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백 32

경적 소리도 떠나버린 간이역, 선평역_20220316

느림이 아름다움으로 승화된 곳이 간이역이다. 곡선과 느린 열차, 공허함이 모여 하나의 아름다운 꽃다발이 되고, 강렬한 향수가 된다. 과거엔 설렘을 약속했지만 이제는 잊혀짐을 약속하는 곳, 정선으로 가는 길에 졸고 있는 간이역을 찾아 잠시 그 향취에 시간을 표류했다. 더불어 이름까지 아름다운 간이역을 되뇌어 여정에 뿌려진 향취를 선물 받았다. 별어곡-선평-정선-아우라지-나전-구절... 울진에서 정선으로 넘어가는 길에 들른 태백은 내 여정에 있어 길목과 같은 곳이었다. 커피 한 잔, 올리브영에 들러 스킨 하나를 하고, 저녁 식사와 쉼표를 제공해 준 곳으로 차를 세워둔 곳에 황지연못에서 흐르는 작은 도심 하천을 감상한 뒤 조바심을 버리고 정선으로 출발했다. 태백에서의 둘째 날, 정선아리랑과 바람의 나라_201..

막연한 그리움, 만항재를 스치다_20211028

만항재의 스팟라이트에 가려진 만항재가 아닌 것들. 그래서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인 만항재 풍경과 달리 인척임에도 지나는 이들을 그리워한다. 이미 만추를 지나 겨울로 접어들어 지는 석양의 가느다란 빛조차 간절한 현실을 방불케 한다. 태백오투전망대를 마지막으로 정선 일대 여정을 접고 백두대간을 넘어 또 다른 가을을 찾으러 떠난다. 만항재 풍력발전소와 그 아래 산허리가 길게 이어진 운탄고도가 희미하게나마 보였다. 화방재에서 함백산로드를 따라 만항재로 가는 오르막길은 그리 버거운 건 아니다. 일대 고도가 1천m 이상이라 도로가 이어진 가장 높은 고개인 만항재도 그래서 까마득한 높이가 아니지만 일대 거대한 골짜기를 마주한다면 빼곡하게 중첩된 능선과 골짜기에 모세혈관처럼 이어진 작은 골짜기들이 높은 고도를 새삼 느끼..

떠나지 않은 겨울의 끝, 검룡소_20210301

이른 오후까지 내리던 비가 어느새 따닥따닥 소리가 나서 허리를 낮추자 동글동글한 얼음 알갱이로 변신했다. 강원도 고지대는 눈이 올 수 있다는 예보를 미리 접하긴 했지만 막상 눈앞에 싸락눈이 내리는 모습을 보자 발걸음이 무거운 건 어쩔 수 없다. 허나 눈에 보이는 얼음 알갱이가 보석처럼 반짝이며 아름답다. 고생길은 차치하더라도. 검룡소에 오는 날엔 꼭 눈을 만난다. 처음 왔던 가을에 그랬고, 작년 4월 중순 봄(한강의 세상 만나기, 검룡소_20151128, 평온의 눈이 내리는 검룡소_20200412)에 그랬으며, 이번 또한 마찬가지다. 초입에서 맞이하는 세찬 바람 또한 약속이나 한 것처럼 변함없고, 검룡소에 도착하여 바람이 거의 불지 않는 이중적인 얼굴 또한 마찬가지. 겨울은 떠날 채비를 하지 않았는데 이..

정갈한 카페, 태백 투썸_20210301

아침부터 일기예보에 따라 한치의 오차도 없이 비가 내려 서둘러 태백으로 넘어왔건만 고도가 높은 도시라 점차적으로 내리던 비는 동글동글한 얼음 알갱이로 바뀌기 시작했다. 원두, 드립퍼까지 모두 챙겨 왔음에도 아뿔싸! 그라인더를 깜빡하고 집에 두고 와서 하는 수 없이 태백에 얼마 전 오픈한 투썸플레이스를 찾아 얼마나 단비 같은지. 투썸 일대에서 황지공원까지가 태백의 핫플레이스라 주차할 곳이 마땅찮은데 때마침 가까운 노상 공영주차장에 차량 한 대가 빠지는 타이밍에 맞춰 주차를 하고 카페에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진한 커피향과 함께 아주 깔끔하고 화사한 분위기에 자연스럽게 이완되며 텀블러에 커피 한 잔을 담았다. 더불어 오아시스 같은 카페에서 만난 직원들의 친절이 왜캐 고맙던지. 네이버 지도엔 있고, 카카오맵..

소중한 시간의 창고, 태백을 떠나며_20201110

예기치 못한 경험을 마주하며 기억을 조각하는 게 여행이라면 태백은 창작을 하는 작업실이라면 솔직한 표현일까? 전날 홀로 집을 지키던 냥이가 후다닥 놀다 방에 갇혀 울부짖는 소리를 듣고 한달음에 달려가 꺼내곤 곧장 다시 태백으로 건너와 늦은 시각-태백의 시계는 20시만 넘어도 식사 가능한 곳이 대부분 영업을 하지 않았다- 끼니를 때울 수 있는 곳을 찾다 신전 떡볶이 집에서 모처럼 분식으로 배를 불린 경험도 여행에선 꽤나 값진 기억이었다. 밤새 누워서 이런저런 이야기로 뒹굴다 이튿날 늦게 부시시 일어나 태백을 떠나 다음 여정지로 출발하는데 늘 그렇듯 아쉬움 금할 방법은 딱히 없었다. 숙소를 떠나기 전, 베란다에 나와 정취를 담았는데 여전히 옅은 미세먼지가 대기를 덮은 날이었다. 청명하면 좋겠지만 이 또한 예..

