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되어 단풍이 익으면 꼭 찾으리라 다짐했던 강천산은 3대 단풍산이라 칭해도 좋을 만큼 나무도 많지만 이파리 또한 아리따운 선홍색으로 유명세가 한창이다.
더불어 걷기에도 좋고, 주변을 장벽처럼 두른 산들이 있어 큰 힘을 들이지 않고 계절의 매력과 일대의 멋진 풍경들을 감상하기 좋다.
계곡길의 지나친 가공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도 많지만 월정사 전나무길이나 내소사 전나무길처럼 시간이 지나면 걷기 좋은 명소로 입소문을 타고 널리 알려지는 건 시간 문제다.
이미 절정의 단풍을 훌쩍 지나 대부분 낙엽으로 뒹굴고 있는 늦은 시기지만 여전히 찾는 발길은 끊이지 않았고, 미리 예정한 대로 광덕산을 거쳐 좀 더 오래 머무르기로 한다.
최고의 시기에 오면 좋지만 늦었다고 해서 모든 기회를 잃는 게 아니라 새로운 인연도 맺을 수 있는 만큼 결정과 시간의 선택이 조화로운 건 매한가지다.
한 해 동안 비가 많아서 여름부터 홍역을 앓더니 가을비도 꽤나 많이 내렸다.
그 여파로 강천산 입구에 멋진 폭포가 연출되는데 비가 내리면 이렇게 병풍 폭포가 생긴다고 지나는 사람들이 귀띔해 줬다.
완연한 만추를 지나 겨울로 접어드는 시점이라 강천산의 빛결 고운 애기단풍을 마주할 수 없지만 황막한 가운데 위로의 물줄기와 같은 소소한 눈요깃거리였다.
익살스런 순창 꼬부기.
단풍은 대부분 떨어졌지만 간헐적으로 남은 것들도 보였다.
그래서 더 반가울 수 있겠다.
맑디맑은 옥빛 여울과 바닥 자욱한 단풍 낙엽들이 어울려 완연히 다른 조화를 이뤘다.
단풍이 얼마나 많은지 가늠해 보라고 어딜 가나 바닥은 단풍 낙엽이 두둑했다.
이 장면이 어찌나 단아한 매력이 있는지 어느새 가을의 절정에 피어나는 단풍을 보지 못해도 아쉬울 게 없었다.
산책로를 걷다 만나는 메타세쿼이아길.
역시 담양 옆 순창 답다.
오늘의 목적지인 광덕산 방면 초입에 우뚝 선 봉우리 하나가 있고 그 위에 전망대가 보였다.
강천사 옆 나무, 여울 너머 다리가 있어 단풍이 가득 맺힐 때는 꽤나 아름다운 뷰가 나온다.
저 다리를 건너 광덕산으로 향하는 산길을 선택하면 지금까지 걷던 길과 완연히 다른 산길이 있고, 그 길을 따라 뿌듯한 오르막을 오르면 산능선 교차점에 다다라 다시 우측 오르막길로 향하면 광덕산이 봉우리가 있다.
조금 전과 확연히 다른 고즈넉한 산길을 걷게 되는데 특히나 단풍 낙엽이 붉은 자리에서 잠시 허리 숙여 여전히 불타오르는 낙엽을 바라봤다.
이런 낙엽조차 이리 곱디고운데 가을의 절정에서는 어떤 기대감을 충족시켜 줄까?
애기단풍도 많지만 잎새도 무척 아름다운 강천산 일대 단풍은 내장산, 백암산과 더불어 3대 단풍 산이라 꼽을만했다.
강천산 공원 지도.
이번 여정은 13>26>25>3>4>5>장군봉>21>16 순으로 계획했다.
신선봉 오르는 길은 무시할 수 없는 오르막이라 3번 지점에서 첫 휴식 겸 에너지를 보충하는 걸루.
광덕산으로 가는 필연의 길목인 신선봉 절벽 위에 서서 강천산을 향해 바라봤다.
산 정상에서 이미 가을은 떠나 버렸고, 그 아래엔 분주히 떠날 채비를 끝낸 뒤 남은 정분을 정리하고 있었다.
강천산 산책로를 조금 벗어나자 인적은 거의 없었고, 낙엽 자욱한 길을 천천히 걸으며 남은 계절의 향취에 미소 가득한 마음은 한층 어깨에 진 백팩의 무게감을 잊도록 하여 발걸음은 덩달아 가벼웠다.
좁고 가파른 산능선을 따라 앞만 보고 걷던 중 주위를 둘러보자 순창 일대와 강천산 일대가 다소곳한 자태를 드러냈다.
미세 먼지 주의보가 있긴 했지만 눈에 보이는 시야와 달리 가슴으로 바라보는 시선은 천리안 인 것을.
빛내림과 한 때 소란스럽던 까마귀 무리도 여행길에 잠시 만난 말동무와 같아 가던 걸음 잠시 멈추고 시선의 대화를 나누는 재미 또한 찰지다.
어느 여행길에서나 늘 행운이 따라붙는다는 반증으로 구장군 폭포의 평탄한 길에 내려 서자 참아 왔던 소나기가 요란한 걸 보면 이번 여행길 또한 예외는 아니다.
