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경 22

절경 앞 키다리아저씨, 병방산_20220318

공백과 같은 스카이워크에 올라 크게 휘몰아치는 동강의 모습에 반했다. 태풍급 바람으로 짚와이어는 멈춰 버렸고, 간헐적으로 얼굴 간지럽히던 빗방울은 강풍의 위세에 집으로 돌아가버렸다. 봉우리가 하얗게 변한 병방산과 그 발치에 번뜩이는 동강의 조화에 쉽게 발을 떼지 못하고, 마치 무언가 소중한 소품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자연이 찍은 점을 놓치지 않고 시선에 담았다. 숙소에서 출발하여 정선읍에서 점심을 해결한 뒤 곧장 병방치로 내달았다. 새벽에 내린 눈발로 지난번처럼 진입로에 길이 미끄러워 슬립 되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다행히 도로는 크게 미끄럽지 않아 오르기엔 수월했다. 1년 전인 21년 3월 초에는 병방산으로 가던 중 당일 아침까지 내린 폭설로 인해 거듭된 슬립으로 병방산 초입 오르막길에서 차를 돌렸었던 기억..

정선에서의 특별한 경험들, 파크로쉬-가리왕산-백석봉_20220317

경이로운 동강의 이야기를 듣고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한둘 떨어지기 시작하는 빗방울은 기분을 억누르는 복병이 아니라 성취를 북돋워 주는 흥겨운 귀갓길의 동행자며 어깨동무를 나누는 친구였다. 어스름 피어나는 정선의 대기는 일찌감치 내린 암흑조차 위압감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는 시간의 정겨운 순응이며, 그 암흑이 걸쳐 입은 옷은 저녁밥을 짓는 굴뚝의 향그로운 낙엽 타는 내음으로 단장했다. 숙소가 가까울 무렵 지역 사람들이 즐겨 찾는 샘터에 들러 청량감이 터질 듯한 알싸한 생수를 들이키며 하루의 온전한 여정에 뒤늦게 화답했다. 행여나 하는 마음에 냥이들을 만났던 자리를 두리번거리자 마치 손꼽아 기다린 양 작은 담장에 웅크리고 있다 보슬비를 피한 자리에 마련해 준 식사를 정신없이 해치웠다. 녀석들이 식사를 하는 사..

겨울잠에 빠진 오장폭포_20210303

여전히 눈부신 하늘 아래 눈은 미동도 않고 포근히 세상을 포옹하며, 심지어 쉼없이 중력에 이끌리던 폭포수마저 잠시 쉬게 한다. 깊은 산중을 비집고 뻗어 있는 길 따라 찾아간 곳은 오장폭포지만 한 해의 분주한 활동의 기지개를 켜기 전 취하는 휴식을 깨우지 않고 눈인사를 건네며 뒤돌아선다. 10년이 훨씬 이전, 수마가 할퀸 산사태 복구 현장은 여전히 깊은 상처를 드러낸 채 오롯이 아물기만 기다리며 기약 없는 겨울잠에 빠져 있다. 여긴 눈이 더 많이 내렸는지 눈이 덮힌 길을 내딛자 20여 cm 정도 발이 푹푹 빠지는 걸 보면 그 이상 폭설이 헤집고 갔나 보다. 폭포와 소나무의 조합, 우연일지라도 필연이 된다. 하얀 눈에 덮혀 깊은 겨울잠을 자고 있는 오장폭포. 10년 훨씬 지난 상흔이지만 아직 그 흉터는 선명..

보고 싶다, 정선아_20210303

눈이 내린 상태라 병방산으로 가던 중 진입로 오르막길에서 계속된 슬립으로 차를 돌려 구절리 방향으로 여정을 급히 선회했다. 다행히 구절리까지 도로 컨디션이 좋아 오아시스 음악을 틀어 한적하게 운전했는데 정선 일대 내린 눈이 여행객들을 모두 내쫓았는지 도로는 그 어느 때보다 한적했다. 이럴 때 뱉는 말, 왕재수! 여전히 위압적인 가리왕산이 창 너머 세상에 버티고 있다. 저 길 따라 가리왕산을 오르면 시간이 얼마 걸릴까? 아직은 알파인 트랙을 통해서 입산은 금지되어 있단다. 숙소를 나서기 전, 고봉들 사이로 뻗은 숙암계곡 너머 눈 덮인 갈미봉이 선명하게 보인다. 백석봉 또한 내린 눈을 품고 평소와 다른 모습으로 단장한 상태. 식사를 하기 위해 정선에 들렀다 간만에 '보고 싶다, 정선아' 계단을 찾는다. 긴 ..

그래서 올 수 밖에 없는 파크로쉬_20210302

다음 숙소로 옮겨 봇짐을 풀고 리조트 주변을 산책하며 그리 멀지는 않지만 운행의 걸림돌이자 멋진 동반자 였던 눈길에서의 긴장 또한 훌훌 털어낸다. 적어도 1년에 한두 번 오는 사이 속속들이 알게 된 덕분에 이제는 발길이 뒤섞이지 않고 익숙하게 찾아낸다. 창가에 놓인 자리에 앉아 고압적인 풍채의 가리왕산을 보는 게 이곳의 뷰포인트로 생각 이상으로 규모가 거대한 데다 봉우리는 아니지만 그에 걸맞은 고도가 한눈에 보여 누구든 매료될 수밖에 없다. 또한 가리왕산 반대편 백석봉은 가리왕산의 규모에는 미치지 못하나 특이하면서 독특한 산줄기를 보노라면 그 매력의 우열을 가리는 건 의미가 없고, 다만 미려한 산결을 어느새 시선으로 붙잡아 미로를 그리듯 눈길을 뗄 수 없다. 한바탕 퍼붓다 그친 눈보라는 대기의 잡티를 모..

