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388

막장과 삶의 포용, 운탄고도_20211027

가을이 되면 막연히 그리운 곳, 담양과 정선 중 하늘숲길이 있는 정선땅을 밟는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봉우리들이 하늘을 향해 까치발을 들어 서로 어깨동무를 하며 공존의 친근함을 과시하는 하늘숲길 일대는 무겁게 석탄을 이고 가는 삼륜차에 밟히고, 시간의 폭풍에 먼지처럼 옛 시절이 흩어지자 이제는 고독에 밟힌다. 언젠가 사라질 약속처럼 한 때 세상을 풍미하던 석탄은 비록 폐부와 생존의 지루한 복병이었지만 이제는 사무친 그리움의 석상이 되어 비록 까맣던 흔적이 증발해 버릴지언정 가슴에 새겨진 기억은 돌처럼 더욱 굳어져 버렸다. 그 애환을 아는지 속절 없이 능선을 넘은 바람은 선명한 자취처럼 꿈틀대는 운탄고도에서 긴 한숨을 돌리며 터질 듯 쏟아지는 가을 햇살 아래 잊혀진 옛 노래를 흥얼거린다. 이 또한 ..

고운 단풍_20211026

이번 가을에 가장 이쁜 단풍색은 의외로 상행선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만났다. 아직 채 익지 않은 가을로 서서히 옷을 갈아입는 세상이 눈부시다. 언제나 여정을 통해 가까이 있는 것들에 대한 소중함을 몸소 깨닫는 기회가 되며, 그래서 여행은 숨 가쁜 삶 가운데 부푼 기대의 심호흡이며, 스스로를 독려하는 거울이다. 건강한 나 자신이 대견하고, 폭풍 같은 세상에서 건재한 의지와 긍정에 감사하면서 더불어 묘한 희열로 잊고 지내던 자신감을 정립한다.

고요, 적막, 평온한 우포_20211025

석양이 남은 하루 시간을 태우는 시간에 맞춰 우포출렁다리에 다다라 쉴 틈 없던 여정에 잠시 쉼표를 찍는다. 간헐적으로 오가는 사람들과 간소한 눈인사를 주고 받으며 적막강산의 정체된 공허 속에서 희열과 여독으로 점철된 존재를 조용히 되짚어 본다. 가끔 낯선 사람들의 사소한 지나침이 반가울 때가 바로 이런 경우 아닐까? 상대 또한 그런 그리움의 만연으로 무심한 듯 주고 받는 목례에서도 감출 수 없는 반가운 미소와 함께 지나친 뒤에 그 행적을 돌아보며, 다시 마주친 시선의 매듭을 차마 풀고 싶어 하지 않는다. 좀 전까지 밭을 한가득 메우던 농부의 소리는 온데간데없고, 그들이 떠난 자리에는 여행자의 발자국 소리만 굴절된다. 가족들과 함께하는 여정이라 걷는 동선을 줄일 목적으로 꾸역꾸역 차를 몰고 출렁다리로 접근..

낙동강을 건너며_20211025

무척이나 한적한 황강을 지나고 낙동강변길을 달리며 잠시 한숨 돌리기 위해 합천창녕보에 멈췄다. 땀을 훔치기 위해 쉬던 한 무리 자전거 동호회 무리가 아니라면 온전히 공백 상태인 전망대에 올라 주변 경관을 구경하고 싶었지만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해 출입은 금지 상태. 찬물에 손을 씻고 주차된 차로 가던 도중 주차장 바닥에 뭔가 보였다. 저게 뭐지? 하고 가까이 다가가자 어린 뱀 하나가 아스팔트 포장된 주차장 한가운데 일광욕 중이시다. 아마 개발로 인한 보금자리 변화 때문이 아닐까? 독이 없는 아주 어린 뱀 같은데 가까이 다가가자 걸음아, 날 살려줍쇼 그러는 것처럼 황급히 도망간다. 너무 어린 녀석이라 불쌍한 마음에 더 이상 쫓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뱀을 돌 같이 볼 수 없어 옮겨 주지는 못했다. 합천에서 낙동..

갈대의 물결, 황강_20211025

나른한 여느 시골 마을에 움츠리고 있던 갈대 천국을 만난다. 이런 여행에서 알려지지 않은 나만의 명소를 찾는 성취감은 명소와 다른, 아니 그 이상의 만족이란 선물로 보상받으며, 여정의 힘이 되어준다. 무심코 인간에게 밟히는 갈대 명소와 달리 자유에 몸부림치는 이곳 갈대의 행복한 춤사위는 명소의 정갈한 멋보다 오지의 원초적인 안락에 가깝다. 때론 개발과 가공이라는 미명하에 파괴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넘나드는 인간본위로 강요당한 희생은 본능의 재간에 지켜진 아름다움에 거슬릴 때가 있다. 황강(黃江)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ncykorea.aks.ac.kr 강변이 갈대 천지다. 이렇게 쉴 새 없이 광활한 갈대밭도 오랜만이라 숨겨진 갈대 천국이라 할만하다. 내 이름은 도둑가시. 눈에 보이는 모습이 전부고 그 이..

