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양 99

이른 봄의 전주곡, 태안_20210220

서해의 바람이 지치지 않는 태안에서 진지하고, 유희 넘치는 대화를 나누던 날, 들판에서 소생하는 봄소식에 한껏 부풀어 오른 가슴을 되짚어 바람에게 묻노나니... 불현듯 찾아온 손님의 반가움이 바로 이런 기분일까 싶어 또한 같은 마음이려나. 빼곡한 장독대에서 부서지는 햇살이 아직은 찬 바닷바람에 냉점을 마비시킨다. 마당 한켠에 장독이 쨍한 햇살을 받아 반사 시킨다. 봄을 예고하는 양지 바른 곳이라 파리가 날아다니는 건가~ 노숙자 스타일. 소리소문 없이 봄을 전해주는, 땅에 나지막이 달라붙어 작은 꽃을 피워 몰래 봄을 데리고 왔다 갈 때도 몰래 데리고 간다. 하루 일과가 무척 짧게 느껴져 어느새 기웃거리던 해가 멀리 도망가 버렸다.

섬진강 따라, 곡성_20210120

섬진강만 그 자리에 있을 뿐 완연히 봄과 다른 겨울 옷을 둘러쓴 함허정은 지난해 여름 폭우로 출입이 제한되어 있어 아쉬운 대로 주변을 돌며 강바람 짙은 향연 속에 잠시 몸을 맡긴다. 먼 길 달려온 강물은 함허정을 감싸고 잠시 쉬어 가듯 강폭이 넓어지고 웅크리는데 오랜 시간 그 모습을 보고 얼마나 많이도 한탄과 삶의 집착을 내려놓았을까? 겸허해지는 순간 억겁 동안 지낸 강은 스승과 다를 바 없다. 세상 모든 적막들이 모여 쉬고 있는 저곳에 서는 순간 진가는 유감없이 드러난다. 여름 장마 폭우 당시 섬진강 수자원을 잘못 관리하는 바람에 강유역에 수많은 피해가 났었던 게 떠올랐다. 서쪽 섬진강에서 반대편인 동녘으로 고개를 돌리면 칼날 같은 동악산 능선에 또 한 번 감탄한다. 동악산 능선을 넘어 석양이 잠시 숨..

갯마을 석양 아래 강구_20201110

동해 바다에 있는 영덕은 바로 앞이 바다가 아닌 내륙 도시와 진배없었다. 후포와 저울질하다 호기심에 찾아간 영덕 강구는 대게 식당이 즐비하게 늘어서 다가온 대게철을 실감할 수 있었지만 제 바닥이라고 해서 저렴한 건 아니었다. 다만 바다를 바라보며 대게를 뜯는 기분은 아무런 양념이 없음에도 풍미를 배가 시켜주는 플라시보 이펙트랄까? 모처럼 대게를 질리도록 먹고 나오자 하늘엔 땅거미가 깔려 이내 하루가 저물 기세라 바로 앞에 있는 광장을 한 번 둘러봤다. 꽤나 너른 공원을 한 바퀴 둘러보자 비로소 딱 트인 동해가 눈에 들어오며 나도 모르게 수평선에 시선을 맞췄다. 공원 한 켠 방파제 언저리엔 건조에 한창인 생선이 있고, 그 아래엔 굶주린 길냥이들이 행여나 먹을 수 있는 기회를 노리고 있었지만 촘촘하게 짜여진..

일상_20201005

잊을만하면 회사 인근에서 만나던 우수에 찬 눈빛을 가진 삼색이가 한 가정의 가장이 되었단다. 녀석도 꽤 어려 보이던데 벌써 어미가 되었다는 사실은 궁금하던 차 회사 동료로부터 전해 들었지만 한동안 보질 못했으니 나도 잊고 지냈다. 허나 위태로운 난관에서 쉬고 있었다니. 방해 안 할 테니 조심하고, 가끔 이쁜 얼굴이나 보여주렴. 가을과 하늘의 석양 협주곡. 어느 하나 어색하거나 도드라진 건 없다.

평온의 결실_20200920

뙤약볕 아래 태연히 갈 길을 가던 냥이를 부르자 냉큼 돌아서서 가까이 다가온다. 커피 한 잔 마시던 차, 츄르 프라푸치노 한 잔 할래? 가을이면 만물이 풍성해진다고 했던가? 다짐과 도약이 풋풋한 봄이라면 고찰과 성숙은 결실과도 같은 가을이렷다. 자연과 어우러진 생명은 어느 하나 아름답지 않은 게 없듯 하나를 위해 일 년을 버틴 결실은 인내가 뿌려져 더욱 아름답다. 강과 길을 따라 들판으로 번진 가을은 수수한 미소를 입가에 머금고 잠시 걷던 수고로움에 영혼의 물 한 모금을 살포시 건넨다. 내가 유쾌한 건 '말미암아' 불씨를 달래고, 네가 아름다운 건 '믿음'의 도화선이다. 여주 행님 댁에 도착, 머릿속은 온통 평온만 연상된다. 들판에 덩그러니 서 있던 한 쌍이 아쉽게도 제 짝을 잃었다. 한 편의 아름다운 ..

