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울 32

작은 오지 쉼터, 봉화_20220731

깨진 평온에 심술이 난 물안개 사이로 금세 굵은 빗방울이 떨어졌고, 여울틈 사이로 숨어 있던 생명들이 신기한 구경거리를 만난 양 다가와 툭툭 입을 맞혔다. 하늘이 떨구는 비는 여유의 향미가 곁들여지면 잠자던 자연의 협주곡이 되며, 수줍어 숨어 있던 안개를 춤추게 하며, 침묵하던 바람의 세상 이야기를 들려줬다. 그래서 살짝 찍는 쉼표는 견줄 수 없이 감미로웠다. 몸을 가눌 수 없는 차가운 여울에 살짝 발만 담근 채 잠잠해진 비를 피했다. 멀찍이 어딘가 숨어 있던 안개가 여울 위로 만개했다. 근래 비가 거의 내리지 않아 물이끼가 제법 끼어 있었고, 그걸 먹이 삼아 다슬기도 빼곡하게 있었다. 굵은 빗방울 하나 여울에 튕겨 수정 구슬이 생겼다. 비가 내려 그나마 수량이 늘었고, 물은 원래의 그 청정함을 되찾았다..

새벽 내음_20200515

가족들의 쉼터가 있는 오지에서 하루를 보내는 동안 쉴 새 없이 비가 내린다. 방수 재킷을 걸치고 잠시 빗소리를 감상하다 보면 세상 시름이 비집고 들어올 틈이 없어지고, 자칫 무료할 것만 같은 문명이 차단된 곳임에도 화이트 노이즈가 있어야 될 자리에 차분한 대화가 자리 잡는다. 평소 얼마나 다양한 문명의 도구에 시간을 바쳐 왔던가. 이른 새벽에 정신 나간 사람처럼 지저귀는 새소리는 건조한 소리에 익숙한 청각에 단비를 뿌려준다. 동 틀 무렵 밤새 지치지 않고 흐르는 여울로 나가 지저귀는 새소리를 곁들인다. 잠에 취한 눈에 비해 머릿속은 놀랍도록 맑아진다. 산골에 맺힌 빗방울은 도시와 달리 더 영롱하고 쨍하다. 아주 미묘하게 약초향이 가미된 영락없는 미나리와 같은 녀석은 산미나리란다. 이미 꽃이 만발하여 먹기..

일상_20191029

하루 여유를 부려 정처 없이 동탄을 방황했다.이미 해는 서쪽으로 기울어져 있는 상태라 부쩍 짧아진 낮을 실감케 했고, 일찍 찾아오는 밤에 쫓기듯 잰걸음으로 발길 닿는 대로 돌아 다녔다. 올 가을은 그리 자주 다니지 않아 가을색이 만연해지는 이 거리를 잊고 지냈다.아직 계절 옷을 덜 입어 은행나무 가로수조차 연녹색으로 여전히 진행형이지만 여느 지역의 가을처럼 금새 물들었다 낙엽으로 한 해를 마무리할 터라 틈틈히 다니며 구경하기로 했다. 오산천 산책로를 밟기 전, 가을이 이제 막 젖어들기 직전이 아닌가 착각이 들만큼 계절에 둔감하다. 전날 내린 가을비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심적인 여유가 충만한 가을처럼 누가 볼새라 금새 달아나 버리던 빗방울은 아직 풀입 위에 남아 여유를 부린다. 인공 여울은 갈대 세상이 되..

타오르는 가을을 떠나며_20191025

근래 들어 가장 긴 여정이었던 이번 여행의 마지막 날, 옷자락을 잡는 미련으로 늑장을 부렸다.통나무집에서 가져간 커피를 천천히 내리며 창 밖에 쏟아지는 햇살과 바람을 함께 음미하는 여유를 부렸는데 그걸 알리 없는 무심한 가을은 숙소 앞에 끊이지 않는 세찬 물살처럼 사정 없이 지나쳐 정오가 가까워졌다.지지리궁상을 떨어봐야 달라질 게 없어 살림살이를 챙겨 꾸역꾸역 차에 말아 넣고 마지막으로 주위를 둘러봤다.전날이 화사하게 흐린 날의 가을이라면, 다음날은 비가 씻어버린 청명하고 맑은 가을이라 이틀 만에 극명한 가을의 롤러코스터를 타게 된 셈이다.흐린 날에 만난 가을이 믿음직한 가을의 변치 않는 신념이라면, 맑은 날의 가을은 불꽃처럼 강렬하고 열정적인 가을의 이면이었다.망막을 파고든 뜨거운 색채에 설령 시신경이..

가을 빛결 큰 골짜기에 흐른다_20191024

전날 태백에서 봉화 현동을 거쳐 통고산으로 오던 길은 뜬금 없는 비가 퍼부어 산간지대의 변화무쌍한 날씨를 실감케 했고, 짙은 밤이 만연한 오지 답게 도로는 지나가는 차량 조차 거의 끊긴 상태였다.아무리 그렇더라도 밤의 정점이 아닌 21시도 되지 않은 시각이었지만 태백을 벗어나는 순간부터 함께 도로를 질주하던 차들이 어디론가 사라져 음악에 집중하느라 속도 게이지가 한창 떨어진 것조차 인지하지 못한 채 고독한 밤길에 생명의 흔적들이 거의 없었다.통고산 휴양림에 도착하여 가장 깊은 곳에 위치한 통나무집으로 들어가 싸늘한 방을 잠시 데우는 사이 기억에서 잠시 지워졌던 소리가 사방에 가득했다.바로 통나무집 앞을 흐르는 여울 소리.2015년 만추 당시 이용했던 통나무집 바로 옆이긴 해도 3채가 적당한 거리를 두고 ..

