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양 99

일상_20200512

눈 덮인 양 이팝나무가 뽀얗게 물들고, 넘실대는 바람결에 향긋한 아카시향이 입가에 미소를 머금게 한다. 봄은 그저 앞만 보고 달리는 야생마 같지만 그 계절의 옷깃에 내비치는 풍경은 향기로 가득하다. 살랑이는 아카시향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고 넋 나간 사람처럼 소담한 길을 따라 피어나는 신록을 만나러 가는 길은 흥겨운 놀이를 쫓는 아이 같다. 산책의 행복을 저미던 시간, 손끝에서 조차 잠자고 있던 유희의 감각이 긴 잠을 깨치고 일어나 어디선가 들리는 아름다운 새의 지저귐도 피부를 간지럽힌다. 노작마을 초입에서 반겨주는 이팝나무의 화사한 인사. 마치 뽀얀 눈이 덮여 눈꽃 만발한 나무 같다. 여기를 지나 곧장 노인공원을 거쳐 냥마을로 향했다. 뽀샤시한 외모와 순둥순둥 성격, 하지만 길냥이 특유의 경계심으로 가..

냥이 마을을 돌아 석양이 지다_20200425

냥이들 만나러 가는 길이면 옆길로 새지 않고 정주행이다. 누군가 관심으로 꾸준히 챙겨 주시만 나 또한 이게 내 표현 방법인 셈이다. 횟수가 거듭될수록 녀석들의 철옹성 같던 경계가 무너지는 재미, 나만의 몰취향이 되어 버렸다. 순둥순둥한 치즈뚱이는 늘 마지막 차례라 밥은 좀 남겨 뒀다 뒤에 식사하는 녀석들을 챙겨 주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이 치즈뚱이다. 가장 경계가 심한 카오스는 치즈뚱이처럼 몇 아이의 어미로 사진을 찍으려고 하면 겁을 먹고 줄행랑이라 조심해야 된다. 치즈뚱이는 지나는 행인들에게 촉각이 곤두섰다. 까칠하지만 인물 좋은 삼색이도 볼 수 있었다. 녀석들이 식사를 거의 끝낼 즈음해서 냥이 마을을 벗어나 복합문화센터 뒤뜰을 경유하여 반석산 전망데크로 올라갔다. 며칠 전과 달리 어느 순간부터 전형적..

길 위의 고단함_20200410

잠시 나간 산책길에서 길 위 생명의 고단함을 헤아린다. 초보 애묘인이지만 오랜 역사를 거치며 인간과 함께 한 생명이라면 분명 공존공생하는 숙명과 더불어 이로운 부분이 훨씬 많을 터. 그럼에도 길로 내몰린 가련한 생명들에 동정 이상의 박애 정신은 발휘하지 못했다. 산책 삼아 밥 한주먹 담아서 반석산으로 향했고, 냥이 마을에 도착할 즈음 석양이 서편 마루에 걸렸다. 도착 했을 때는 냥이 마을이 텅비어 발걸음을 돌릴까 하다 녀석들을 부르자 몇 번 봤다고 어디선가 몇 녀석이 달려왔다. 위계 질서가 엄격함에도 늘 먼저 먹는 녀석이 배부른 만큼 가장 순둥이한테도 밥을 봉투째 내밀자 눈치를 보다가 어느새 맛나게 먹는다. 너무 약하고 소심하고 경계심이 많은 녀석이라 돌아서는 길에 늘 마음에 걸린다. 냥이들과 헤어진 뒤..

해 질 녘 곡성 도깨비_20200319

사성암에서 출발하여 다시 곡성으로 향했는데 오전에 섬진강변의 17번 국도를 경유했다면 이번엔 섬진강을 넘어 반대편의 한적한 도로를 경유했다. 첫 번째는 두가헌이라는 멋진 시골 카페를 이용하기 위함이었고, 두 번째는 도깨비마을로 가기 위함이었다. 물론 두가헌의 멋진 정취에 빠져 오래 앉아 있는 사이 석양은 서산으로 완전히 기울어 더 이상의 멋진 절경을 제대로 누릴 수 없는 데다 하루 동안 동선을 감안하면 허기가 밀려올 만했다. 그래서 도깨비마을 방문은 패스하고 마을 입구까지만 가는 걸루~ 해질 무렵 음산한 도깨비 마을. 어릴 적 어둑한 암흑 속에서 한 번도 나타나지 않은 도깨비는 늘 마음속에 자리를 잡고,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잊혔다고 안심했던 도깨비가 다시 눈앞에 떡!허니 자리를 잡고 있는데 때마침 석..

일상_20200315

일 년 중 대기가 청명한 날이 그리 많지 않은 현재를 비교해 보면 맑은 봄의 대기가 그토록 소중했음을 뒤늦게 깨닫게 되고, 어김없이 계절의 화사함에 이끌려 주변을 둘러보지 않으면 언제 다시 맞이 할지 기약 없는 귀한 손님 같다. 더불어 겨울색 짙은 황량한 대지에 이따금씩 뚫고 나오는 봄의 전령사가 눈부신 시기다. 산수유가 겨우내 참아왔던 꽃망울을 터트려 절정의 미모를 과시하는 시기다. 반석산 둘레길로 향하며 공원 한켠에 다수의 산수유가 미세한 봄의 훈풍에 손짓을 한다. 가장 반가운 봄의 전령사 중 하나가 진달래 되시겠다. 반석산에는 이런 진달래가 군락지 정도는 아니지만 곳곳에 피어 있어 겨울색이 짙은 산에서 그 눈부심이 증폭된다. 반석산에 생강꽃이 있다니... 전망데크로 가는 둘레길 여기저기에 진달래는 ..

