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 자연 그리고 만남 498

삼도를 넘어_20190608

하루 만에 무주를 둘러 보는 건 쉽지 않아 미리 구상 했던 동선에만 충실히 따르고, 나름 무주에서 유명한 어죽을 후루룩 박살낸 뒤 영동 황간으로 발걸음을 돌렸다.아무래도 가족들의 노곤함을 배려하사 혼자만의 앞선 과욕으로 이동의 피로를 덜고, 나만큼 헤메는 길에 단련되지 않은 고로 단촐한 동선을 그어 언젠가 떠나게 될 다음 여행에 아쉬움을 던지자는 의미도 있다.황간으로 향하는 길은 높은 산새를 비집고 자리를 잡은 도마령을 넘어야 되는데 길이 단순해 헤메고 자시고 할 겨를이 없어 속도를 줄이고 주변을 둘러 보며 나아갔다.길과 속도에 대한 긴장감이 풀리자 대화는 풍성해 졌고, 그간 살아가던 이야기와 하다못해 주변에 마주치는 동네 풍경까지도 화제로 이어져 잠시도 지루할 틈은 없었다.마침 고갯길로 향하던 길은 민..

자연과 역사가 만든 장벽, 나제통문_20190608

인간의 역사가 자연의 나이보다 유구 하겠냐마는 문명이 잉태되고 제대로 된 역사를 기록 하면서 태초라는 표현도 써 봄직한 징표 중 하나, 백제와 신라의 경계와 관문이던 라제통문은 꽤나 장엄한 시간이 뚫어 놓은 바위 터널이다.수 많은 시간이 관통하고 셀 수 없이 많은 발자취들이 쌓여 매끈해진 흔적은 통렬하게 퍼붓던 비마저 실어 나르던 바람 조차 이 유구한 경계에 서서 잠시 숙연한 고개를 떨구던 곳이다.휘영청 맑은 대기를 뚫고 하염 없이 쏟아지던 햇살을 외면하며 잠시 나마 이 자리에 서서 잊혀져 버린 기억들을 되새김질 하기엔 아무런 거리낌도, 망설임도 없었다.언젠가 잊혀질 시간들이 있는 반면 그 이면엔 바위에 새긴 문자보다 더욱 굳건하게 각인될 시간도 있거늘, 먼 길을 달려온 보상처럼 가슴 벅찬 사념 덩어리에..

긴 여름의 시작_20190601

동탄호수공원에서 지인을 만나러 가는 길에 이미 시간은 6시반을 훌쩍 넘겨 호수를 시계 방향으로 돌며 길이 더 꼬였고, 7시가 넘어 만나게 되었다.호수 주변에 꾸며진 공원의 테마는 제각각 달라 지루할 틈이 없었고, 걷기 알맞은 날씨라 호수 주변을 산책하는 사람들은 상당히 많았다.불과 초봄에 왔을 때만 해도 호수는 텅비어 있고 공원엔 싸늘한 바람만 불었는데 그게 얼마 지났다고 완전 다른 세상의 풍경이다. 호수변 수변생태식물? 늪지? 같은 곳으로 진입해서 통화를 하며 걷는데 서로 이야기 하던 종착지가 달라 거기로 걷는다는 게 또 다시 다른 방향으로 걷게 되었고, 그럼 한 사람이 자리를 잡고 내가 찾아가는 게 수월하다고 판단하여 호수를 반 바퀴 돌아 약속 장소에 조우했다.호수 서편에 위치한 레이크자이 테라스하우..

여주에서 만난 야경_20190523

해가 지기를 기다렸다 남한강변으로 차를 몰아 여주 시내가 보이는 한강의 너른 고수 부지에 산책을 하며 야경을 즐겼다.산책로를 따라 느긋하게 걷는 사람들의 실루엣이 보이지만 그 길을 버리고 강 가까이 비포장길을 걸으며 마땅한 데를 찾아 간이 의자를 펼치고 야경을 감상하는데 때가 때인 만큼 날벌레들이 가느다란 빛을 보고 모여 들었다.장노출할 의도라 비교적 긴 시간 머무르며 셔터를 노출 시켜 둔 채 잔잔한 음악을 들으며 문명의 빛을 바라보는 내내 평온한 기분이다.크게 화가 날 일도, 함박 웃음을 터뜨리던 일도 단편적으로 파편화된 기억 마냥 떠오르지만 당시와는 달리 감정의 동요가 일지 않는 걸 보면 순간의 감정에 많은 에너지와 시간을 낭비한 게 아닌가 싶다.지나고 나면 별 거 아닌 일에 본질을 잊고 팔팔 끓어 ..

