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찰 49

도심의 작은 쉼터, 독산성_20200717

억겁 동안 세속을 향해 굽어 보는 나지막한 산에 둥지를 틀고 앉아 잠시 기댄 문명의 한 자락. 그 담벼락에 서서 흐르는 공기를 뺨으로 더듬어 본다. 마치 하나의 형제처럼 산성과 사찰은 나약한 의지를 위로하며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많은 바램들을 몽롱한 목탁 소리로 바람처럼 흩날린다. 많은 시간을 버텨 왔지만 앞으로 맞이해야 할 시간의 파고가 미지의 세계를 가르는 두려움처럼 막연한 시련과 희열을 향해 나아가리라는 의지의 등불이 꺼지지 않기를, 또한 자연의 포용이 변치 않기를 기대하는 포석 같다. 석양의 볕이 꺼지며 하나둘 밝혀지는 문명의 오색찬연한 등불이 특히나 아름다운 저녁이다. 도심에 둘러 쌓인 작은 녹지치곤 꽤나 멋지다. 사람들의 발걸음만큼이나 분주한 까치가 알싸한 데이트에 여념 없다. 독산성에 오르..

봄바람 따라 만의사에서_20200421

예년에 비해 이른 석가탄신일로 인하여 앞서 절에 방문한 가족들과 떨어져 텅 빈 사찰 풍경을 찾았다. 개발로 인한 훼손이 많기는 하나 산중에 자리 잡아 오롯이 자연의 품에 기대고 있어 봄의 정취 또한 갓 잡은 신선한 생선의 번뜩이는 비늘 같았다. 무신론자인 나는 봄의 색깔에 경건해지고, 불신론자인 가족들은 진중한 소망에 경건해졌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본당으로 향하기 위해 첫 계단을 오르면 수많은 연등이 걸려 바람에 지화자 춤을 추고 있다. 만의사에 와 보면 확실히 봄의 정취가 물씬하다. 흙이 있는 곳엔 어김없이 봄꽃이 자리를 잡고 어여쁜 얼굴로 봄볕을 쬐고 있어 덩달아 봄의 설렘에 도치된다. 꽃복숭아의 가지 하나에 두 가지 색깔이 동시에 피었다. 신기한 고로~ 지속된 오르막길을 따라 법당 몇 개를 지나..

구례와 지리산을 마주한 오산 사성암_20200319

지리산 노고단과 섬진강, 사람들의 터전인 구례를 마주한 오산은 무릇 다른 산들이 질투할 만한 천리안을 빙의시켜준다. 텅 빈 사성암의 위태로운 벼랑 위에 서서 한눈에 모든 걸 구겨 넣듯, 그러면서도 과하지 않고, 여유와 여백을 멋들어지게 채워 넣은 구례 일대를 보는 사이 세찬 바람을 따라 시간도 금세 흘러가 버린다. 구례에 온 시기가 절묘했던 건 한동안 대기가 뿌옇게 흐리다 이날만큼은 대기가 깨끗하고 화창했다.-구례가 고향인 사우의 말에 의하면- 곡성 지인과 함께 구례로 다시 넘어와 사성암으로 안내한다. 구례에 오면 '고곳은 꼭 가봐야제'라며, 주말 휴일엔 산아래 셔틀버스만 이용 가능할 만큼 사람들이 많이 찾는 곳인데 때마침 평일이라 찾는 사람들이 거의 없어 사성암까지 차량으로 통행이 가능했다. 막상 사성..

충무공의 영혼, 현충사_20200211

곡교천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아 금세 도착한 현충사는 따가운 햇살 충만한 풍경에 마치 활기찬 봄의 축제가 성황리에 진행되고 있는 게 아닌가 착각이 들었다. 어릴 적에 다녀왔던 기억은 이미 퇴색되어 버렸지만 그 위대한 업적은 어찌 잊을까. 무게감보다 진중함에 압도당하는 현충사. 이 자리에 서자 나도 모르게 향에 불을 붙이고 고개를 숙이며 뒷걸음으로 조심스레 자리를 벗어났다. 현충사가 아우르는 곳에 아산이 있고, 아산은 현충사를 품고 있다. 현충사를 수놓는 나무는 감탄사를 늘어 놓아도 모자람 없는, 하나같이 범상한 굴곡이 있다. 현충사를 빠져 나올 무렵 눈에 선명히 들어오는 장면이 아름다운 동행의 상형문자 같다. 잊을 수도, 잊혀지지도 않는 역사의 큰 획과 같은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자취가 깊게 새겨진 곳, ..

바다를 향한 그리움, 망해사_20200111

점심을 해결하고 미리 훑어본 지도의 잔상을 따라 찾아간 곳은 만경강 하구의 정취를 지대로 누릴 수 있는 망해사다. 가는 길은 그 유명하고도 유명한 김제평야의 드넓은 평원을 한참 지나 바다와 맞닿을 무렵, 도로에서 한적한 우회길로 빠지자 작은 언덕을 넘어 한눈에 평원과 그 평원을 가르는 만경강이 들어찼고, 그 길이 끝나는 지점이 바로 망해사였다. 망해사는 여느 사찰과 크게 다를 바 없이 요지에 자리 잡고 있었지만 그 한적함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인적과 문명의 소음이 없었고, 사찰 한 가운데 도드라지게 자리 잡은 나무의 위세는 다른 모든 시선을 잡아 끌기에 충분했다. 사찰에 가면 흔히 접할 수 있는 석탑이나 종은 나무를 위해 존재하는 한시적인 동반자 같았고, 평원을 가르는 만경강은 이 자리에 서 있는 심적..

