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오후까지 내리던 비가 어느새 따닥따닥 소리가 나서 허리를 낮추자 동글동글한 얼음 알갱이로 변신했다.
강원도 고지대는 눈이 올 수 있다는 예보를 미리 접하긴 했지만 막상 눈앞에 싸락눈이 내리는 모습을 보자 발걸음이 무거운 건 어쩔 수 없다.
허나 눈에 보이는 얼음 알갱이가 보석처럼 반짝이며 아름답다.
고생길은 차치하더라도.
검룡소에 오는 날엔 꼭 눈을 만난다.
처음 왔던 가을에 그랬고, 작년 4월 중순 봄(한강의 세상 만나기, 검룡소_20151128, 평온의 눈이 내리는 검룡소_20200412)에 그랬으며, 이번 또한 마찬가지다.
초입에서 맞이하는 세찬 바람 또한 약속이나 한 것처럼 변함없고, 검룡소에 도착하여 바람이 거의 불지 않는 이중적인 얼굴 또한 마찬가지.
겨울은 떠날 채비를 하지 않았는데 이미 섣부른 봄은 한강이 시작하는 이곳 또한 정복할 기세로 달려왔지만 깊은 산의 품에 매몰찬 시기와 질투는 늘 방벽에 부딪힌다.
한강이 대지의 알을 깨고 세상의 첫 빛을 보는 게 뭐가 대수냐고 하겠지만 갈망에서 비롯된 의지는 이 먼 곳에서 태동하여 바다를 만나기까지 집요한 인내가 아니라면 수많은 기로에서 갈등하게 되고, 의혹과 의심의 유혹을 극복하여 믿음의 특권을 수여할 수 없다.
계속되는 지류와 여울이 한강을 의지하는 건 억겁 동안 한결같은 의지와 인내의 결실이며, 더불어 문명조차 그 믿음에 생로병사를 맡기는 거다.
걷는 동안 온기 마냥 온몸을 다스리는 희열과 평온을 무엇에 비유하랴.
반갑다, 검룡소
싸락눈을 맞으며 홀로 걷는 길에서 기세 가득한 겨울을 뚫고 봄의 희망을 내딛는다.
봄을 재촉하는 비가 겨울로 꽁꽁 언 여울의 얼음 위로 흐른다.
참 특이하고 묘한 장면이다.
아침에 내린 비와 오후에 내리는 눈이 샤벳처럼 사각사각 거린다.
홀로 찍힌 발자국.
검룡소 도착, 금세 소낙눈이 되어 모든 길을 하얗게 채색하기 시작한다.
한결 같이 힘찬 물줄기는 바위도 뚫을 기세다.
막연히 힘을 얻고, 쳐진 기운을 다독일 수 있는 동기부여의 샘 같다.
싸락눈이라 무시하면 안 되는 게 금세 이렇게 뽀얗게 쌓였다.
가을에 떨어진 단풍 낙엽 위에 곱디고운 눈이 내려 눈부시게 반짝인다.
빛은 어디서 이끌렸고, 아름다움은 어떻게 찾아왔을까?
싸락눈의 결정체가 동글동글 이쁘기도 하다.
앉는 것도, 눈을 아래로 내리는 것도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닌데도 우린 얼마나 주변에 흩어진 아름다움을 간과하며 살까?
검룡소 옆 여울 또한 힘찬 물줄기가 쏟아진다.
돌아가는 길에는 강한 눈발로 인해 올 때 맡겨놓은 발자국을 훔쳤고, 하는 수 없이 그 위에 다시 발자국을 각인한다.
이 멋진 전나무 숲길.
검룡소로 들어갈 때 남긴 발자국은 언제, 어디로 돌아갔을까?
허공 시선의 모든 점이 내리는 눈으로 뽀얗게 변한다.
길과 여울이 나란히 하며... 첩첩산이 그랬던 것처럼 첩첩의 나무가 한강의 첫걸음을 응원하며 동시에 지켜준다.
봄의 막바지에 하얀 세상은 잠깐의 작별을 고하는 설움이 깊은 산중에서 앳된 모습으로 웅크린 수줍음이다.
마냥 퍼붓는 눈은 천둥벌거숭이처럼 세상을 날뛰는 바람에 두서없이 휘몰아치지만 어쩌면 가장 포근한 안식처에 급히 실어다 주는 무언의 배려라 침묵 속 안도를 머금고 지상 만물에 살포시 나린다.
바람과 눈이 서로 위로하는 눈보라는 그 위세가 꺾이질 않지만 충분히도 아름다운 이별과 해후를 반복하는 사이 하루 일과에 지친 빛은 서서히 저물어 졸기 시작한다.
아무런 발자국도 각인되지 않은 텅 빈 공원에서 허공을 가득 메운 눈보라의 아우성이 아름다운 선율로 메아리치던 날, 콘크리트 건물 속에서 보낸 일상의 응어리는 긴 머리를 풀고 하얀 세상에서 자유를 만나 연기처럼 막연히 사라진다.
마치 다른 세상처럼 인류의 촉수가 전혀 미치지 않을 것만 같은 착각이 든다.
영화 러브레터에 버금가는 설국.
겨울 아름다움을 다시 한번 느꼈고, 뒤늦은 후회를 삼키며 봄을 맞이한다.
공원 한 켠 작은 동굴 위로 끊임없이 눈이 퍼붓는다.
출렁다리 너머 주차장까지 온통 하얀 세상으로 주차시킨 차도 하얗게 도색되어 버렸다.
내린 눈을 자세히 보면 상고대 위에 동글동글 눈의 결정체가 뒤엉켜있다.
공원 가장 높은 곳에 특이한 조형물 전망대.
전망대에서 바라본 세상도 예외 없이 하얗다.
검룡소에서 내내 사용했던 우산이 어느 순간 예상치도 못한 무게감으로 떨궜고, 그 무게의 진원지는 비와 눈이 섞여 얼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전통 가옥 체험장으로 옛 생활을 재현시켜 놓았다.
심지어 눈 내리는 추운 날이라 문까지 꽁꽁 걸어 잠궜다.
창녕 우포 생태촌처럼 실제 숙소로 꾸며 놓았더라면 어땠을까?
싸락눈 특유의 펄럭임.
걷던 걸음이 피로가 아닌 희열로 재해석되던 산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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