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사의 마법이 발휘된 걸까?
목화솜 같은 함박눈이 내려 순식간에 하얀 세상이 펼쳐져 겨울의 집착적인 미련을 실감케 했다.
서둘러 사람들이 떠나 세상은 텅 빈 듯 눈처럼 쌓인 적막과 두터운 눈구름처럼 정적만 휩싸고 돌며, 그로 인해 바람 소리가 지축을 흔드는 번개 소리 마냥 대기를 가득 채웠다.
당초 함백산에 오를 계획은 없었지만 만항재로 가는 텅 빈 도로에 차를 세워 두고 그칠 줄 모르는 눈발을 향해 걷다 결국 함백산을 올랐다.
2015년 초겨울, 우연찮게 함백산 초입에 방문했다 순식간에 퍼붓는 함박눈이 만든 설원을 행보했던 추억을 더듬어 같은 자리에 방문하자 굵어진 눈발을 등지고 산에서 하산한 한 분께 산길에 대한 정보를 들었다.
아이젠이나 스틱 중 하나는 꼭 챙기란 당부에 감사의 말씀을 전달드리고 두 갈래 길 중 오롯이 산길로 조성된 길을 선택하여 터벅터벅 정상으로 향했다.
초입부터 어느 정도까지는 길이 순탄해서 스틱이 짐짝처럼 여겨졌다.
허나 굵직한 눈발과 하얀 설원을 걸으며 이내 잊어버리고 봄의 정점에서 퍼붓는 눈의 이색적인 경험에 도치되어 버렸다.
정상으로 향하는 길에 하산하는 분들을 마주쳤지만 그분들은 서둘러 눈을 피하는 모습에서 오전 일찍 함백산에 올랐다 예상치 못한 눈의 습격에 바삐 하산하는 것과 달리 난 반대라 상대적으로 여유 있는 발걸음으로 한 발짝씩 내디뎠다.
눈밭에 발자국이 생각보다 많은 걸 보면 함백산은 태백 일대에서 여전히 존경받는 명산이기 때문일 게다.
눈발은 점점 굵어져 이내 주변은 화사한 눈꽃이 만발하였고, 사진과 달리 내리는 눈이 많아 시야는 생각보다 제한적이었다.
겨울에나 볼 수 있는 새하얀 설원에 연신 감탄사와 함께 걷는 걸음은 평소와 달리 느긋했다.
계절을 잊은 풍경에 평온이 덧씌워져 있는데 이걸 허투루 하게 지나친다면 아니한 것만 못한 데다 후회는 두고두고 기억 속에 각인되어 강렬한 미련을 떨칠 수 없을 것 같았다.
여기서부터 완만하던 오르막길은 급격한 경사의 좁은 길로 바뀌며 바닥은 돌계단을 딛는 것처럼 돌을 딛고 오르는 길이라 내딛는 걸음마다 신중을 기해야만 했다.
평소 길과 달리 눈이 자욱이 덮인 돌은 무척 미끄럽고 행여 잘못 미끄러지면 가파른 경사에 사고 위험이 다분했다.
눈이 두텁게 덮인 나무는 힘겹게 그 무게를 지탱하는 듯 보여 이따금씩 견디지 못한 눈 뭉치들이 바닥으로 푸석푸석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2015년 당시에 비한다면 상대적으로 폭설의 강도가 약하고 기온도 얇은 패딩 하나에 덧입은 방수바람막이 재킷으로 충분했지만 얼굴을 가린 버프는 벌써부터 젖어 호흡에 방해가 되었다.
하긴 2015년에는 영하 10도 아래로 떨어져 카메라는 먹통이 되고, 아이폰은 그 충격으로 배터리 게이지가 춤을 췄었지?
눈에 자욱이 덮인 돌계단을 밟으며 힘겹게 오르다 문득 뒤를 돌아보자 하얀 세상이 까마득한 심연의 깊이처럼 느껴져 앞만 보고 발길을 뻗었다.
얼추 정상과 가까워질 무렵부터 위험하던 돌무더기 경사길은 완만해지고 너른 길로 바뀌면서 걷기 수월해져 더불어 가쁜 숨도 평안을 찾았다.
정상을 바로 눈앞에 두면서 안갯속을 걷는 것과 같은 심기도 누그러져 다시 주변을 찬찬히 둘러볼 여유를 찾았다.
정상과 가까워질수록 어느새 바람은 미친 듯 불어대며 덩달아 눈발도 세찬 바람에 수직에서 수평의 궤적을 그리고 있었는데 심지어 산을 자욱이 덮고 있는 구름의 결까지 바삐 흘러가는 게 육안으로 식별 가능했다.
태백 일대에서 가장 높은 함백산을 오를 줄이야.
