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장군이 만든 절정의 겨울 미소에 흠뻑 젖어 추위도, 현실도 잊게 되던 날.
교통체증과도 같은 현재를 잊기 위해 지금 이 순간 겨울 왕국에 발을 들였고, 먼지에 휩싸인 내일을 잊기 위해 이 계절이 만든 새하얀 불꽃에 넋을 태웠다.
계절은 악마가 아닌 천사가 흘린 미소며, 그 미소는 찌푸려 흐느끼는 사유를 비켜갔다.
알을 깨고 나온 새가 눈부신 세상의 파란 하늘로 유영하듯 구름이 집어삼킨 산마루 하늘빛이 뿌연 대기를 깨고 하늘 향해 역동하며 겨울 아름다움 고이 입어 옷자락 드날렸다.
오전 기상해서 가장 먼저한 건 바로 육안으로 발왕산 정상 부근 기상을 파악하는 것.
여전히 얇은 구름이 빠르게 지나가긴 했지만 창밖에 부는 바람을 봐선 여전히 강력했지만 전날과 비교해 예봉이 많이 꺾인 걸 체감할 수 있었다.
그리 이른 시각은 아니었지만 오전 중으로 퇴실 준비를 마무리한 채 숙소를 빠져나오기 전에 미리 확인한 바, 발왕산으로 향하는 케이블카는 정상 운행 중이란다.
발왕산 케이블카가 워낙 입소문 난 터라 조금이라도 늦으면 많은 관광객들이 몰리기 땜시롱 전광석화처럼 체크아웃을 하고 바로 케이블카 매표소로 직행, 여전히 줄은 길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더 많은 사람들이 몰릴 건 뻔하기 때문에 주저 없이 매표하고 바로 대기줄에 섰다.
대략 20분 정도 대기줄에 서있자 성큼성큼 짧아진 줄 끝에 결국 케이블카에 탑승하여 적당한 긴장과 더불어 스릴감을 느끼며 발왕산으로 올라갔다.
도중에 느닷없이 한 차례 심한 강풍이 불어 전체가 잠시 멈췄고, 함께 탑승 중이었던 일 가족 중 아이가 무섭다고 보채긴 했지만 몇 분 지나 다시 전체가 일사분란하게 움직여 막판 급경사 구간을 지나 무사히 발왕산 정상에 도착했다.
케이블카에 내린 사람들은 일제히 환호성을 질렀는데 그 이유는 첫 번째로 살을 에위는 추위와 함께 숨이 막힐 정도의 강풍이 불었기 때문이었고, 두 번째로 탁 트인 전망과 함께 상상 이상의 멋진 겨울 왕국이 바로 눈앞에 펼쳐졌기 때문이었다.
잠시나마 카메라가 미쳤던 걸 제외하면 발왕산 정상으로 아주 천천히 걸으며, 표독한 추위도 잊은 채 겨울 왕국을 감상하느라 정신줄을 놨고, 비단 나뿐만 아니라 같은 방향으로 걷는 대부분의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겨울 풍경으로 인해 발이 무거워진 양 아주 천천히 걸을 수밖에 없었다.
다만 상고대가 너무 견고하게 맺혀 있어 미끄러질 위험 때문에 스카이워크는 출입 금지되어 조금 아쉽긴 했지만 이내 잊어버리고 길이 이끄는 대로 걷게 되었다.
발왕산 드래곤캐슬을 벗어나면 사람들이 다듬은 눈 위의 길을 걷다 문득 주변을 돌아보게 되며, 어느 계절도 흉내 낼 수 없는 겨울 매력에 흠뻑 젖었다.
감히 미세먼지도 굴복하지 못한 발왕산에서 마치 세상의 백팔번뇌를 밟듯 사뿐히 걸으며 정상으로 향했다.
백두대간은 온통 겨울 옷을 입어 하얗게 변했다.
멀리 동해가 보일 법하지만 산 아래 내려앉은 미세먼지로 인해 희미하게만 보일 뿐이었다.
상고대와 뒤섞인 눈꽃이 세상을 짓밟은 게 아닌 그들과 어울려 두터운 옷을 입힌 터라 나무는 그 어느 계절보다 풍성하고 견고한 솜털을 입었고, 아무것도 자라지 않은 길은 그 원형을 그대로 유지한 채 나무가 만든 하얀 터널이 열렬히 환영했다.
그 모양은 어느 하나 같은 게 없었다.
다만 거기를 지나는 사람들의 감탄은 하나였다.
너무 눈부시게 아름다워 감히 만질 수 없었다.
왠지 이 모습을 그대로 두고픈 욕망, 아마도 욕심도 범접할 수 없는 아우라 때문이었다.
서쪽 내륙 방면을 바라보면 거대한 백두대간의 줄기에 수없이 많은 열매처럼 산봉우리들이 첩첩이 매달려 있었다.
걷는 내내 어느 하나 놓치지 않기 위해 사방을 낱낱히 정독했다.
