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선 54

산수화 같은 정선 설경_20210302

이번 정선 여행에서 가장 매력적인 설경은 흔하디 흔한 동네 외곽에 몰래 움츠려 있던 한 폭의 산수화 같은 별어곡 부근이었다. 마치 가로로 넓게 펼친 한지 위에 정성스레 먹인 먹물로 한땀 한땀 보드라운 붓으로 휘갈긴 듯 여백과 바위 절벽, 단조로울 새라 드물게 서 있는 소나무가 어우러져 담채화의 진수를 보여주고 싶은 자연의 진면목이다. 물론 편집에 대한 귀찮음에 메타데이터를 올리지만 단지 시각적인 심상만으로도 꽤나 수려하다. 산재한 의미 중 여행의 진면목은 이런 예기치 않은 감탄 때문일까? 느림의 미학처럼 평소 인적이 거의 없는 도로에서 속도를 줄인 만큼 자연의 진면목이 들어차 공간을 가득 채웠던 중력의 끈을 놓았다. 가슴이, 머리가, 심장이 여전히 살아 있어, 그래서 고맙다. PS - 정선? 정선. 어쩌..

낡고 썩어버린 낭만, 고한 메이힐즈_20210301

겨울이 봄에게, 추위가 따스함에, 응축된 대지가 푸른 새싹에게 애증과 더불어 그간의 세상 이야기를 들려주려는 시기. 때마침 내리는 비소리와 기차 경적이 그리운 태백선이 교차하는 풍경과 더불어 묘하게도 마음이 따스해진다. 태백에서 고한으로 넘어오는 길에 해발 1,000m가 넘는 거대한 두문동재를 만난다. 꼬불꼬불 고갯길을 일직선 도로로 닦고, 금대봉 아래 긴 터널을 뚫었다지만 여전히 거대한 고갯길은 일기가 좋은 날에도 숨을 허덕이게 만들 만큼 차량 엔진소리는 꽤 오래 둔탁하다. 그런데 오후 들어 폭설 수준의 눈발이 날리자 가뜩이나 힘겨운 고갯길에 꼬리를 잡아끄는 심술이 동반되었고, 운 좋게 제설차량을 만나 몇 번의 슬립이 있은 후 그나마 수월하게 고갯길을 넘어 무사히 숙소에 다다랐다. 밤새 자욱한 눈발은 ..

시선의 확장, 하늘숲길 화절령_20210228

꽃을 꺾던 나그네는 어디로 가고, 석탄을 나르던 둔탁한 소리는 언제 사라졌을까? 큰 고개 넘어 한숨을 돌려도 사방엔 첩첩산이 끝없는 선을 잇고, 어느새 오르막길에 대한 가쁜 숨이 송이송이 진달래처럼 피어나 감탄사가 되어 피로와 설움을 잊는다. 평지에서의 절망이 깊은 산중에서 희망이 되어 먼 길 마다 않고 달려왔건만 시간에 쫓긴 변화는 어느새 희망을 절망으로 변질시켜 버렸고, 거리와 빼곡하던 인가는 휑한 공허만 남아 깨진 소주병이 자욱하다. 삶의 시름도 태고의 역사에 비하면 찰나에 불과하건만, 그 찰나의 통증은 그다지도 서슬 퍼런 여운이 사무치던가. 공허와 땀내만 남은 운탄고도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추파를 던진다. 2014년 이후 화절령은 처음 밟았다. 그 이후 몇 차례 올 기회가 있었지만 강원랜드에서 ..

불빛 가득한 야경, 사북 둘레길_20210227

과거의 모습을 탈피하고자 거칠게 몸부림치는 사북의 밤은 여느 지방의 마을처럼 일찍 찾아와 깊은 잠에 침묵 중이다. 따스한 남쪽 나라와 달리 여전히 겨울 기운이 웅크리고 있어 끼고 있는 마스크 내부엔 어느새 이슬이 맺혀 인중을 간지럽히며 먼 길 찾아온 수고에 구수한 사투리처럼 입술 촉촉한 대화를 이어간다. 어두운 밤에 어디를 갈 엄두는 나지 않아 지난번 봐두었던 둘레길을 밟으며 오랜만에 찾아온, 오랜 공백을 깨듯 연탄 내음이 코끝 살랑대는 밤공기를 폐부로 맞는다. 여전히 사북의 밤은 일찍 찾아오지만, 대기를 가득채우는 빛잔치는 기세등등하다. 퇴근 뒤 열심히 달려 사북에 도착, 복지 프로그램으로 미리 예약한 메이힐즈에 짐을 풀고 바로 사북 지장천 둘레길로 이동했다. 지나는 길에 지장천을 중심으로 잘 다듬어진..

구름이 무거워진 하늘숲길, 돌아 오는 길_20201007

운탄고도의 또 다른 뜻은 구름 양탄자라.. 마치 머리 바로 위에 구름 양탄자가 가을을 따라 남으로 이동하는 모양새로 화절령 도롱이연못에서 잠시 쉬는 사이 북적대던 사람들마저 어디론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려 서둘러 왔던 길을 되밟으며 시야가 트인 남쪽 방향에 시선을 거의 고정시키다시피 했다. 아마도 화절령으로 연결되는 산길이 아닐까? 선로는 녹슬었지만 그 고단한 세월을 위로하는 꽃 한 다발이 말없이 그 옆을 지키고 있었다. 가던 길에 거대한 위용을 자랑하던 백운산은 순식간에 하늘을 뒤덮은 구름 속으로 그 모습을 감췄다. 지나던 다람쥐 한 마리와 눈이 마주쳤는데 입을 자세히 보면 겨울 준비를 위한 식량이 한가득 들어 풍선처럼 잔뜩 부풀었다. 화절령 방면으로 갈 때와 달리 돌아갈 때엔 걷는 속도를 높여 시간..

