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7 38

냥이_20200205

집으로 가면 조용하게 반기는 새가족. 서 있을라 치면 다리 사이를 꿀벌처럼 바삐 오가며 눈을 맞히고 싶어 한다. 틈만 나면 눈을 맞히고 여전히 살갑게 다른 가족들을 쫓아다니며 말은 할 수 없지만 눈빛과 몸짓을 보더라도 '넌 내가 특별히 간택한 집사니까 얼른 냥이 언어를 배우렴' 이렇게 설득 시키는 느낌이 농후하다. 잠시 일어났다 사람처럼 자기. 대부분 잠 잘 때의 배치기 포즈로 입이 한글 'ㅅ'에서 영문 'Y'로 바뀐다. 하루 일과 중 대부분 잠을 자면서 잠꼬대를 한다. 지금껏 찍은 사진들 중 가장 제대로 된 증명 사진이다.

망경대산 휴양림에서 맞이하는 밤눈_20200204

송창식의 밤눈이 생각나는 강원도 오지의 눈. 서울에서 눈이 온다고 길 조심하라는 말에 믿기 힘들다는 듯 커튼을 열어젖히자 눈 올 기미조차 없더니 거짓말처럼 전화 끊고 이내 세찬 바람에 실린 눈발이 날린다. 호랭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밤눈은 양반 되기 글렀다. 아주 짧지만 강렬한 눈발이 날린 뒤 갈길 바쁜 나그네인 양 이내 그쳐 버렸다.

요람기를 반추하다, 거운분교_20200204

어라연을 다녀온 뒤 생각보다 넉넉한 시간을 활용해 잠시 들렀다 옛생각으로 회상에 젖었던 정겨운 교정. 정문에 들어서자 어릴 적엔 그토록 넓던 운동장이 어느샌가 손바닥만하게 느껴졌다. 원래 그 자리를 지키던 학교가 줄어들리 없으니 내가 인식하는 극치가 올랐다고 봐야겠지. 교문을 들어서서 좌측으로 발걸음을 돌리면 어릴 적 주머니와 신발을 가득 채우던 모래밭이 나온다. 교문 우측에 넓고 편평한 자연석으로 된 벤치가 있다. 앉아 보고 싶은 충동을 참지 못하고 몸을 맡긴 해 잠시 사색에 잠겼다. 평균대라고 하나? 올림픽 체조 선수를 따라 한답시고 많이도 깡총거렸던 평균대가 급격히 좁고 위태로워 보였다. 그 평균대의 쇠락처럼 하루도 쇠락하여 해가 잦아들며 뜨거운 석양이 마지막 혼신을 태우고, 이내 찾아올 시골 밤에..

깊이 숨은 보배, 영월 어라연_20200204

거두절미하고 영월 시내에서의 목적인 끼니를 해결한 뒤 곧장 시내를 빠져나와 마음에만 두고 있던 어라연으로 향했다. 제 집 드나들 듯 영월은 참으로 뻔질나게 드나들었다. 연고도, 지인도 전혀 없던 영월을 찾게 된 건 근래 몇 년 전부터의 인연인데, 물론 문화 컨텐츠의 파괴력을 익히 잘 알고 있어 영화 라디오스타를 통해 내겐 영월이 스타와도 같은 곳으로 실제 환상이 깨지는 사태를 겪고 싶지 않아 정선, 태백 가는 길에 필히 거치는 길목임에도 의도적으로 들리지 않아 환상의 신선도는 꽤나 오래 버텼다. 결국 영월에 목적을 두고 첫 발을 들인 건 2015년 가을부터 곳곳을 누비며 다녔고, 숨겨진 비경이 많음을 알게 되었다. 게다가 정선으로 가는 길목이자 접근성이 좋아 큰 마음 먹지 않아도 이제는 만만한 싹이 되어..

기본기에 충실한 순대국, 영월 서부순대_20200204

영월에서 확실히 눈도장 찍은 곳은 영월시장 닭강정, 상동막국수와 더불어 확실한 삼각편대인 순대국밥 되시겠다.도사곡휴양림에서 나와 곧장 영월로 왔지만 아무리 정평난 어라연 여행도 속이 든든해야 지대로 감상하지 않겠나. 처음 들렀을 때는 불친절한 건 그렇다치더라도 반말은 이해가 되지 않았었는데 한국말이 어눌한 사람이라 시간 문제를 갖고 조급하게 판단해서는 안될 거 같아 그냥 그러려니 넘기면 구수한 순대국이 바로 등장한다. (금강산도 식후경, 양은 적지만 내용은 실한 순대국_20191023) 휴업이나 밤늦은 시각에 도착하면 이용할 수 없다는 걸 제외한다면 대부분은 여기서 한 끼 정도는 뚝딱 해결한다.

