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천 20

장례식장_20240503

2019년 만추에 뒤늦게 상봉한 외삼촌은 결국 별이 되었다.유난히 뜨거운 봄의 끝자락에서 이제 인연의 횃불 하나가 꺼져 뜨거운 날씨와 달리 마음 한구석은 싸늘했다.인간은 결국 헤어질 수 밖에 없다는 비탄이 제법 묵직하게 가슴을 먹먹하게 하던 날.장례식장 앞에 멋진 생태늪도 이렇게 슬픈 가슴을 달랠 수 없었다.점점 소멸해가는 시골에서 옛정취를 끝까지 부여잡은 징표.지독한 외로움에 공중전화 부스엔 뽀얀 먼지가 채색되었다.마지막 떠나는 길에 가슴으로 남긴 한 마디.'외삼촌, 부디 편히 잠드소서'

친근한 녀석들과의 저녁 만찬, 오도산 휴양림_20220502

숙소에 들어와 모두 일사불란한 움직임으로 저녁을 준비하는데 어렴풋 꼬물이 하나가 보여 불렀더니 정말 다가왔다. 비교적 어린 냥이라 당장 줄 건 없지만 녀석은 내가 그리 적대적이지 않은 걸 눈치채곤 발코니 쪽으로 사라졌다. 여긴 종종 냥이들을 만날 수 있는데 이번엔 내 차가 아니라 밥이 하나도 없었지만 나 또한 눈치를 챘다. 휴양림 투숙객들이 하나둘 던져주는 고기 맛을 알고 있는 녀석들이라 아니나 다를까 회전불판에서 고기 내음이 뿜어져 나오자 발코니에 모여들어 냥냥송을 합창했다. 울가족들은 코코 이후로 전부 냥이들에 대해 호의적이고 측은해하는 편이라 하는 수 없이 고기 몇 점을 잘라 녀석들과 틈틈이 나눠 먹는 사이 밤은 깊어갔다. 숙소 출입구 앞에서 까만 무언가를 보고 혹시나 싶어 부르자 그 소리에 달려온..

거대한 핑크빛 출렁임, 합천 황매산_20220502

꽃이라고 해서 꼭 향기에만 취하는 건 아니다. 가슴속에 어렴풋 그려진 꽃이 시선을 통해 굴절된 꽃을 통해 꽃망울 필 때면 잠깐의 화려한 향이 아닌 가늠할 수 없는 시간을 관통하여 끝끝내 취한 나머지 행복의 추억에 가슴 찡한 향을 터트린다. 때론 선명한 실체보다 아스라한 형체가 상상의 여울이 되어 흐를 때 비로소 그 기억을 품고 사는 내가 누구보다 아름다운 마음의 꽃밭에서 유유히 도치된다. 1년 전 황매산 행차할 때 코로나 백신 여파로 밤새 끙끙 앓았었는데 이번엔 그런 무게가 없어 한층 가벼웠고, 더불어 조카 녀석도 한 자리 차지해서 웃는 횟수도 많았다. 황매산은 경상남도 합천군 가회면·대병면과 산청군 차황면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해발 1,113m에 이르며, 준령마다 굽이쳐 뻗어나 있는 빼어난 기암괴석과 ..

갈대의 물결, 황강_20211025

나른한 여느 시골 마을에 움츠리고 있던 갈대 천국을 만난다. 이런 여행에서 알려지지 않은 나만의 명소를 찾는 성취감은 명소와 다른, 아니 그 이상의 만족이란 선물로 보상받으며, 여정의 힘이 되어준다. 무심코 인간에게 밟히는 갈대 명소와 달리 자유에 몸부림치는 이곳 갈대의 행복한 춤사위는 명소의 정갈한 멋보다 오지의 원초적인 안락에 가깝다. 때론 개발과 가공이라는 미명하에 파괴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넘나드는 인간본위로 강요당한 희생은 본능의 재간에 지켜진 아름다움에 거슬릴 때가 있다. 황강(黃江)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ncykorea.aks.ac.kr 강변이 갈대 천지다. 이렇게 쉴 새 없이 광활한 갈대밭도 오랜만이라 숨겨진 갈대 천국이라 할만하다. 내 이름은 도둑가시. 눈에 보이는 모습이 전부고 그 이..

적중과 초계의 둥지, 초계 분지_20211025

산이 에워싼 분지 지형은 많지만 이렇게 동그랗게 모양을 갖춘 곳은 얼마 있을까? 우연히 위성 지도를 보다 그 특이한 형세에 시선을 빼앗겨 언젠가 찾으리라 다짐했고, 바로 그 숙원을 해결할 기회로 뻥 좀 보태면 우포에서 엎어지면 코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라 지체 없이 달려갔다. 지구가 뜨거웠던 시절, 아마도 거대한 분화구의 흔적이 아닐까 근거 없이 추론해 보는데 철원오대미가 유명한 이유 또한 거대 칼데라의 흔적으로 인해 무척이나 기름진 토양을 하늘로부터 선물 받은 만큼 이곳도 아니나 다를까 무르익은 벼의 황금물결이 파도친다. 전국을 다니며 눈을 현혹하는 곳이 참 많은데 여긴 호기심을 현혹시킨 곳이라 내 기어이 햅쌀이 나오는 시기를 맞춰 밥도 맛보고, 도보 여행도 하리라. 초계 분지 - 위키백과, 우리 모두..