재즈 선율 같은 석양 자락, 선유도_20200905

평이한 두 개가 모여 각별한 하나로, 단조로운 바다와 흔하디 흔한 바위산이 만나 세상 하나 뿐인 자태, 그 모습이 보는 시점과 지점에 따라 다른 옷으로 단장했다. 만약 두 바위 돌기가 서로 시기했다면 그 모습이 남달랐을까? 고립의 아픔에서 서로 의지하며 고단한 바다 한가운데 생존하는 숙원을 조화롭게 이룬 경관이, 그래서 절경일 수밖에 없다. 대장도를 떠나기 전, 뿌연 대기 사이 다음 목적지인 망주봉 방향을 바라봤다. 때론 옅은 안개도 고마울 때가 있다. 바라보는 시각과 관점의 차이에 따라 미운 오리 새끼가 아름다운 백조로 거듭날 수 있는 전경이었다. 대장도에서 차로 이동하여 선유도에 도착, 주차된 차들이 길 양 편에 늘어서 주차는 물론이거니와 통행조차 쉽지 않았다. 망주봉을 지나 선유도 해변의 끝이 보일..

골짜기 작은 갤러리, 컨츄리 블랙 펍_20200709

한이와 같이 감곡에서 만나 여주 행님과 감곡 형을 찾아뵙는다. 여주 행님은 어차피 은사와 같은 분이라 언제든지 찾아뵙게 되지만 감곡 형은 도대체 얼마 만인가? 그렇다고 먼 곳에 사는 것도, 연락이 끊어진 것도 아니고, 유체이탈한 것처럼 바쁘지도 않건만 거의 1년 만에 뵙는다. 늘 서글서글한 인상에 매끈한 어투, 진정한 삶은 곧 끊임없는 변화와 능동적 대처이기에 늘 발로 뛰는 형인만큼 감곡, 장호원에서는 마당발이다. 그런 형을 여주 행님과 고향 친구와 함께 찾아갔으니 지극 정성에 멋진 자리로 안내했다. 작긴 해도 산 중턱이라 사람들이 오려나 싶었지만 입소문이 그래서 무서운지 저녁 시간이 되자 알흠알흠 주차장에 차가 들어서 금세 너른 주차장에 반 이상 들어찬다. 거의 1년 만에 만나 뵙는 반가움이 무색하게 ..

초여름 정취에 취한 들판, 여주_20200607

여주 벌판을 뒤덮은 계절의 정취를 보면 봄과 확연히 다른 여름이 보인다. 묘하게도 난감할 것만 같은 계절은 추억을 남기며, 붙잡고 싶은 미련은 떨칠 수 없는데 앞선 편견으로 나래도 제대로 펼치지 않은 계절에 대해 가혹한 질곡을 씌워 버린다. 후회에 길들여지기 싫어 무심한 일상도 감사하려는 습관은 절실하다. 길들여진 습관을 탈피하기 힘들어 그 위에 호연한 습관을 덧씌울 수밖에. 단조롭지 않고 세월의 굴곡 마냥 들쑥날쑥한 벌판에 한발 앞서 여름이 자리 잡았다. 석양을 등진 흔한 마을길에, 흔한 마을을 지키는 각별한 나무. 석양이 뉘엿뉘엿 서녘으로 힘겹게 넘어간다. 여름의 햇살이라 하늘과 세상 모두를 태울 기세다. 고추 모종이 결실의 꿈을 품고 무럭무럭 자란다. 감자꽃이 뾰로통 피어 올 한 해 거듭 나기가 쉽..

냥이_20200520

보통 현관문을 열고 귀가하게 되면 녀석은 현관까지 어떻게든 마중 나오는데 어쩐 일인지 제 쿠션에 퍼질러 누워 빤히 쳐다보기만 한다. 뒤늦게 녀석이 부시시 나와 간식 하나를 상납하자 언제나처럼 가족들 껌딱지가 된다. 베란다 정원 한 켠 영산홍이 이제서야 만개했다. 늦은 건 게으름과 기만이 아니다. 신뢰와 인내의 시선에선 화답과 확신이며, 인생과 매한가지로 꽃은 매력의 본분이 최선일 수도 있다. 하나의 꽃망울에 두 빛깔이 어우러져 단색의 편견을 뛰어넘는 경이로움처럼 한계는 언제나 내 편견의 부산물이다. 때마침 맑은 대기로 인해 석양의 물결이 흥겨움에 춤을 춘다. 테이블 파수꾼? 테이블 위 모든 것들에 대한 호기심과 관심의 눈빛이라 이렇게 똘망똘망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