눈부신 서리를 도사곡에서 만난다_20200204

파크로쉬에서 이틀 묵고 다음 숙소로 잡은 곳은 정선 사북에 위치한 도사곡 휴양림으로 전날 하늘숲길에서 얄팍한 체력이 바닥나 정신 없이 자는 사이 벌써 해는 중천에서 눈부신 미소를 짓고 있었다. 봄 같던 겨울 속에서 추위를 예고하는 서리가 배수의 진을 쳤지만 미세 먼지가 물러간 날이라 모든 게 반가웠다. 도사곡에서 하루를 쉬고 다음 여정으로 잡은 곳은 영월 어라연. 그리 먼 곳은 아니지만 어라연에서 긴 구간 도보로 여행을 해야 되는 고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38번 국도로 차를 올리는 바람에 도사곡 휴양림이 어떻게 생겨 먹었는지 조차 모르겠다. 하는 수 없이 여기도 다음을 기약하는 수 밖에.

하얀 하늘숲길을 거닐다_20200203

원래 계획되었던 하늘숲길은 기존에 출발점으로 삼았던 화절령과 만항재가 아닌 두 고개 사이, 하이원CC 인근에서 화절령 방면으로 출발했다. 서울 수도권은 코로나19로 인해 심리적으로 잔뜩 위축되어 마스크 구하기는 하늘에 별 따기고 바깥 외출은 극도로 기피하는 것과 달리 여행 떠나온 3일 동안 강원도 일대는 마스크를 끼지 않고 다니는 사람도 많았고, 식당 같은 곳에서도 마스크를 착용하지 않아도 하등 이상하게 보는 사람도 없었지만, 나를 포함하여 지나가는 몇몇은 마스크를 착용하고 다녔다. 코로나 관련 뉘우스가 나오면 강원도는 괜찮다는 주변 이야기도 드문드문 들리는 걸 보면 아직은 경각심을 가진 사람이 많지 않구나 싶은데 평소 서울 수도권에서 정선 사북/고한으로 오는 여행객이 많았던걸 대비해 보면 지금은 여행객..

포근한 둥지로_20200202

이른 시간에 파크로쉬로 돌아와 저녁을 기다리던 중 주변을 둘러 보다 이색적인 것들을 만났다. 산중 추위는 서울의 추위와 비교할 수 없이 매섭지만 공기 내음이 향그롭다. 그래서 잠깐 둘러본다고 옷 매무새를 허접하게 꾸렸던 후회도 들었지만 적막을 뚫고 타오르는 불꽃들이 온기를 대신 채워줬다. 우선 숙소에 들러 편한 옷차림으로 변신하고 창밖을 내다봤다. 실제 가리왕산의 위용은 거대하다. 처음 여길 왔을 때 창 너머 가리왕산자락을 보고 나도 모르게 감탄을 뱉었더랬지. 우측이 서편 가리왕산 정상 방면이라 그쪽으로 해가 지고 땅거미도 진다. 파크로쉬에서 볼 수 있는 야경들 중 진짜 불도 있다. 장작 대신 석탄인데 첨엔 진짜 불인가 싶어 다가섰다 온기를 느끼고 잠시 눌러 앉았다. 불을 보고 있자니 문득 미스터션샤인의..

추억 속 간이역의 출발이자 종착지, 정선역_20200202

기차역의 낭만을 보고 싶거들랑 정선역으로 가야된다. 막연한 그리움, 기대와 설렘. 기차역은 예나 지금이나 특유의 감성은 변색되지 않는다. 곡선의 철길은 직선화 되면서 의도와 결과만 중시되지만, 기차역은 문명의 혁명에도 결국 건재할 수 밖에 없는 운명이다. 처음 정처 없이 기차 여행을 떠나 도착한 곳이 정선역이라 몇 년 동안 기억을 고스란히 숨겨둔 채 애써 외면했던 진실은 봄의 기지개처럼 견고한 땅을 비집고 나오듯 어쩌면 나는 정선역이 변화하지 않길 바랬지만 발아하는 호기심을 막을 순 없었다. 시간의 흔적이 완연하지만 묘하게도 수채화 같은 추억의 담담한 행복은 어떤 상흔도 없다는 걸 확인한 게 뜻 밖의 수확이랄까? 시간의 이야기가 그토록 많던 간이역은 대부분 사라지고, 기차의 정취도 이제는 많이 달라졌다...

그립고 그리운 망부목, 몰운대_20200202

구름에 빠진 채 풍류를 읊고 싶은 곳. 사실 몰운대는 벼랑 위에 섰을 때보다 벼랑 앞 멀직이 떨어졌을 때 진면목을 알 수 있다. 다만 벼랑 위는 섞어 문드러지는 한이 있어도 그 모습을 지키는 고사목의 자태가 절묘하기에 어쩌면 세상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고, 무엇을 그리워하는지 아찔한 절벽 위 서면 상상이 더해져 신비감을 주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처음 숙소에서 출발할 때 동강 칠족령을 감안했었는데 겨울이면 가뜩이나 위태로운 길이 더욱 위험하지 않을까 싶어 급작스레 운전대를 돌렸고, 그 때 문득 절벽 위에서 지독한 그리움에 얼어 버린 고사목이 떠올랐다. 그와 더불어 몰운대 가는 길목에 지나는 이들의 마음을 훔치는 소금강까지 인접해 있으니 동강 칠족령를 가지 못한 아쉬움에 충분한 위안이 될 수 있으리라 여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