고원에 부는 세상 향기, 황매산_20210513

인간이 품어온 동경이 쉬어가는 곳, 철쭉이 질 무렵 뒤따라온 신록의 물결이 바람결에 출렁이며 자욱한 봄내음이 가슴까지 술렁인다. 봄이면 철쭉이, 가을이면 억새가 터줏대감이 되어 무던히도 여행자들을 설렌 이끌림에 마주치는 고원은 그 일몰 또한 아름답다. 갈망하던 은하수는 한 번도 만나지 못했지만 실망의 매듭이 풀릴세라 가슴을 현혹시켜 돌아갈 의지를 잊게 된다. 언덕으로 봉긋 솟아올라 다시 그 위에 닭벼슬처럼 첨예하게 자리 잡은 황매산 능선은 공존하는 두 세상이 다른 책임을 부여받은 마냥 시선으로 판별되는 질감이 대조적이다. 철쭉과 억새 군락지가 너른 고원에 사지를 펼쳐 드러누워 있다면 한 줄기 산자락은 그와 다른 생명들이 울타리를 치고 그들만의 영역을 만들어 지내는 형상으로 철쭉만 만났던 지금까지와 달리 ..

합천호반 녹색 터널_20210513

황매산으로 향하는 합천호반은 이런 한적한 길이 지치지 않고 스쳐갔다. 남도 지방의 봄은 확연히 포근해 햇살은 일찌감치 더위의 기운이 강했고, 따라서 짙어가는 신록의 그늘은 심미적인 부분을 넘어 청량감을 가져다줬다. 열어젖힌 차창 넘어 불어오는 봄바람의 계절 향기에 차를 멈추고 호수변에 서서 잔잔한 호수의 표면에 시선으로 물을 퉁기자 은은한 계절의 쨍한 색채가 여과 없이 밀려왔다. 가야할 길, 황매산마루에 남은 봄의 기대를 증폭시켜 다시 가던 길 재촉했다.

한적한 길과 옥계서원_20210513

한적한 정취에 더 나아가 연이은 봄빛 그득한 나무터널을 맞이하며 이다지도 걷고 싶은 충동을 자제하기란 쉽지 않다. 막연히 마주치는 나무의 이야기들, 길 위에 시간을 들으며 터널 속으로 걷다 보면 계절의 향취가 더해진 발걸음은 어느새 사뿐히 리듬을 타며 걷게 된다. 지난 만추에 지나던 구례 섬진강변길처럼 마냥 차분한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길이다. 불과 보름 전 쯤 황매산의 분홍 나래를 보고 무슨 미련에 다시 찾아올 수밖에 없었을까? 여전히 마주치는 차량과 인가가 거의 없는 길 따라 엑셀러레이터를 밟은 발에 힘을 빼서 물 흐르듯 천천히 달린다. 불과 보름 전 사진을 찍었던 곳은 예상대로 신록은 짙어지고 터널은 더욱 견고해졌다. 시간이 뒤섞여 있지만 나름 공통분모를 찾으라면 봄의 화두가 일치한다. 싱그러운 초..

황매산의 분홍 나래_20210428

하루 주어진 시간이 졸음에 힘겨워할 무렵 한참을 달려 황매산에 도착했다. 이미 차량 행렬은 수문을 빠져나가는 물길처럼 줄지어 하산하는 길이지만 다행히 낮은 머물러 떠날 채비는 늑장이었다. 가는 길에 특히나 시간이 걸렸던 건 헤아릴 수 없는 곡선의 휘어진 도로와 그 도로 양편 가로수 터널의 멋진 자태 덕분에 빠른 속도를 낼 수 없었던 데다 가는 중간중간 차를 세워 굳이 하차 하지 않더라도 나무터널을 사진과 가슴에 담고 싶었던 욕심이 과했기 때문이다. 이제 갓 피어난 신록으로 이런 무성한 점을 찍어 터널을 만들 정도면 녹음이 우거졌을 때는 어떻게 멋짐을 감당할까? 해는 이미 서산마루를 넘어 집으로 돌아가며 땅거미만 희뿌옇게 남겨 두고, 볼그레 얼굴 붉힌 무리들은 사라진 햇살이 그리워 지나는 바람의 옷깃을 부..

봄의 진중하고 경쾌한 발걸음, 해인사_20210428

해인사 가는 길에 함께 걷는 봄의 동행으로 말미암아 미소 짓고, 말미암아 감동한다. 천년 고찰이라는 엄숙한 무게감에 첫 발을 내딛는 기억도 잊고 어느새 봄의 친근한 조잘거림에 역시나 자연의 위대함을 느낀다. 나부끼는 연분홍, 새하얀 손짓에 이끌리다 보면 엄숙 했던 취지는 망각되고 주객은 전도되어 인위로 축조된 사찰은 욕망의 과대포장으로, 천년 시간을 거스른 나무는 진정한 경전이 된다. 봄인데도 벌써 나무 터널은 견고해진다. 보기 힘든 대나무 꽃이라고? 봄의 설렘을 녹색으로 표현한다면 이런 색깔과 모양일까? 왕벚꽃이 활짝 만개하여 연신 연분홍으로 감염시킨다. 아래 밭을 갈던 보살(?)의 구수한 훈수에 잠시 주변을 둘러볼 여유를 챙긴다. 바위에 걸터 앉은 철쭉 한 송이. 해인사로 향하는 길에 여러 사찰이 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