여명이 지고 은하수가 핀다, 태백에서_20201109

겨울 같은 만추, 여명이 나리는가 싶더니 찰나의 인연처럼 해는 순식간에 동녘마루를 박차고 뛰어올라 단숨에 어둠을 깨친다. 가을은 그리 짧은 게 아니지만 떠나려 할 때 뒤늦은 아쉬움처럼 아침의 고요 또한 분주한 세상이 펼쳐지고 나서야 애닮음을 아쉬워한다. 치열한 일상을 잠시 뒤로하고 맞이하는 휴식에 비로소 평온에 눈이 트이고, 지저귀는 새소리에 귀가 기지개를 켠다. 눈이 제대로 뜨이지 않는 깊은 졸음을 애써 누르고 베란다로 나와 새벽 여명을 맞이하며, 태백의 평화로운 대기에 추위를 잊는다. 마치 모든 세상이 깊은 잠에 빠져든 것만 같다. 찰나... 잠시 사색에 빠졌을 뿐인데 성급히 동트며 이글거리는 햇살의 촉수를 뻗어 세상을 흔들어 깨운다. 사용하지 않는 구형 아이폰과 아이패드를 집에 설치하여 CCTV로 ..

뿌연 몽환 같은 태백_20201108

태백에서의 첫날밤은 추위가 다가오기 전 매서운 바람에 잔뜩 주눅이 들어 작은 소리조차 바람이 집어삼켰다. 1천 미터 넘는 고지에서 바라보는 세상은 마치 꿈과 현실의 경계를 넘나드는 졸음처럼 거리를 따라 걷는 가로등 불빛은 요동도 않고 자리를 지키며 부쩍 다가온 겨울을 맞아 미리 움츠린 채 평온의 옷을 껴입은 것만 같았다. 한밤에 홀로 빠져나와 주차장 끝에서 장벽처럼 서 있는 산이 둘러싼 태백 도심을 응시했다. 미세먼지가 살짝 끼어 있어 광해는 안개처럼 첩첩이 쌓여 있었고, 불빛은 작은 심호흡도 멈췄다. 이런 날 은하수 보는 걸 기대하지 않았지만 한참 뒤에야 사진에서 아주 미세하게 볼 수 있었다. 왠 횡재! 태백에 오면 늘 이 전망을 한참 주시하는데 그저 평온의 강렬한 에네르기파로 인해 잡념이 산화되어 버..

태백에서 삼척으로, 겨울에서 봄으로_20200413

행복에 대한 감사를 새삼 깨닫게 해 준 태백에 작별을 고할 때, 전날 잔뜩 웅크린 하늘은 어디론가 흩어지고 화사한 민낯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잠에서 깨어 커튼을 열어젖히자 어제 무겁고 표독한 설원과 다르게 포근한 설원이 펼쳐져 있다. 이틀 동안 편안한 휴식을 제공해준 태백과 숙소에 마지막 인사 꾸벅~ 출발하기 전, 매봉산에서 부터 태백산 방면까지 또렷한 선들이 모여 언제나처럼 세상을 노래하고 새로운 하루를 맞이한다. 그리 무겁던 하늘은 눈에 띄게 가벼워져 점차 청명한 하늘이 구름을 열어젖히고 투명한 민낯을 내민다. 전날 그토록 짙은 구름을 덮어 꽁꽁 숨어 얼굴을 감췄던 함백산은 하루 만에 완연히 다른 얼굴을 드러냈다. 잠깐 사이 구름은 어디론가 총총히 자리를 뜨고 그 뒤를 이어 하늘 본연의 빛깔에 물들기..

잦아든 눈과 포근해진 시간, 태백_20200412

감사합니다. 아름다워서... 추억을 재현시켜 줘서... 무사히 누릴 수 있게 해 줘서... 건강함에 여정을 떠날 수 있어서... 이 모든 걸 느낄 수 있어서... 그래서 감사합니다. 어둠이 찾아올 무렵 숙소로 돌아왔다. 눈은 잦아들었지만 설경의 아름다움은 그칠 줄 몰랐다. 문득 박효신의 '눈의 꽃'을 흥얼거리고 싶어지는 하루였다. 설사 잘 못 부르더라도 흥에 겨우면 그만 아닌가. 그게 바로 이번 여정이자 지금 이 순간이다.

평온의 눈이 내리는 검룡소_20200412

5년이란 시간이 흘러 같은 장소가 어떻게 변했을까? 급작스런 눈발이 복병이 아닌 환대의 징표라 자화자찬 하더라도 전혀 무리가 아닐 만큼 쏟아지는 눈이 연출한 세상은 묘한 추억의 반추를 표류하게끔 포근한 포용을 발휘했다. 함백산에서 내려와 주저 없이 검룡소로 향하는 길은 간헐적 눈발이 날리긴 했지만 쌓일 만한 양도, 기온도 아니라 이동하는 데 있어 어려움은 전혀 없었다. 검룡소 입구에 도착하자 앞서 방문했던 시기와 달리 입구는 꽤 너른 테마 공원처럼 조성되어 있었던 반면 세찬 바람이나 텅 빈 입구는 변함없었다. (한강의 세상 만나기, 검룡소_20151128)차에서 내리기 전, 우산을 챙겨야 되나 말아야 되나 괜한 갈등을 때리다 행여 함백산처럼 폭설이 내리지 않을까 싶어 우산도 챙겨 천천히 걸어갔다. 검룡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