강물 위에 뜬 미련처럼, 도담삼봉_20191212

잔도 길과 스카이워크에서 느린 걸음으로 여행을 마친 뒤 단양 구경시장에 들러 5년 가까이 지난 추억을 거슬러 올라 순대 음식점에서 점심을 해결했다. (겨울 청풍호의 매력_20150214) 간판 공사인지 2층에 앉아 식사를 하던 중 몇 사람이 오고 가더니 이내 날카로운 소리가 들리고, 또다시 분주히 2층을 오가는 사람들로 식사 자리가 불편해 대충 식사를 마친 뒤 식당을 나서는데 용접봉의 파란 불길이 쇠를 달구고 있어 잠시 기다렸다 나왔지만 배려에 대한 감사는 전혀 없는 걸 보면 작업에 너무 열중했나 보다. 머뭇거릴 겨를 없이 바로 단양읍을 빠져나와 매끈하게 포장된 도로를 따라 이내 도담삼봉으로 향했다. 도담삼봉 주차장에 도착하자 2015년 당시엔 없던 식당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어 격세지감을 이런 때 느끼..

범상치 않은 웅크림, 화엄사에서_20191128

지리산 일대 사찰 중 규모와 짜임새가 유명한 화엄사는 꽤 가까이 있어 큰 마음 먹지 않아도 쉽게 접근하고, 둘러 볼 수 있었다.월정사, 해인사, 통도사와 같이 상징적이고 무게감이 느껴지는 화엄사를 찾았을 때는 다행히 방문객이 적어 둘러 보기 수월했다.북에서 내려오는 겨울이 이곳까지 당도하기엔 시간이 좀 걸리는지 찬란한 단풍색이 입구에 서서 오는 이들을 반기느라 화려한 손짓에 현혹되기 쉽지만, 사찰에 발을 들여 놓는 순간부터 화려함을 넘어선 진중한 분위기에 직면하게 된다.엄밀하게 따진다면 지리산이 아우르고 있기에 가능한 일일 터, 큰 어른 답게 일체 미동도 않고, 그저 한 자리를 지키며 굽이굽이 살피는 것만으로도 화엄사는 영속적인 부모의 그늘 아래 있는 거다. 화엄사 주차장에 주차를 한 뒤 사찰까지 도보로..

지나는 가을에 남은 미련, 천은사_20191127

지리산 성삼재를 넘어 남원에서 오를 때보다 더 가파른 도로를 굽이쳐 내려와 어느덧 경사길이 완만해 질 무렵 차량 지도에는 천은사가 표기되어 있고 그 옆은 저수지가 자리 잡고 있었다.구례 여정에서 지낼 숙소는 미리 예약한 야생화 테마랜드 내 숲속수목가옥이었기 때문에 어차피 목적지가 가까워진 만큼 시간 여유가 있어 861지방도 인척에 있는 천은사에 들르는 건 부담이 없었다.도로와 지척에 있는 주차장에 차량을 두고 얼마 걷지 않아 바로 천은사에 도착했는데 규모는 그리 크지 않지만 초입부터 인상적인 풍경으로 인해 도보로 불과 10분도 걸리지 않는 사찰까지 세세하게 주변을 둘러 보며 30분 정도 소요됐다. 주차장에 차를 두면 바로 천은사가 어느 방향인지 초입을 이내 짐작할 수 있다.입구 바로 옆은 절정의 단풍이 ..

봉화에서 영월을 넘어_20190714

우구치 계곡을 경계로 경북 봉화와 강원 영월이 만나는데 이렇게 결정한 길이 생각보다 길고 험난 했다.가는 길은 멀고 고갯길은 이내 끝나 버릴 것처럼 평탄해지다 다시 급격 해지길 여러번 거듭되자 드디어 완만한 내리막길이 나오는, 만만한 길이 아니었다.도로의 컨디션을 떠나 원래 다니던 루트인 봉화-영주-제천-충주에 비해 훠얼씬 시간 소요가 많았다. 사진이 짬뽕 되어 버렸는데 여긴 행정 구역상 영월로 우구치를 넘어 급격한 내리막길이 완만해지는 작은 산골 마을 어귀였다.높고 구불구불하 고갯길을 넘자 풀리는 긴장처럼 작지만 멋진 산골 마을이 인상적이었다. 여긴 각화사 한 켠에서 힘차게 흐르는 물소리의 진원지 중 하나로 깊은 수풀로 가려져 잘 보이지 않았던 곳이다.비가 내리긴 해도 약간 후덥지근한 날이라 이 소리가..

진중한 시간, 각화사_20190714

춘양에서 출발할 무렵 소강 상태의 호우가 다시 퍼붓다 멈추길 몇 번, 그 사이 춘양을 벗어나 영월 방면으로 미끄러져 갔다.펼쳐진 길을 따라 낯선 방향으로 묵묵히 나아가자 거대한 장벽 백두대간이 앞을 막아선다.둥지로 가기 위해 결국 넘고 지나게 될 숙명이지만 눈 앞을 가로 막는 호기심에 이끌려 긴 호흡 삼아 찾아간 각화사. 하염 없이 내리던 비가 가늘어질 무렵 겁 없이 초행길을 누비다 도착한 각화사는 여전히 빗물이 하얀 먼지처럼 허공에 흩날린다. 아주 오래된 흔적의 석탑은 작지만 알찬 시간과 정성으로 다듬어져 있었다. 사람이 보이지 않는 절 내부에서 가장 요란한 건 힘차게 솟구쳐 나오는 생수였다.그 소리에 이끌려 극심한 갈증에 시달린 사람 마냥 한아름 떠서 벌컥벌컥 마셨다. 천년 고찰의 시간들이 누더기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