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 자연 그리고 만남

가을 편지 속 책갈피, 불영사_20201110

사려울 2022. 12. 31. 13:14

쓸 수 있다면 가을 색동옷 차려 입은 이파리에 편지 하나 새겨 띄우고 싶다.
숨을 쉬고 있음에 감사하고, 결고운 빛 파도의 출렁이는 눈부심에 행복의 단물에 현혹되는 기분이 이 얼마나 감사한지를...
지나친 시간이라도 가을옷을 입은 추억은 더욱 각별해지고, 유희 넘치는 햇살 아래 시선을 시기하는 시간 조차 내겐 너무 특별하다.
이따금 지나는 여울의 조잘거림도 경쾌한 곡조 마냥 어깨가 들썩이고, 삶의 힘든 순간도 이토록 현란한 자연의 춤사위 앞에선 언제 그랬냐는 듯 망각의 어깨 너머로 사라질 때 지금까지의고난도 미쳐 깨닫지 못했던 뼈저린 통찰이었음을, 지금 살아 있고, 이 넘치는 자극에 감탄할 수 있는 것 또한 난 행복하다.
그래서 지나친 가을이라도 투정도, 안타까움도 없는 건 다음 해에 다가올 가을이 있기 때문이며, 더불어 예견할 수 없는 미래 앞에서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당당할 용기는 주눅들지 않는다.

기대 하지 않았던 곳에서 기대에 만족스런 정취가 충족되면 애써 감탄사를 아끼고 싶지 않다.

주차장 한 켠, 오래된 잡지에서나 볼 수 있었던 아련한 가을 정취가 육감을 유혹한다.

불영사로 가는 길, 무얼 기다린 사람의 가슴을 읽었는지 타로카드처럼 펼쳐 놓는다.

불영계곡은 각양의 가을이 모여 생태계를 이룬 곳이라 그들의 유기적인 어울림을 적시에 찾는다면 함께 뒤엉켜도 전혀 이질감이 들지 않는다.

콕 찍어 붉은 단풍을 기대하지 않아도 가을의 창연한 빛깔들이 단정적인 편견을 자연스럽게 잊을 수 있도록 망각의 최면을 걸어준다.

하나의 단조로움들이 모여 한 데 아름다울 수 있다는 걸 자연은 애써 숨기지 않고, 생명은 애써 뜯어 보지 않는다.

때마침 조용한 불영사 산책길과 더불어 사찰에 다다르면 남은 가을이 아쉬운 미련을 화려한 피날레를 뽐내듯 일 년 동안 간직해 왔던 빛결의 향연을 펼치며, 동시에 계절의 교차점인 만추에 맞춰 허허로운 벌판에 화사한 붓을 휘날려 점을 하나씩 찍어댄다.

하나가 아름다운 게 아닌, 모두가 아름다운 계절인 가을의 결말은 또다른 계절의 서막이자 기대감의 연속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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