하얀 겨울 낙원, 정선 설원_20210302

수줍음 많은 눈은 얼마 지나지 않아 봄의 시선을 피하려 들겠지? 지상의 피조물과 올올이 엮여 잠시 쉬는 모습이 결 하얀 아기 피부 같아 가던 길에 서서 잠시 눈을 밟아본다. 아직은 눈이 그친 지 얼마 되지 않아 발끝을 간지럽히는 보드라운 잔향이 전해지는데 가끔 보이는 눈 위 발자국 또한 나와 같은 기분을 가진 게 분명하다. 다음 숙소로 가는 동안 길머리에 있는 샘터에 들러 물 한모금 들이키자 눈 내린 세상을 질주한 긴장이 역력했는지 긴장과 갈증이 물러나고 그 자리에 고스란히 안도와 만족이 들어찬다. 가는 길에 정선 치곤 꽤 넓은 평원을 하얗게 물들인 설경에 반하여 다시 차를 돌려 다리를 건넌다. 평온한 마을의 첫인상이 정선이구나 싶다. 오대천길은 꽤 자주 다닌 길인데 눈이 내려서야 비로소 숨겨진 아름다움..

산수화 같은 정선 설경_20210302

이번 정선 여행에서 가장 매력적인 설경은 흔하디 흔한 동네 외곽에 몰래 움츠려 있던 한 폭의 산수화 같은 별어곡 부근이었다. 마치 가로로 넓게 펼친 한지 위에 정성스레 먹인 먹물로 한땀 한땀 보드라운 붓으로 휘갈긴 듯 여백과 바위 절벽, 단조로울 새라 드물게 서 있는 소나무가 어우러져 담채화의 진수를 보여주고 싶은 자연의 진면목이다. 물론 편집에 대한 귀찮음에 메타데이터를 올리지만 단지 시각적인 심상만으로도 꽤나 수려하다. 산재한 의미 중 여행의 진면목은 이런 예기치 않은 감탄 때문일까? 느림의 미학처럼 평소 인적이 거의 없는 도로에서 속도를 줄인 만큼 자연의 진면목이 들어차 공간을 가득 채웠던 중력의 끈을 놓았다. 가슴이, 머리가, 심장이 여전히 살아 있어, 그래서 고맙다. PS - 정선? 정선. 어쩌..

낡고 썩어버린 낭만, 고한 메이힐즈_20210301

겨울이 봄에게, 추위가 따스함에, 응축된 대지가 푸른 새싹에게 애증과 더불어 그간의 세상 이야기를 들려주려는 시기. 때마침 내리는 비소리와 기차 경적이 그리운 태백선이 교차하는 풍경과 더불어 묘하게도 마음이 따스해진다. 태백에서 고한으로 넘어오는 길에 해발 1,000m가 넘는 거대한 두문동재를 만난다. 꼬불꼬불 고갯길을 일직선 도로로 닦고, 금대봉 아래 긴 터널을 뚫었다지만 여전히 거대한 고갯길은 일기가 좋은 날에도 숨을 허덕이게 만들 만큼 차량 엔진소리는 꽤 오래 둔탁하다. 그런데 오후 들어 폭설 수준의 눈발이 날리자 가뜩이나 힘겨운 고갯길에 꼬리를 잡아끄는 심술이 동반되었고, 운 좋게 제설차량을 만나 몇 번의 슬립이 있은 후 그나마 수월하게 고갯길을 넘어 무사히 숙소에 다다랐다. 밤새 자욱한 눈발은 ..

태백에서 삼척으로, 겨울에서 봄으로_20200413

행복에 대한 감사를 새삼 깨닫게 해 준 태백에 작별을 고할 때, 전날 잔뜩 웅크린 하늘은 어디론가 흩어지고 화사한 민낯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잠에서 깨어 커튼을 열어젖히자 어제 무겁고 표독한 설원과 다르게 포근한 설원이 펼쳐져 있다. 이틀 동안 편안한 휴식을 제공해준 태백과 숙소에 마지막 인사 꾸벅~ 출발하기 전, 매봉산에서 부터 태백산 방면까지 또렷한 선들이 모여 언제나처럼 세상을 노래하고 새로운 하루를 맞이한다. 그리 무겁던 하늘은 눈에 띄게 가벼워져 점차 청명한 하늘이 구름을 열어젖히고 투명한 민낯을 내민다. 전날 그토록 짙은 구름을 덮어 꽁꽁 숨어 얼굴을 감췄던 함백산은 하루 만에 완연히 다른 얼굴을 드러냈다. 잠깐 사이 구름은 어디론가 총총히 자리를 뜨고 그 뒤를 이어 하늘 본연의 빛깔에 물들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