일상_20190520

이제는 가끔이 되어 버린 맑은 대기는 들판 여기저기서 자라던 싱아처럼 점점 사라져 버린다.그런 지친 씁쓸함을 달래주는 게 바로 계절이라 여전히 세상에 남아 집착의 뿌리처럼 촉수를 사방으로 뻗힌 아카시아 향이 커다란 위안이자 친구 같다.살랑이는 바람결에 매혹적인 향을 살포시 싣고 다가와 속삭이는 그 노랫말이 향그롭던 한 주의 시작인 월요일. 온 대기에서 아카시아 향을 피해 숨을 수 있는 곳은 없다.길을 걷다가도 그윽한 아카시아 향을 맡다 보면 잠시 나마 세상 시름을 잊고 후각의 긴장을 풀어 버린다.년 중 꽃 향기가 대기에 진동하는 날은 그리 많지 않고, 칡 꽃향이 강렬한 초가을 조차 이만큼 발길을 멈추게 하지 않는다. 넘실대는 바람에 봄은 덩달아 넘실대며 떠날 채비를 마친 듯 대기를 달군 낮이 등골에 땀 ..

막연한 추억과 그리움, 봉화역_20190516

막연한 기다림과 그리움.텅빈 시골 역의 허허로운 플랫폼에서 지는 석양을 바라다 본다. 무심한 석양은 안중에도 없이 수 많은 사람들이 이 자리에서 서서 출발의 설렘과 도착의 안도를 얼마나 느꼈을까?덜컹이는 열차의 승차감이 무척 불편하건만 어색한 신경을 마비시키는 기대감은 설사 열차의 좌석이 모두 매진되어 제대로 된 자리도 없이 한정된 공간을 떠도는 와중에도 열차가 목적지에 도착하는 순간 지루하던 불편은 금새 메말라 사라져 버린다.감정이란 오묘하게도 한 순간의 불편과 투정을 극도로 자극시켰다 이내 가라 앉고 모든 설렘에 몸을 맡겨 버린다. 시골 역 치곤 꽤 크다.해는 서녘으로 기울어 그림자도 덩달아 길게 늘어난다.가끔 시골 마을에 들렀다 간이역에 들러 사람들이 거의 찾지 않는 플랫폼에 잠시 서서 텅빈 시간을..

금단의 영역, 관창폭포_20190516

정글처럼 깊고 눅눅한 습기 내음까마득한 산 속처럼 칼로 도려낸 듯한 수직의 바위만년설로 뒤덮혀 메마르지 않을 것만 같은 물길더불어 언뜻 보게 되면 소리만 공명시킬 뿐 눈에는 전혀 보이지 않는 곳에 이런 폭포가 있다.조물주가 거대한 바위를 이 자리에 두고 예리한 칼로 수직의 평면을 완성시켰고, 자연은 그 견고한 그릇에 물줄기를 그어 영속적인 징표를 약속 했다.변함 없는 관심을 두겠노라고, 그래서 늘 생명이 외면하지 않게 하겠노라고.깊디 깊은 비밀의 방에 그들만의 세상인 양 날벌레와 꽃 내음이 진동을 한다. 관창폭포를 찾은 건 온전히 지도의 힘이다.종종 가는 봉화 인근에 뭐가 있을까?산과 계곡이 깊다는 특징 외에 디테일과 지식이 없어 자근히 찾던 중 눈에 띄는 몇 군데를 발견하고 후기를 찾아 보는데 정보가 ..

살포시 잠든 밤 이슬_20190515

정신 없는 일상을 지나 잠시 주어진 여가를 활용하여 야반 도주하듯 오지 마을에 도착했다.대략 22시가 넘어 도착해서 꽤나 밝은 랜턴을 틀어 불빛이 전혀 없는 마당을 비추자 사람이 거의 찾지 않았다는 반증처럼 마당에 땅딸막한 수풀이 우거지기 일보 직전인데 빛이 전혀 없는 공간에 밝혀 놓은 랜턴의 불빛을 반사 시키며 반짝이는 무수히 많은 점들이 있다.무얼까? 수줍음 많은 이슬이 밤에 지상으로 내려와 소근거리며 생명의 벗이 되어 준다.어떤 생명에겐 세상을 통찰한 바람이 스승일 수 있겠지만 또 다른 생명에겐 삶을 위협하는 천적일 수 있으려나?이슬은 그런 넋두리를 들어주느라 밤새 뜬눈으로 귀를 기울이다 해가 뜨면 홀연히 사라져 버린다.허나 반기지 않더라도 약속이나 한 것처럼 다시 찾아와 생명을 가진 것들에게 또 ..

일상_20180428

봄은 짧은 게 아니라 붙잡고 싶은 미련이 눈을 멀게 해서 그런가 보다.이렇게 동네 곳곳에 봄이 자리를 잡고 있건만 거창한 계절이라는 스스로의 탐욕에 도치되어 먼 곳만 바라 보게 된다.지금이라도 늦지 않았고, 휴일 졸음을 떨치면 주위에 봄은 쉽게 누릴 수 있더라.잠시 걷는 다는 게 꽤 시간이 흘러 많은 봄을 낚아 챘다. 적벚꽃이란다.우리가 흔히 봤던 벚꽃이 지면 이 친구가 등장한다는데 곱기도 하다. 진달래꽃이 떨어지면 파란 이파리가 돋아난다. 반석산을 걷던 중 복합문화센터 뒷편의 산언저리가 화사하다. 아파트 울타리가 눈부시게 아름답다. 내가 좋아하는 나무 터널길.여름이 되면 무성한 그늘의 터널이 자란다. 적단풍이 마치 가을에 온 듯한 착각으로 물들인다. 청단풍의 청아한 신록. 넌 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