적중과 초계의 둥지, 초계 분지_20211025

산이 에워싼 분지 지형은 많지만 이렇게 동그랗게 모양을 갖춘 곳은 얼마 있을까? 우연히 위성 지도를 보다 그 특이한 형세에 시선을 빼앗겨 언젠가 찾으리라 다짐했고, 바로 그 숙원을 해결할 기회로 뻥 좀 보태면 우포에서 엎어지면 코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라 지체 없이 달려갔다. 지구가 뜨거웠던 시절, 아마도 거대한 분화구의 흔적이 아닐까 근거 없이 추론해 보는데 철원오대미가 유명한 이유 또한 거대 칼데라의 흔적으로 인해 무척이나 기름진 토양을 하늘로부터 선물 받은 만큼 이곳도 아니나 다를까 무르익은 벼의 황금물결이 파도친다. 전국을 다니며 눈을 현혹하는 곳이 참 많은데 여긴 호기심을 현혹시킨 곳이라 내 기어이 햅쌀이 나오는 시기를 맞춰 밥도 맛보고, 도보 여행도 하리라. 초계 분지 - 위키백과, 우리 모두..

포근한 적막, 우포생태촌_20211024

무거운 적막은 내게 있어 평온이요, 이따금 허공을 가르는 차량의 질주는 낯선 길을 함께 하는 친구 같다. 가느다란 불빛 한 줄기조차 없는 생태공원의 암흑 속에서도 생명의 미묘한 파동은 도시에서의 위협적인 곁가지와 달리 미약한 등불 마냥 냉혹한 계절과 문명의 역습에 움츠러 신음하는 마지막 희망의 몸부림이다. 생태촌 앞에서 나지막한 냥이 울음소리에 반사적으로 다가서 한 움큼 밥을 내밀자 어린 냥 둘이 다가와 허기와 경계 사이에서 잠시 갈등을 하더니 결국 생존의 본능에 어쩔 도리 없이 발치 앞에서 다급히 식사한다. 동이 트고 세상의 역동이 눈을 뜨자 햇살이 부서지는 대지가 삶을 노래하는 곳, 우포에서 가을바람에 이끌린다. 합천에서 늑장을 부리는 바람에 대구에서 큰누님을 모셔드릴 겸 죽전 부근 일식집에서 식사를..

냥이_20211010

잠에서 깨어 녀석을 쳐다보자 벌써 일어나 기다렸다는 듯 부동의 자세로 빤히 쳐다본다. 배는 고픈데 일어나길 기다렸다 눈을 뜨면 다가와 '아옹'거리는 녀석이 이번엔 다른 가족들이 보이지 않아 조금은 무기력한 모습이다. 얼른 녀석 아침을 챙겨주고 외출하려니 녀석이 다시 불쌍한 표정을 짓는다. 가만히 누워 일어나길 기다렸나 보다. 눈을 뜨자 바로 이런 표정과 자세로 한참 굳어있었다. 아침을 챙기고 외출 준비를 끝내고 나가려는 찰나, 녀석의 표정은 온통 불쌍불쌍하다. 하루 일과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와 집안 정리를 끝내자 녀석이 찰떡같이 달라붙었다. 얼추 집안 정리가 끝나고 잠깐 휴식을 이용해 녀석과 같이 음악을 듣고, 다시 학업에 몰두하려던 찰나 다시 찰떡이 달라붙었다. 불쌍한 마음에 무릎을 내어줬지만 염치도 ..

봉화를 떠나며_20211004

전날 숙취를 간신히 잠재우고 봉화읍에서 거나한 점심을 챙겨 먹은 뒤 커피 한 잔을 끝으로 각자 흩어졌다. 점심으로 낙점된 송이전골을 먹은 뒤 찌는 듯한 더위를 뚫고 이디아 커피로 향하며, 오래된 건물과 정갈한 간판이 절묘하게 조합된 상가를 지나게 되는데 약국보다 고풍스러운 약방에 시선이 멈췄다. 아직은 완전히 여물지 않은 가을 벌판 한가운데 힘겹게 자리를 지키는 허수아비도 조만간 춤사위를 펼칠 수 있겠다. 멀리 백두대간의 숭고한 바람을 타고 황금 물결이 출렁이면 지난한 고독의 병마도 성숙한 가을의 포용 앞에선 잠잠해지겠지? 먼 길 나서기 전, 가을 벌판을 무심히 바라보는 사이 무겁던 마음에도 가을 바람이 일렁인다.

자연이 숨겨둔 관창폭포_20211003

마지막 여정은 선유도와 가까운 관창폭포로 자연이 예리한 칼로 거대 바위를 수직으로 자른 뒤 모서리에 작은 틈을 만들어 물길을 틔어 놓았다. 자연이 취할 수 있는 거대 전위 예술이라 해도 자로 잰 듯 어떻게 이리 정교한 형태가 나올 수 있을까? 근래 공원을 조성하면서 인공 폭포를 만들어 놓은 지자체 몇 군데가 있는데 이 또한 인공 폭포라 착각될 만큼 폭포 주위를 둘러싼 수직 바위는 자연의 작품이라 쳐도 모서리 틈에 물이 쏟아져 내리고 거기에 한 술 더 떠서 폭포를 감싼 수직 바위가 언뜻 폭포의 형체를 은폐시켜 놓았다. 바로 앞에 서서 폭포를 목격하지 않는다면 웬만큼 가까운 거리에서도 우렁찬 폭포 소리만 날 뿐 여간해서는 폭포를 직접적으로 목격할 수 없다. 두 번째 만나는 폭포라 그 사이 낯익어 어찌나 반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