그래서 걷다 왔던 방향도 되짚어보게 되었는데 멀리 드래곤캐슬의 크기를 짐작하며 진행한 거리를 가늠하게 되었다.
다시 서쪽 방면으로 바라보자 거대한 절경이 변함 없이 동행했다.
그나마 짧은 대기줄을 기다려 발왕산 정상 전망대에 섰다.
물론 어느 누군가 통제하거나 안내한 건 아니지만 사람들은 그 줄에 맞춰 질서 정연하게 기다리고, 움직이며, 소기의 목적을 끝내면 빠져나갔다.
정상에서 사방을 둘러보며.
우선 정면에 해당되는 동쪽을 바라봤다.
지면을 덮은 엹은 미세먼지가 동해를 살짝 숨겼고, 가까이 발아래엔 산중의 고원 같은 안반데기와 근육질 산세를 비집고 자리 잡은 도암호가 한 마리 용처럼 웅크리고 있었다.
이참에 2014년 이후 몇 차례 도암호 여정도 머릿속에서 주마등처럼 스쳤다.
이제 시선을 남쪽으로 돌렸다.
아마도 정선, 태백 방면 같은데 정확하지 않지만 가리왕산이나 태백산 방면 아닐까 싶었다.
대기줄로 인해 한 자리에서 오랫 동안 감상에 젖을 수 없어 육감으로 느껴지는 나침반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발왕산 정상에서 드래곤캐슬을 보자 한데 어우러진 조각품 같았다.
드래곤캐슬과 정상 사이 작은 터엔 사람들이 겨울 왕국에 취해 흐느적거리고 있었다.
다시 돌아갈 결심을 갖고 왔던 길을 따라 밟기 시작, 동쪽 방면 안반데기로 길게 늘어선 풍력발전소가 보였다.
워낙 소원하게 먼 곳은 그대로의 정취가, 바로 앞 두터운 상고대로 뒤덮인 숲은 또 다른 정취가 넘실거렸다.
시선의 방향을 좀 더 남동쪽으로 옮겨도 여전히 동해는 거친 장막 속에 가려진 것처럼 거의 보이질 않았다.
대신 가까이 몽실몽실 쌓여있는 상고대숲은 어떻게 보더라도 여전히 겨울의 아름다움을 상형문자로 대신했다.
왔던 길을 되짚어 돌아가는 길엔 올 때와 다른 그림들이 연이어 펼쳐졌다.
정상으로 향할 때 보이던 것들과 간과했던 것들이 이제는 자리를 바꿔 간과했던 것들이 보였고, 반면 봤던 것들은 이제 시야 뒤편으로 숨어버렸다.
발왕산 정상 부근엔 아직 사람들이 많지 않았는데 조금 일찍 올라온 덕분이고, 추위가 관광객들의 발목을 붙잡지는 못했다.
날씨는 대체적으로 쨍하게 맑았지만 이따금 머리 위로 지나는 조각 구름들이 엄청난 속도로 다가왔다 이내 어디론가 흘러가 버렸다.
그만큼 높은 고도에 걸린 구름이 서둘러 사라진 것도 있었고, 강풍으로 인해 서둘러 떠내려간 것도 있었다.
짧은 내리막길을 거치면 드래곤캐슬이 상고대숲에 뒤엉켜 보였다.
그만큼 정상과 드래곤캐슬과의 거리도 가까웠고, 고도도 큰 편차가 없었다.
겨울 정취에 취해 걷는 사이 정상에서 보이던 작은 쉼터에 도착했고, 거기엔 수직으로 하늘 윗편이 트여 있을 뿐 쉼터 주위에 겨울 풍경들이 담벼락처럼 감쌌다.
발왕산에 내려앉은 겨울에 감탄으로 화답하며 그 단단하고 정교했던 정취에 작별 인사를 드렸다.
내려가기 전에 드래곤캐슬 내부로 들어와 스카이워크를 제외한 가장 높은 층에 올라 사방을 둘러봤다.
이번 발왕산 여정에서 마지막 남은 아쉬움을 쥐어짜듯 관망하기 좋은 통유리 너머 북동쪽 방면을 응시했다.
반대로 발왕산 정상이 있던 남쪽 방면엔 도착했을 때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사람들이 밀려들기 시작했는데 굳이 아쉽다면 주목군락지를 간과했었다.
다음 여정을 결심할 빌미가 제공된 셈이었다.
화려했던 설경을 보여준 이 겨울에 감사를 드리며, 이 풍경을 마지막으로 케이블카를 타고 내려왔는데 내려가는 케이블카 순번은 금세 다가왔던 반면 올라오는 사람들은 빈칸이 없을 정도로 사람들이 밀려들었고, 하부 승강장엔 대기열이 무척 길게 늘어서 있었다.
그리 이른 시각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조금 일찍 서두르길 잘했다는 위안으로 발왕산에 작별 인사를 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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