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에 대한 넋두리

선명한 가을과 추억이 웅크리고 있는 곳, 상동_20191023

사려울 2019. 11. 5. 21:06

여행의 출발은 늘 솜털처럼 가볍고, 아이처럼 설렌다.

영월 시장에서 나름 유명한 닭강정 하나를 옆에 낀 채 차창을 열고 매끈하게 뻗어 있는 88 지방도를 질주하자 가을 대기가 한꺼번에 밀려 들어와 그간의 시름을 잊게 해 준다.

이 도로를 질주할 때마다 기분이 좋아지는건 도로 뿐만 아니라 남한강을 따라 곧게 펼쳐진 큰 계곡이 트여 있는데다 대부분 여행의 첫 걸음이자 길목이기 때문이다.





골짜기를 따라 번져가는 봄 풍경이 매력적이라 올 봄에도 가던 길을 잠시 멈추고, 같은 자리에서 주위를 둘러보며 감탄한 적이 있었건만 막상 사진에서는 웅장한 느낌이 없어지네?

(숨겨진 아름다움, 영월 만경사 가는 길_20190422)






다시 가던 길을 출발하여 고씨동굴을 지나면서 이내 골짜기 폭과 차로가 줄어들면서 계속되는 곡선길이 이어졌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리 하나를 건너자마자 거울처럼 잔잔한 수면의 강과 맞닿은 절벽이 반영되는 풍경이 눈에 들어와 차를 멈추고 강으로 내려가자 2명의 강태공이 미동도 하지 않은 채 강을 주시했다.

강 언덕에 화사한 꽃밭은 어느 누굴 기다리는 양 한무리 화사한 꽃을 피워 하늘로 향하고, 물들어 가는 가을은 절벽에 듬성듬성 피어 있는 생명에 가을색을 입혀 놓았는데 지극히 평화로운 가을 풍경 같아서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이후 늘 들리던 솔고개 마저 지나쳐 상동까지 쉼 없이 달려 왔고, 상동 초입에 잠시 멈춰 가로수를 물들이기 시작하는 가을색과 더불어 이따금 부는 바람을 따라 우수수 떨어져 잠시 날리는 낙엽을 바라봤다.

상동은 벚꽃이 질 무렵에 여전히 꽃망울조차 틔지 않을 만큼 봄이 늦어 덕분에 뒤늦은 봄꽃 구경을 조용하고 편하게 했지만 역으로 가을은 서둘러 찾아와 이미 벚나무 잎사귀를 짙게 물들이거나 바람으로 세차게 흔들어 떨구었다.

베리골 교차로에서 본 큰 골짜기와 달리 상동은 길을 중심으로 협곡 같은 느낌이 강한데 가파른 산세가 도로 양옆으로 펼쳐져 있고, 백두대간의 깊은 마을 답게 큰 산들이 성벽처럼 애워싸고 있다.





상동의 얼굴 마담격인 꼴두바위에 첫 여정의 쉼표를 찍기 위해 차를 세워 놓고 공원으로 진입하자 한 곁에서 쉬고 있던 까만 냐옹이 한 마리가 걸음아 날 살려라 도망 간다.

난 냐옹이 휴식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는데 내가 무섭게 생겼나봐.

고프로와 카메라를 들고 이리 저리 들이 밀며 초입의 나무 계단을 차근차근 밟고 올라 가는데 화단으로 은신해 있던 이 녀석은 다시 걸음아 날 살려줍쇼 하고 소방서 쪽 주차장으로 도망가 그제서야 궁뎅이를 바닥에 깔고 그루밍한다.

꼴두바위의 매력적인 가을 전경 앞에 냐옹이는 참으로 어울리는 조합이었다.

바위 언덕을 둘러싼 가을이 유독 다른 주위 풍경보다 더욱 계절색이 어울려 앞으로 갈 길은 멀지만 충분히 즐기지 않으면 뒷통수에 후회가 따라 올 것 같아 영월에서 공수해 온 닭강정을 주전부리 삼아 느긋하게 둘러 봤다.

이런 은둔하고 있는 가을의 매력으로 인해 상동에 몇 차례 왔었는데 쉬어가는 바람처럼 계절도 상동에서 머물며 앞으로 가야될 먼 길에 앞서 잠시 숨고르고 있는 형세 같다.

(사라진 탄광마을, 상동_20150912, 상동_20170916, 숨겨진 아름다움, 영월 상동 가는 길_20190422)



공원 초입 화단은 여러 가을 정취를 한데 꾸려 놓은 선물세트처럼 각양각색으로 물든 나무와 낙엽이 함께 정지된 시간처럼 정갈히 꾸며져 있는데 마치 낙엽 하나, 풀 한 포기조차 심혈을 기울여 배치해 놓은 것 마냥 조화로움이 압도적이었다.






광산으로 이어지는 오르막길 옆이자 꼴두바위 아래 공공화장실은 여전히 텅빈 채 사람이 다녀간 흔적이 얼마만 인가 싶을 만큼 휑하다.

화장실 옆 화단은 그런 메마른 공간을 다독이듯 여러 종의 나무들이 빼곡히 자라는데 이 또한 배후의 꼴두바위와 어울려 한껏 가을 매력을 뽐낸다.

어린 전나무 몇 그루는 점점 퇴색의 과정을 밟으며 동면을 준비하는데 푸르기만 한 전나무의 자태가 가장 아름다운 시기가 바로 요맘 때가 아닌가 싶을 만큼 뿌리와 가까운 가지부터 서서히 퇴색되어 가는 이 무렵 두 가지 색이 공존하는 이 조합은 소나무와 다른 전나무의 매력이 아닐까?

봄은 낮은 곳부터 서서히 높은 곳, 북쪽으로 이동한다면 가을은 높은 곳, 북쪽에서 부터 서서히 낮은 곳, 남쪽으로 이동하며 강산을 물들이는데 고지대와 저지대가 만나는 이런 골짜기 마을은 계절의 변화를 입체적이고 동시다발적으로 감상할 수 있는데다 깊은 산중에 자리잡고 오래된 시간과 현재의 시간을 함께 품은 상동이기에 어쩌면 계절이 더욱 아름답고, 그래서 선명한 추억도 더 아득하게 느껴졌다.

내가 상동에 자주 오는 건 상동에 연고나 친지가 있는 건 아닌데, 그럼에도 마음이 새겨둔 시간의 흔적들이 너무도 선명하고 개발의 물결에 휩쓸려 쉽게 부스러지지 않기 때문이다.

상동을 여행의 출발로 이제 다음 추억과 가을을 만나러 떠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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