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 자연 그리고 만남

봄의 진중하고 경쾌한 발걸음, 해인사_20210428

사려울 2023. 1. 23. 21:05

해인사 가는 길에 함께 걷는 봄의 동행으로 말미암아 미소 짓고, 말미암아 감동한다.
천년 고찰이라는 엄숙한 무게감에 첫 발을 내딛는 기억도 잊고 어느새 봄의 친근한 조잘거림에 역시나 자연의 위대함을 느낀다.
나부끼는 연분홍, 새하얀 손짓에 이끌리다 보면 엄숙 했던 취지는 망각되고 주객은 전도되어 인위로 축조된 사찰은 욕망의 과대포장으로, 천년 시간을 거스른 나무는 진정한 경전이 된다. 

봄인데도 벌써 나무 터널은 견고해진다.

보기 힘든 대나무 꽃이라고?

봄의 설렘을 녹색으로 표현한다면 이런 색깔과 모양일까?

왕벚꽃이 활짝 만개하여 연신 연분홍으로 감염시킨다.

아래 밭을 갈던 보살(?)의 구수한 훈수에 잠시 주변을 둘러볼 여유를 챙긴다.

바위에 걸터 앉은 철쭉 한 송이.

해인사로 향하는 길에 여러 사찰이 많다.

금선암과 삼선암 사잇길로 걸으며 만발한 봄 내음과 보드라운 바람결을 피부로 맛본다.

호박벌이 연신 무거운 궁뎅이를 흔드느라 힘겨워 보이지만 잠시도 게으름 없이 분주하다.

벌 종사자 사이에서 애교쟁이 답게 동글동글 외모를 뽐내며 뒤뚱뒤뚱 날아다닌다.

집 안에서 고이 키우고 싶은 금낭화, 그러나 마음 같지 않다.

봄의 여러 화려한 색 너머 진정한 초록을 볼 수 있다.

해인사 입구에 이런 고풍스런 카페가 있다.

산중 카페 특유의 그윽한 기품이 풍기는 건 그 주변에 서생하는 봄의 정령들이 있기 때문이다.

성숙미가 돋보이는 할미꽃 무리를 보고 그냥 지나칠 수 없다.

둥굴레꽃에서 마치 자그마한 종소리가 들리는 듯한 착각이 든다.

바람이 지나갈 때면 꽃망울이 흔들려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곱게 울려 퍼지겠다.

화엄사, 내소사, 월정사와 더불어 큰 규모의 사찰이자 걷기 좋은 길이 가장 먼저 반긴다.
욕심을 내자면 해인사의 그 유명한 새벽 예불을 보고 싶지만 올빼미족에게 있어 그건 크나큰 결단과 투철한 목적 의식 하에 행동이 필요한 고로 다음에 혼행을 할 기회를 포착해야겠다.
나른한 오후에 쏟아지는 사찰의 근엄함 뒤엔 그에 걸맞는, 아니 그 이상의 자연적 요소가 더 큰 몫을 하여 주변에서 흔히 만나는 경쾌한 나무숲과 유전자가 다르다.
물론 그렇다고 대조, 비교, 폄하는 절대 할 수 없고, 동서양인류처럼 태생의 차이랄까?
연신 불어대는 바람의 한 결 사이로 비집고 나오는 풍경소리는 거대한 가야산 자락의 거룩한 자태를 숭배함과 동시에 처절한 역사의 애도를 위한 간결한 선율이다.
이 사찰이 지키고자 했던 건 우상화된 종교의 경전이 아니라 피비린내 나는 역사의 거듭된 찬탈에서 민족의 숭고한 정신 아닐까? 

해인사 일주문에 발을 들인다.

양갈래 곧게 뻗은 나무의 행렬이 아주 멋진 곳이라 아주 천천히 걸으며 나무의 노래에 귀 기울인다.

특히 이 앞에서 한참 서성인다.

살아 숨 쉬는 화석의 형체를 하면서 그 내부엔 혈관과 사상이 꿈틀거려 잠시 기대 세상 애환을 노래하면 나긋하게 화답할 기품이 있다.

몇 번을 거듭 걷고 싶어지는 길.

추호도 종교에 관심 없지만 빛이 무겁게 내려앉은 새벽에 예불은 꼭 보고 싶다.

세상 사물이 가진 숨겨진 소리가 울려 퍼지면 멜랑콜리아도 혼비백산 갈 곳을 잃어 깊은 지하에 스며들 것만 같다.

엄중한 가운데 경쾌한 찰랑거림.

많은 세속의 욕망과 욕구가 바람결에 나부끼며 욕의 굴레를 벗어나려 한다.

허나 그 구속이 없다면 욕망도, 욕구도 아닌 것을.

장경판전에서는 엄숙해져야 된다.

내부엔 사진 촬영도 불허한다.

단지 카메라를 뒤로 메고 걷는 중에도 쓸데 없는 의심과 삿대질이 끊이질 않는다.

그래서 종교란 미명하에 타락하고 썩어빠진 다수? 소수?가 종교의 거룩함을 등에 업고 날뛰며 짐짓 성스러운 척, 고결한 척 하지만 결국 인간의 껍질을 벗지 못해 타락의 이름표를 붙이고 산다.

그저 평범한 사람들은 그런 '척'을 하지 않아 타락도 기생할 겨를 없건만.

나무 가지에 시선이 이끌린다.

재롱둥이 호박벌이 열심히 춤사위를 벌인다.

마치 진중하면서 기나긴 여운을 털어내는 종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사찰을 크게 휘돌아 둘러본 뒤 멋진 나무 자태를 작별인사 겸 여운으로 남기며 왔던 길을 되밟는다.

우리나라 3대 삼보 사찰은 부처의 진신 사리가 봉인되어 있는 불보사찰 통도사, 가장 많은 국사를 배출한 승보사찰 송광사, 불법이 기록된 대장경이 봉안되어 있는 법보사찰 해인사.

해인사의 새벽 예불은 매일 새벽 4시에 법고 소리를 시작으로 잠들어 있는 삼라만상을 깨운다.

법고, 범종, 목어, 운판을 순서로 진행되는 예불은 법고로 땅의 생명을 깨우고, 범종으로 지하의 생명을 깨우며, 목어로 물의 생명을 깨우고, 운판으로 하늘의 생명을 깨운다.

굳이 해인사 예불을 보고 싶은 이유는 정적 가운데 총명한 울림 때문이다.

그래서 낮이 아닌 새벽 예불을 꼭 봐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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