물론 차량을 세워둔 곳이 워낙 지대가 높아 실제 오른 고도는 얼마 되지 않지만 어쨌거나 수치상 높이에 정신 승리하며 혼자서 감개무량 중이었다.
무사히 정상 가까이 오른 안도로 뒤를 다시 돌아보자 구름으로 인해 세상은 완전히 차단된 상태였다.
함백산 표지석을 거쳐 봉우리로 연결되는데 완만하다고 생각된 길도 다시 돌아보면 그리 완만한 길은 아니었으나 발목까지 패이는 눈밭은 얼거나 짓눌리지 않아 그나마 덜 미끄러웠고, 산을 향해 출발하게 되면 늘 정상을 밟는데 대해 회의적이었다.
'정상을 힘겹게 오른데 비해 무슨 심적 보상을 받을 수 있을까?'
해발 1,572m의 함백산이 우리나라에서 6번째 높은 산이라고?
날이 좋아 주변 다른 산봉우리들과 나란히 서 있다면 실감이 날 법도 하지만 구름에 덮여 다른 산은 고사하고 심지어 산 아래 조금만 떨어져 있어도 전혀 보이질 않으니 해발고도를 보지 않은 상태에서는 실감 나지 않았다.
표지석 위에 사선으로 날리는 눈 좀 보소!
정상 바로 아래.
눈보라의 위력은 실로 대단했다.
드러난 돌 위는 눈이 앉기 무섭게 세찬 바람으로 먼지처럼 흩날려 도리어 오르는 길에 두텁게 쌓인 눈에 비한다면 폭설 수준을 가늠하기 힘들었다.
이건 의외로 괜찮은데?
온통 하얀 세상에 정상이라도 선명하면 형체를 알아볼 수 있으니까.
다행히 평소 트레킹 정도만 즐기다 우연찮게 등산이 되어 버렸고, 중력을 거스르는 대가는 정상을 밟았을 때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지상에서 보면 자욱한 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는 상공이 짙은 안개처럼 보이며, 한 치 앞과 높이도 예측할 수 없건만 함백산 정상이라는 위안이 덧칠해져 사소한 돌 하나도 대견하게 포장되어 보인다.
상대적으로 따지기 민망하지만 지금까지 내가 오른 가장 높은 고도가 바로 이곳 아닌가.
정상이다!
정상을 서성이고 있는데 한 사람이 올라오는 게 어렴풋이 보였다.
뒤늦게 알아차린 사실로 내가 출발할 시각에 비슷한 타이밍으로 먼저 정상을 향해 출발했던 분 아닌가?
어느 경로로 오는 걸까?
근데 그분은 익숙한 듯 정상에 올라 잠시 머무는가 싶더니 이내 하산길로 접어들었다.
나와 달리 헤매는 눈빛이 아니라 마치 눈 감고도 속속들이 산을 꿰고 있는 분 같았다.
잠시지만 텅 빈 공간에서 사람을 만난다는 게 일말의 반가움이 생길 줄이야.
정상 표지석과 그 뒤 돌탑을 뒤돌아 가면 함백산 시야에 따라 늘어선 백두대간 안내도가 버티고 앉아 말없이 눈을 맞고 있었다.
워낙 세찬 바람이 불어 내리는 눈이 버티지 못하고 다시 휘날려 어딘가로 사라지는 바람에 돌은 얇은 상고대 정도만 남았다.
강한 바람이 불고 있다는 건 이 사진으로 얼핏 유추 가능하다.
돌출되어 드러난 부분은 폭설의 영향을 받지 않고, 워낙 강한 바람에 눈이 쌓일 틈 없이 내려앉기 무섭게 다시 어디론가 바삐 날아가 버렸다.
메고 간 카메라는 렌즈 캡을 열 엄두는 못 내고, 그나마 날은 그리 춥지 않아 아이폰으로 사진을, 고프로로 동영상을 촬영했는데 고프로는 워낙 불안정이 문제라 찍힌 동영상도 날려 버리거나 혼자 복구 중이라는 메시지가 뜨면서 계속해서 꺼졌다 켜지기를 반복하길래 걍 아이폰 하나로 해결해 버렸다.
역시 함백산 정상은 고도가 상대적으로 낮은 지역에 비해 한기가 강해 봉우리로 올라오는 과정에서 라이트 패딩 내에 쌓인 땀이 한기를 느끼게 하는 바람에 오래 머무를 수 없었다.
앞서 함백산 초입과 정상에서 만났던 분이 내려간 길을 따라가면 초입의 두 갈래길 중 포장된 길로 내려갈 수 있어 그 방향을 결정하고 짧은 함백산 봉우리에서의 시간을 마무리했다.
함백산 정상 바로 아래엔 눈꽃만큼 풍성하지 않지만 마치 인체 혈관을 모형화시킨 것 같은 가지와 거기에 촘촘히 달라붙은 상고대가 세상을 온통 물들였다.