요람기를 반추하다, 거운분교_20200204

어라연을 다녀온 뒤 생각보다 넉넉한 시간을 활용해 잠시 들렀다 옛생각으로 회상에 젖었던 정겨운 교정. 정문에 들어서자 어릴 적엔 그토록 넓던 운동장이 어느샌가 손바닥만하게 느껴졌다. 원래 그 자리를 지키던 학교가 줄어들리 없으니 내가 인식하는 극치가 올랐다고 봐야겠지. 교문을 들어서서 좌측으로 발걸음을 돌리면 어릴 적 주머니와 신발을 가득 채우던 모래밭이 나온다. 교문 우측에 넓고 편평한 자연석으로 된 벤치가 있다. 앉아 보고 싶은 충동을 참지 못하고 몸을 맡긴 해 잠시 사색에 잠겼다. 평균대라고 하나? 올림픽 체조 선수를 따라 한답시고 많이도 깡총거렸던 평균대가 급격히 좁고 위태로워 보였다. 그 평균대의 쇠락처럼 하루도 쇠락하여 해가 잦아들며 뜨거운 석양이 마지막 혼신을 태우고, 이내 찾아올 시골 밤에..

평온의 호수_20200111

망해사를 벗어날 무렵 해는 벌써 서쪽으로 제법 기울었다. 그만큼 망해사에서 오래 머물렀다는 건가? 익산으로 돌아가는 길에 망해사로 오면서 큰 호수를 눈여겨 봤고, 돌아가는 길에 잠시 들리겠노라 점 찍어 놨는데 그러길 잘 했다. 위성지도로 본 호수의 모양도 특이했지만 그리 멀지 않은 과거에 여길 리조트 단지로 조성하려 했는지 출입이 금지된 유람선형 숙소와 카페가 있다. 호수 위로 뻗어 나온 가지에 까마귀가 빼곡히 쉬고 있는 모습들이 쉽게 포착되는데 언젠가 김제에서 만난 거대 까마귀떼가 이렇게 흩어져 쉬고 있다는 거다. 뜨거운 석양과 어울려 온통 출렁이는 금빛 세상을 연출하고 있는 가운데 그 길목에 나무처럼 멈춰진 장면 또한 장관일 수 밖에 없다. 호수가엔 말끔한 주차장이 많고 특히나 호수 서북편 근린공원에..

일상_20191225

성탄절의 설렘보단 늘 맞이하는 휴일 중 하루를 대하는 기분이었다. 어느 계절이든 각각의 매력은 비교할 수 없겠지만 겨울이나 여름이 되면 마음과 달리 몸은 위축되어 정적으로 바뀌고, 이내 익숙해져 버렸다. 느지막이 집을 나서 여울 공원으로 천천히 걸어가 모처럼 공원에서 가장 도드라지는 나무를 만났다. 겨울이라 전체적으로 조용하고 무거운 분위기가 짙게 깔려 있었다. 오산천 산책로를 따라 나무가 가까이 있는 북쪽 공원 입구로 들어서 나무를 한 바퀴 둘러보자 그제서야 서쪽으로 기운 석양이 눈에 띄었다. 언제 보더라도 나무의 기품은 변함이 없고, 가지를 지탱하는 기둥이 옆으로 뻗은 나무 가지를 지지하고 있었다. 나무를 잠시 둘러보고 오산천을 따라 집으로 향하는 길에 아파트 건물 사이에 걸린 석양이 보인다. 휴일 ..

세교 고인돌 공원과 동탄 탄요 공원의 가을_20191107

하얀 갈대가 가을의 파도가 되어 넘실 대던 날, 세교 고인돌 공원의 갈대밭이 떠올랐다.생각해 보면 처음 세교 신도시가 개발되어 금암초등학교 일대가 가장 먼저 번화 하던 때에 가끔 찾곤 했었다.신도시의 전형적인 수순처럼 초기의 텅빈 모습과 달리 주변 공원은 미리 자리를 잡고 있어서 마치 혼자 만의 공간인 양 착각이 들 만큼 활보하고 다녔다.(세교신도시 가을 갈대밭) 역시나 첫 인상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건 바람에 나풀거리는 갈대밭이었다.너른 잔디 너머 한눈에 봐도 가장 먼저 하얀 갈대가 적당히 부는 바람에 이리저리 몸을 흔들어 대며, 찾아오는 사람들을 위해 화사한 볼거리를 제공해 줬다. 하루 해가 거의 넘어갈 무렵 서산에 석양이 걸려 있고, 쏟아지는 햇살을 갈대는 산산이 부수어 하얀 빛세례를 퍼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