가을 열매 설익은 하늘숲길, 화절령 가는 길_20201007

가을이면 달골 마냥 찾는 곳 중 하나가 정선 하늘숲길(사북의 잃어버린 탄광마을_20141129, 하늘숲길에 가을이 찾아 들다_20191023, 하얀 하늘숲길을 거닐다_20200203)로 고산지대에 조급한 가을과 더불어 눈앞에 첩첩이 펼쳐진 산능선의 미려한 행진곡이 멋진, 단순히 연결의 의미로 채워진 길이 아닌 감상의 의미가 가미된 길을 찾았다. 그 길을 나서기 전, 큼지막한 텀블러에 커피 한 잔을 채우기 위해 아침 시간대 고한에서 동네를 둘러둘러 겨우 찾은 카페에서 듬직한 내용물을 담아 차로 총총히 가던 중에 만난 담벼락 아래 나팔꽃 무리들이 살랑이는 바람살에 나풀거렸다. 나팔꽃에 새겨진 별이 북극성처럼 갈 길을 잃지 마라고 토닥여 주는 걸까? 잠시 고개 숙여 환한 응원을 받았다. 6년 전에 밟았던 운탄..

봄에 환생한 겨울 왕국, 함백산_20200412

엘사의 마법이 발휘된 걸까? 목화솜 같은 함박눈이 내려 순식간에 하얀 세상이 펼쳐져 겨울의 집착적인 미련을 실감케 했다. 서둘러 사람들이 떠나 세상은 텅 빈 듯 눈처럼 쌓인 적막과 두터운 눈구름처럼 정적만 휩싸고 돌며, 그로 인해 바람 소리가 지축을 흔드는 번개 소리 마냥 대기를 가득 채웠다. 당초 함백산에 오를 계획은 없었지만 만항재로 가는 텅 빈 도로에 차를 세워 두고 그칠 줄 모르는 눈발을 향해 걷다 결국 함백산을 올랐다. 2015년 초겨울, 우연찮게 함백산 초입에 방문했다 순식간에 퍼붓는 함박눈이 만든 설원을 행보했던 추억을 더듬어 같은 자리에 방문하자 굵어진 눈발을 등지고 산에서 하산한 한 분께 산길에 대한 정보를 들었다. (눈꽃들만의 세상, 함백산_20151128) 아이젠이나 스틱 중 하나는 ..

마중 나온 함박눈, 가리왕산 휴양림_20200225

가리왕산 휴양림은 평면지도 상 다닥다닥 붙은 것처럼 보이지만 막상 이 자리에서 살펴보면 고도차가 있어 그 부담스러운 거리 사이에 장벽 역할을 한다. 가리왕산을 출발할 무렵, 밤새 내린 비가 진눈개비로 바뀌었고, 휴양림은 텅 빈 채 다시 찾아올 사람들을 기다리며 또다시 지독한 외로움을 견뎌야 한다. 그 많던 사람들이 떠나고 남은 공허를 채우기 위해 그토록 가냘픈 빗방울이 못내 아쉬워 함박눈으로 옷을 갈아 입고 나들이 나왔을까? 잔치가 끝나면 남은 건 공허의 잡동사니들. 그래도 늘 이 자리를 지켜주던 숲이 공허가 아닌 휴식으로 다독이겠다.

절경과 절벽의 경계에서, 칠족령과 하늘벽 구름다리_20200224

가끔 이럴 때가 있다. 멀쩡하던 몸이 휴일을 맞아 탈수기에 쥐어 짤 듯 쑤시고, 무기력증에 빠져 있다 월요일이 되면 거짓말처럼 멀쩡해진다. 뭔 말인고 허니, 긴장감이 작은 느낌을 극대화시켜주고, 공포가 잠자고 있던 초인적인 능력과 집중력을 흔들어 깨울 때가 있다는 말인데 우리나라에서 최애 절경을 간직한 동강에 매년마다 최소 한 번 정도 여행하며 극도의 몰입감을 즐긴다. (칠족령 설화가 남긴 절경_20190217, 칼끝 벼랑에 서다, 하늘벽 구름다리_20190217, 칠족령의 마법_20190329) 동강 중에서 정선~평창~영월의 경계를 뱀이 기어가는 형세라고 해서 사행천이라 부르는데 이 구간은 천혜의 절경을 이룬다. 이틀 계획으로 가리왕산과 동강 여정을 계획했던 기대는 첫날, 가리왕산 입산 통제로 인해 먼..

가리왕산 휴양림_20200223

21시 무렵 가리왕산 휴양림에 도착하여 살림을 후딱 옮기곤 바로 카메라를 메고 숙소 일대를 돌아다녔다. 밤하늘 사진을 몇 장 찍었는데 아쉽게도 은하수는 보이지 않고 그저 별빛만 싸늘하게 반짝였다. 희안하지? 밤에 찍은 사진 몇 장만 사라졌는데 다른 SNS에는 그 사진들이 있다. 애석하게도 원본은 증발하고 그나마 SNS에 사진이 남아 다행이다. 은하수는 볼 수 없었지만 여전히 깊은 오지의 밤하늘은 매력적이다. 가끔 정적과 암흑이 무서울 때, 이런 익숙한 소리가 위안이 되는데 이 자리에서 그걸 실감한다. 카메라를 들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던 중 휴양림 직원과 마주쳤는데 밤하늘을 향해 렌즈를 들이민 행태가 이해 되지 않는다는 표정이다. 가리왕산 지도는 휴양림 내 숲속의 집이 모여 있던 초입에 있는데 아슬아슬하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