하나를 따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급작스럽게 만들어진 눈꽃이 아닌 비교적 오랜 시간 동안 습기가 서로 엉겨 붙어 만들어져 겹겹이 미세한 시간의 경계가 보였고, 또한 눈꽃처럼 뽀얗지만 얼음처럼 단단하여 아무리 힘찬 산바람이 흔들어 대더라도 아랑곳 않는 그들만의 결속력이 질감으로 응축되어 있었다.
눈꽃만큼 이쁘면서 눈꽃보다 더욱 오래 화사한 빛과 원형을 유지한 상고대는 높은 산이 많은 태백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자연의 작품이다.
정상에서 조금만 내려오면 헬기장이란 간판이 보이는데 그 가르침이 무색하게 온통 두터운 눈이 쌓여 제대로 된 겨울왕국을 실감케 했다.
게다가 조금 내려왔다고 바람 또한 조금 잦아들었는데 여기저기서 날린 눈발이 헬기장에 와서 머무를 생각을 했는지 다른 곳보다 좀 더 두터운 눈으로 발목보다 좀 더 깊이 발을 집어삼켰다.
이미 신발과 양말은 젖은 느낌이 들었음에도 그걸 잊고 마치 내리는 눈이 반가운 아이 마냥 신나게 밟는 그 기분, 아마 봄이라는 계절이 압축된 기분을 풀어 신기한 기분이 끌어낸 흥분을 증폭시킨 게 아닐까?
여긴 발목을 지나 종아리 반 정도 깊이까지 눈이 쌓여 있어 혹시나 스틱을 꽂았더니 그게 고정이 되어 꽃꽂이 서 있다.
이참에 하얀 눈을 화폭 삼아-노래 가삿말 같은데?- 코로나19에게 고하노니,
코로나 19야, 제발 좀 꺼져 줄래?
하얀 설원에 묵묵히 서 있는 고목의 운치, 여전히 산 아래는 구름에 휩싸여 볼 수 없었지만 그래도 이런 광경을 보는 것만으로 굳이 세상을 보려 하는 것보다 잠시 단절된 것도 나쁘지 않았다.
멋진 상고대와 눈꽃들.
헬기장에서부터 함백산 초입까지는 포장된 길이라 앞서 산길로 오를 때보다 걷는데 부담은 없었고, 흉물스러운 포장길의 아스팔트나 콘크리트 또한 두터운 눈이 쌓여 굳이 볼 일 없어 봄철에 만난 겨울왕국에서의 몰입감은 극에 달했다.
얼마나 눈이 퍼부었으면 몇 가닥 꼬인 가지 사이에 눈이 서로 뭉쳐졌을까?
정상에 비해 바람이 잦아든 대신 내리는 눈송이는 큼지막하여 심지어 엄지손가락 마디보다 더 큰 게 내리기까지 하며, 그런 뭉치 또한 꽤나 많이 섞여 애써 찾으려 하지 않아도 허공에서 쉽게 목격할 수 있었다.
화사하고 뽀송뽀송한 질감의 눈꽃이 뒤늦은 봄에 세상을 지배했고, 그 세상을 관통하며 산책한-등산이라고 하기엔 좀 민망할 정도로 편했으니- 기분은 처음의 우려와 달리 이제는 환희로 보상받고 있었다.
차가 주차된 장소에 다다라 그간 잊고 있었던 몸에 쌓인 눈과 땀, 눈이 녹아 스며든 물기를 잠시나마 털어 낼 수 있었는데 그 기분이 불쾌함은 전혀 없고 도리어 하나의 숙원을 마무리한 갈증의 해갈과도 같아 눈길을 주행하게 될 걱정은 아직도 찾지 못했다.
비교적 눈이 적게 내린 건지 차 위에 쌓인 눈도 이 정도면 양호한데 이마저 차를 달리자 그 자리에 남겠노라 눈이 우수수 떨어지며 크게 손이 가는 부분은 없었다.
이로써 망설였던 함백산으로의 산책을 마무리하고 주저했던 다음 여정인 검룡소에 의혹을 털어내고 당당히 그 길로 떠났다.
봄의 정점에서 우연히 만난 겨울의 표상 같던 눈.
세찬 눈보라로 인해 모든 발자국이 사라지고, 내 발자국 또한 이내 사라지겠지만, 기억의 토양 위에 새겨진 시간은 삶이 다하는 날까지 각인된 채 남겨지겠지?
어느 척도로 잣대를 들이댈 수 없는 나만의 희열로 승화되어 끊임없이 움직이고, 고뇌하는 원동력이 될 줄, 뒤늦었지만 이제라도 그 발자취를 허투루 하게 여기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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