이른 아침의 적막_20191018

어쩌면 빠듯한 시간에 정처 없이, 반쪽 짜리 여행으로 전락해 버린 이번 여정은 짧은 시간에 비해 동선만 길어 뚜렷한 흔적도 없었다.그래서 영주와 봉화에 갈 여정 없이 무작정 고속도로를 타고 저녁이 지나 도착하여 암흑만 반길 뿐이었다.밤에 잠이 드는가 싶더니 가을 먼지 털듯 후다닥 잠이 달아난 시각은 새벽 2시가 채 안되어 누운채 잠을 청해도 온갖 잡념이 한발짝 다가서는 잠을 떨쳐 버리자 아예 잠자리를 털고 일찍 하루를 시작했다.영주에 흔치 않은 24시 해장국 집에서 든든한 아침 끼니를 해결하고 봉화로 향하는 길은 완연한 밤이라 간헐적으로 상향등을 켜 암흑을 뚫고 달렸지만 목적지에 거의 다다를 무렵 동녘 하늘에서 부터 서서히 암흑이 걷히고 있었다. 텅빈 도로를 질주하다 동녘 여명이 다가오자 차를 세워 두고..

한적한 가운데 오로지 물소리 가득한 세심 휴양림_20191008

임실 세심 휴양림 도착은 당초 예상 시각보다 이른 초저녁이었다.가는 거리가 멀어 느긋하게 가다 보면 밤 늦은 시각이라 예상했지만 생각보다 고속도로 트래픽은 거의 없었고, 미리 내려간 커피를 홀짝 거리며 마시는 사이 어느덧 전주를 지나 임실에 당도 했다.시골 시계는 밤이 금방 찾아와 오는 길에 빛이 유독 환한 하나로마트에 들러 늦은 밤에 행여 찾아오지 않을까 우려 했던 허기에 대비하여 아쉬운대로 끓여 먹는 우동과 주스만 챙겼다.아니나 다를까 세심 휴양림으로 오는 길은 임실에서 30번 국도를 따라 얼마 가지 않아 한적한 좌측 임실천 다리를 넘어 한참 적막한 밤길을 헤쳐 나가서야 도착했다.오는 도중 정말 이 길이 맞을까 싶을 만큼 지나치게 한적한 도로는 잦은 오르막과 내리막을 반복하다 평탄해질 무렵 급격히 좌..

일상_20191005

간편한 차림은 약간의 한기를 느낄 수 있는 가을스런 날씨가 열어놓은 창을 넘어 온 집안 구석구석 퍼진다.마음에 단단히 벼르고 벼른 다짐 중 이 귀한 계절을 잠시도 허투루하게 보내지 말자고 했던 만큼 몸에 덕지덕지 붙은 귀차니즘을 털어 내고 약간의 한기를 그대로 느끼며 집을 나섰다. 가장 접근하기 쉬운대로 반석산 둘레길에 올라 길을 따라 자라고 있는 계절의 흔적들을 면밀히 살피며 천천히 걸어갔다.평소 같으면 이렇게 세심한 관찰 없이 후딱 한 바퀴 돌았을 터인데 오늘 만큼은 시간에 쫓기지 않고 내 마음 끌리는대로 보폭도 조절하고 쉬고 싶을 때 자리를 가리지 않고 쉬기로 했던 만큼 시선이 멈추는 걸 마다 않는다.길 가장자리에 넝쿨들이 여기저기 촉수를 뻗고 있는 모습을 보자 단단한 지형지물에만 자라는게 아니구나..

한적한 남한강변을 거닐다_20191001

여느 마을마다 주변 지형지물에 하나도 빼놓지 않고 지명과 이름을 달아 놓은 걸 보면 옛사람들은 세상 모든 걸 의인화 시키고 동격화 시켜 생명이나 자연을 함부로 경시하거나 차별을 두지 않았다.심지어 그냥 지나칠 수 있는 들판의 바위에도 닮은 것들을 유추시켜 이름을 달아 놓았고, 부를 때도 마치 사람처럼 친숙한 어법을 사용했는데 그렇게 자연스레 배운 것들을 구전으로 남겨 어쩌면 세상 모든 것들과 어울려 공존공생하는 방법을 말문 터지듯 습성으로 익혔다.마을을 한 바퀴 크게 돌며 지형과 그런 친숙한 우리말에 재미난 동화를 경청하듯 세세히 들으며 반 나절을 보내고, 혼자 자리를 떠나 부론으로 넘어 갔다.사실 흥원창으로 갈 계획을 세웠지만 어중간한 여유를 갖다 보니 확고한 목적지를 정한게 아니라 결정 장애를 겪었고..

천리 행군?_20190924

하루 동안 천리 행군 저리 가라다.학가산에서 출발하여 원래 목적대로 대구, 봉화를 거쳐 집으로 갈 심산인데 단순하게 직선길로 가는 것도 아닌지라 고속도로와 꼬불꼬불 국도를 종횡무진 했다. 학가산 휴양림을 빠져 나와 예천IC로 가던 중 어등역 이정표를 보고 핸들을 돌려 반대 방향길로 접어 들어 처음 들어본 시골 간이역에 잠시 들렀다.멀찌감치 차를 세워 놓고 혼자 걸어 어등역에 다다르자 굳게 문이 닫혀 더이상 운영하지 않는 폐역이었다.이런 모습의 간이역은 참 익숙한데 깔끔하게 덧칠해진 외벽은 왠지 이질감이 든다. 어등역 바로 앞은 이렇게 작은 개울이 흐르고 그 개울 너머 마을로 접어 들기 위해선 작고 낡은 다리를 건너야 되는데 얼마나 발길을 외면 받았는지 다리는 위태롭고 다리 초입은 수풀이 무성하며, 다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