급작스런 소나기에 마지막 가을의 잔해를 찾았던 사람들이 잰걸음으로 떠나고, 텅 빈 공간에서 메아리처럼 남은 사람들의 감탄 섞인 곡조를 여운 삼아, 그리고 떠나려는 마음이 무거운 가을의 가시리 콧노래를 총총히 밟으며 아쉬운 강천산의 남은 시간을 차곡히 정리하자.
신선봉에서 턱 밑까지 차오른 가쁜 숨을 삼키고 다시 발걸음을 채찍질해서 광덕산 정상에 올랐고, 거기서 바라본 순창은 작은 옹기 안에서 평화롭게 지내는 고장처럼 보였다.
담양 금성산성 방면에 서서히 기울어가는 오후 햇살이 구름 사이로 커튼을 들이쳤다.
좀 전 지나온 신선봉은 광덕산과 높이가 도토리 키 재기다.
잠시 쉬던 절벽은 하얀 몸체를 드러내고 있었는데 제법 키가 커 개다리춤을 출 수밖에 없었다.
꽤 오랫 동안 까마귀 떼가 머리 위를 유영했다.
2019년 봄에 무주에서 멧돼지 무리를 만난 가족이 무사했던 건 이 까마귀떼 덕분이라 내게 있어 고마운 생명의 은사이자 자연을 함께 공유하는 생명의 벗이기도 했다.
광덕산 정상석에서 남다른 감회에 시간을 곱씹고 있었는데 버르장머리 없는 말벌 한 녀석이 끈덕지게 달라 붙어 하는 수 없이 자리를 털고 일어나 장군봉과 이어진 능선길로 출발했다.
장군봉으로 가는 능선길에 옆을 힐끗 쳐다보자 절벽을 끼고 있는 신선봉이 보였다.
장군봉 정상을 지나면 자연이 만든 전망대가 있는데 거기서 경로로 잡은 구장군 폭포와 맞닿은 길 위의 호수가 보였고, 그 호수를 둘러싼 봉우리 중 강천산 일대 가장 높은 산성산이 있었다.
종종 들렀던 담양 금성산성은 바로 저 산성산자락에 기대고 있을 터, 능선 위 뾰루지처럼 솟은 바위 능선 쪽이 금성산성 성벽 역할을 하기도 했겠다.
솟아 있는 바위와 같은 능선에 다음 장면은 성벽의 망루일까?
언제 한 번 도전해 봐야 스것다.
장군봉을 지나 다시 뿌듯한 내리막길을 따라 내려오던 중 강천산 산책로가 형체를 드러냈고, 그 길을 따라 구름다리, 강천사, 메타세쿼이아숲이 보였다.
구장군 폭포에 도착할 무렵 급작스런 소나기가 내리기 시작하자 사람들이 서둘러 떠나 버렸다.
이왕 비 맞은 김에 카메라는 집어넣고 아이폰으로 사진을 찍으며 느긋하게 구장군 폭포 정면 데크길로 걸었다.
강천산공원의 명물인 구장군폭포는 실제 보면 꽤 멋지다.
하나의 찬가를 합주하는 두 갈래 폭포는 멋진 절벽에 하얀 선을 그리며 연신 차가운 탄성을 질렀다.
바위 절벽에 동굴이 있었군.
소나기로 떠나는 길이지만 미련이 많이 남았는지 위태롭게 매달린 단풍잎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으며 천천히 걸었다.
이 길이 단풍 천지였을 때 아름답긴 했을 터.
빗줄기는 그칠 줄 모르고 연신 사람들을 뚜까 팼다.
강천산 명물 중 하나인 구름다리.
연세 지긋한 강천산 모과나무의 저 자태를 보고 흘려 버릴 수 없었다.
광덕산으로 오르기 전, 가던 길의 방향을 산길로 틀 당시 봤던 봉우리는 구름다리를 건너 신선봉 방향 능선길로 가면 맞닿는 곳이었다.
여러 갈래 볼거리가 참 많은 강천산이다.
강천사에 도착, 아직도 소소한 자태를 간직한 계절의 정취가 마치 한 폭의 화보 같았다.
냥이 한 마리가 거리낌 없이 한 자리 꿰고 앉아 무언가 기다리는 눈빛이었다.
가까이 다가가도 별 반응이 없는 걸 보면 많은 관광객에 익숙해졌나 보다.
가을도, 사람도 떠나기 전의 공허한 아쉬움은 같은 정취다.
갈증에 물 한 모금이 절실한 여행자에게 기꺼이 생수를 내어준 강천사에 들러 잠시나마 피로와 갈증을 털어냈다.
두터운 비구름에 사위는 어둑해지고 서둘러 자리를 뜬 사람들은 이제 자취도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강천사는 산중의 평범한 사찰이지만 상황에 맞춰 한적하고 포근한 절로 변모되어 버렸고, 때마침 자리를 뜨던 중 기념품 가게 앞에 천연덕스레 자리를 잡고 있는 냥이로 인해 미소를 챙겨 떠날 수 있었다.
첫날과 마지막 날을 제외하고 여행 내내 줄곧 따라다닌 빗방울이 이번엔 여행의 동반자가 될 줄 전혀 몰랐던 만큼 예상치 못한 반가움도 한몫 챙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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