해 지극히 무거운 걸음을 옮겨다다른 곳, 그래서 그 그리움을 잊지 않기 위해 첨예한 자연의 칼로 올곳이 조각하여 그리도 간절한 애정을 주홍글씨 마냥 그려 넣었을까? 만남은 그간의 애달픈 인내 였는지 갑작스런 눈발이 슬픈 곡조로 허공을 활보한다. 달천, 석문동천, 팔봉이 만나는 곳. 숨겨진 명소라 사위는 고요하고 인적은 뜸했다. 허나 숨은 보석처럼 미려한 곳이다. 출렁다리 밑 석문동천이 달천과 합류하는 곳으로 사람이 일부 가공했단다. 칼날 같은 능선을 따라 오르기 시작하면 가장 먼저 전망대에 다다르게 된다. 데크길이 없..

문명에 대한 결초보은, 말티재_20210121

어느덧 가을 명소로 자리 잡은 말티재는 문명의 해일에 용케 버틴 공로처럼 불편하게 꼬불꼬불한 고갯길에 묘한 경이로움과 곡선의 안락함이 교차한다. 코로나로 인해 전망대는 굳게 자물쇠가 걸려 있지만 그 모습을 찾는 건 어렵지 않다. 가을 명소 답게 이 친숙한 고갯길에 단풍이 어울려 한바탕 춤사위가 벌어진다면 얼마나 아름다울까? 비가 내려 텅빈 고갯길에 서서 힘겹게 백두대간을 넘어가는 구름조차 쉬어갈 만한 멋진 풍경, 결초보은 말티재의 마력이다. 속리산에서 말티재 진입 전 공영 주차장에 차를 두고 하나씩 훑어보는데 입소문에 맞춰 보은에서 공을 들인 흔적이 많다. 지루하게 내리는 빗방울로 카메라는 꺼낼 엄두를 내지 못하고 간소한 차림으로 보이는 길을 따라간다. 말티재 전망대 카페는 텅 빈 고갯길과 다르게 내부에..

겨울을 잊게 하는 산림욕장_20210121

삼년산성 북문에서 바로 산림욕장으로 나아갔다. 너른 공간임에도 시선에 굶주릴 만큼 인적이 드물어 적막과 더불어 내린 눈이 대부분 고스란히 쌓여 있고, 대부분 공간을 채우는 소리는 청명하게 울려대는 새들의 지저귐이다. 가끔 예상 밖의 시설도 있지만 도심 숲과 비교 되지 않는 자연의 녹지와 가공이 적어 친숙한 길이 촘촘히 연결되어 있고, 곳곳에 쉼터는 빠지지 않았다. 생각보다 집에서의 접근성이 좋아 등잔 밑이 어둡다고 왜 이제서야 방문했을까 뒤늦게 꽁꽁 숨겨진 숨은 그림을 찾은 성취감도 얻었다. 맨발숲길의 작은 늪과 데크길, 그리고 쉼터가 차분하게 이어져 있다. 뒤돌아 우뚝 솟은 삼년산성의 동북치성을 바라봤다. 꽤나 두텁고 거대해 보였다. 한길 따라 내려오면 극기훈련장과 산림욕대가 있었는데 두터운 낙엽이 쌓..

겨울 바람도 침묵하는 삼년산성_20210121

보은 시가지와 인접한 삼년산성과 삼림욕장은 일전에 방문 했던 충주산성처럼 군민들이 애용하는 녹지며 공원이다. 속리산을 가기 위한 관문인 보은 방문은 처음이지만 어느 제약회사 트레이드 마크인 정이품송과 법주사가 유명하다는 것 외엔 아는 바가 없어 이틀 머무르기로 한다. 미리 여행 계획을 치밀하게 세우는 편이 아니라 대략 유명한 곳만 탐색해 보니 말티재와 삼년산성이 눈에 들어왔고, 때마침 말티재 휴양림을 일찌감치 예약한 뒤 간단히 위치 정도만 파악한 상태로 보은에 도착하여 우선 가장 인접한 삼년산성을 들렀다. 산림욕장 내부는 넓고 잘 다져진 길로 미로처럼 연결되어 있고, 얼마 전 내린 눈과 얼어 붙은 여울이 오로지 한다. 걷기 좋은 탄탄한 길을 버리고 여울 따라 울퉁불퉁한 길로 들어서 걷는데 왠지 매끈한 길..

섬진강 따라, 곡성_20210120

섬진강만 그 자리에 있을 뿐 완연히 봄과 다른 겨울 옷을 둘러쓴 함허정은 지난해 여름 폭우로 출입이 제한되어 있어 아쉬운 대로 주변을 돌며 강바람 짙은 향연 속에 잠시 몸을 맡긴다. 먼 길 달려온 강물은 함허정을 감싸고 잠시 쉬어 가듯 강폭이 넓어지고 웅크리는데 오랜 시간 그 모습을 보고 얼마나 많이도 한탄과 삶의 집착을 내려놓았을까? 겸허해지는 순간 억겁 동안 지낸 강은 스승과 다를 바 없다. 세상 모든 적막들이 모여 쉬고 있는 저곳에 서는 순간 진가는 유감없이 드러난다. 여름 장마 폭우 당시 섬진강 수자원을 잘못 관리하는 바람에 강유역에 수많은 피해가 났었던 게 떠올랐다. 서쪽 섬진강에서 반대편인 동녘으로 고개를 돌리면 칼날 같은 동악산 능선에 또 한 번 감탄한다. 동악산 능선을 넘어 석양이 잠시 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