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날 태백에서 봉화 현동을 거쳐 통고산으로 오던 길은 뜬금 없는 비가 퍼부어 산간지대의 변화무쌍한 날씨를 실감케 했고, 짙은 밤이 만연한 오지 답게 도로는 지나가는 차량 조차 거의 끊긴 상태였다.
아무리 그렇더라도 밤의 정점이 아닌 21시도 되지 않은 시각이었지만 태백을 벗어나는 순간부터 함께 도로를 질주하던 차들이 어디론가 사라져 음악에 집중하느라 속도 게이지가 한창 떨어진 것조차 인지하지 못한 채 고독한 밤길에 생명의 흔적들이 거의 없었다.
통고산 휴양림에 도착하여 가장 깊은 곳에 위치한 통나무집으로 들어가 싸늘한 방을 잠시 데우는 사이 기억에서 잠시 지워졌던 소리가 사방에 가득했다.
바로 통나무집 앞을 흐르는 여울 소리.
2015년 만추 당시 이용했던 통나무집 바로 옆이긴 해도 3채가 적당한 거리를 두고 나란히 여울가에 자리를 잡고 있는데 그 때와 달라진 점이라면 당시 낡은 통나무집으로 기억이 선한데 이제는 새로이 단장을 하여 내부는 상당히 깔끔하고 특히나 일찍 싸늘해지는 산골로 인해 우풍이 심했던 것과 달리 난방을 강하게 틀지 않아도 내부는 훈훈했다.
작년에 이어 비슷한 시기에 통고산을 찾은 건 강렬한 첫 인상과 그에 못지 않은 깊게 새겨진 추억 때문인데 그리 길지 않지만 2년 동안 오지 여행을 하면서 스치듯 유혹하는 가을 풍경의 매력적인 자태와 그 매력의 향연 속에 새겨 놓은 시간이 이 자리에 서면 급격히 빨려드는 행복감의 잔상이 아닐런지.
(불영 가을 습격 사건_20141101, 통고산에서 삼척까지_20151105, 설 익은 가을을 떠나며_20161016, 다시 찾은 통고산의 가을_20181026)
차량이 통행할 수 있는 가장 깊은 곳은 숙소에서 그리 멀지 않았고, 자연의 이치처럼 가장 깊고 높은 곳에서 시작되는 가을이 점차 길을 따라 낮은 곳으로 전이 되어 이 곳을 반환하여 가을이 흘러가는 방향대로 기억과 사진을 되짚어 나갔다.
올 가을은 예년에 비해 늑장인 게 작년과 비슷한 시기에 왔음에도 가을색은 눈에 띄게 설익었다.
한 두 방울씩 떨어지기 시작하는 빗방울, 2015년 가을을 제외하고 나머지 공통점이라면 비가 빠지지 않고 내렸다.
활동하기엔 내리는 비가 걸림돌이긴 하지만 어차피 장맛비가 아닌 이상 적당한 비는 조금의 푸념을 내뱉긴 해도 사진으로 담는 것과 아름다운 가을 빛깔에 양념과도 같은 촉매제다.
거기에 더해 반복되어 온 추억을 재현하고 회상하기에도 이제는 가을과 더불어 가장 중요한 재료가 되어 버렸다.
차를 타고 내려가면서 번번히 시선을 강탈당하는 탓에 자연 앞으로 진행하는 속도는 더디고 차에서 금새 내렸다 타는 일이 반복되다 보니 아예 시동도 끄지 않은 채 가다 서다를 반복했다.
예년까지만 해도 여울에 무성한 가지를 늘어뜨린 휴양관 앞 야영장의 가을 풍경이 백미 였다면 올해는 공사로 인해 제1야영장 가을색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무성하고 거대한 나무와 거기에 맞게 오색찬란한 가을색이 물든데다 가까이 다가가 자세히 들여다 보면 마치 꽃잎인 양 깔끔하고 균일하게 계절 옷을 입었다.
제1야영장 맞은편엔 조금 더 실내가 넓은 통나무집 3채가 자리잡고 있는데 2015년 머물렀던 당시 좀 더 깊은 계곡에 있던 통나무집이 낡았던데 반해 여긴 시간의 흔적이 그리 오래되지 않아 아늑하게 머물렀던 기억이 난다.
먼저 도착했던 일행이 실내를 데워 놓고 기다렸는데 그 훈훈한 실내 온기가 난방을 꺼도 꽤 오래 남아 있던 기억에 비추어 단순히 전기 패널로 의존하지 않는 시설 같았다.
또한 복층 구조라 천장도 높아 내부에 있는 동안 갑갑하다는 느낌도 전혀 없어 술 한 잔 기울이며 무슨 할 말이 그리 많았는지 늦은 밤까지 잔잔한 음악을 배경으로 이야기를 나눴다.
초입 안내소가 가까워졌음에도 여전히 가다 서다를 반복하며 카메라로 쉴 새 없이 담을 수 밖에 없었던 건 온전히 가을이 뿌려 놓은 빛깔들에 매료되어 다른 잡념이나 행동은 절대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한 자리에 서서 매혹적인 빛에 발이 묶이지만 다른 쪽으로 시선을 돌리다 보면 다시 거기에 시선이 묶여 버리길 반복한다.
그럼에도 전혀 귀찮거나 싫지 않은데다 넋이 나간 사람처럼 시신경을 극도로 긴장시켜 전진하는 사이 내 불찰로 렌즈에 가느다란 빗방울 자국이 찍히기도 했고, 사진 몇 장을 담고 나면 이내 렌즈 캡을 씌워야 하지만 그걸 잊고 한 손에 잡은 채 나중에 렌즈 캡을 제거한답시고 손과 닿아 얼룩이 남기도 했다.
허나 사진보다 중요한 건 현재 내 오감에 충실한 거라 그리 안타깝지 않았다.
통고산 휴양림 초입에서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명소이자 이 공간을 통틀어 가장 멋진 사진을 담을 수 있는 장소가 바로 단풍나무가 무성한 터널인데 가장 안쪽과 달리 여긴 지대가 좀 더 낮아서 그런지 단풍의 신록이 가득하고, 게다가 무성한 가지가 축 늘어져 있어 풍성하게 보이던 것과 달라진 걸 보면 차량 통행을 위해서 가지치기를 해버린 것 같다.
허나 휴양림이란 게 원시적이고 풍성한 나무의 보고인 만큼 지나다닐 때 조금 번거롭고 불편하더라도 지나치게 가공하지 않길 바랬다.
우리가 흔히 매료되는 계절은 결국 자연이 고스란히 보존될 수록 더욱 감동을 받게 되고, 그 감동을 위해 먼 길 마다 않고 명소를 찾게 되는 거니까.
무성한 나무들이 만든 터널, 바닥에 자욱히 덮여 있는 낙엽, 비가 내려 한층 우수에 찬 전경과 더불어 어디선가 발원했는지 모를 가을 짙은 내음으로 인해 이제 출발하는 길이지만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착각마저 들었다.
가을의 매력이란 게 장소에 따라 모두 다르겠지만 한 자리에서 펼쳐지는 향연 또한 느낄 수 있는 게 첩첩이 쌓여 있어 설레이는 마음에 못이겨 스스로에게 속박을 씌우고 싶지 않았고, 이렇게 멋진 장소에, 이렇게 값진 여유는 계절과 만나 행복의 파도가 출렁이는 상상의 바다를 가슴에 담고 있는 풍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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