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 자연 그리고 만남

고원에 부는 세상 향기, 황매산_20210513

사려울 2023. 1. 24. 00:03

인간이 품어온 동경이 쉬어가는 곳, 철쭉이 질 무렵 뒤따라온 신록의 물결이 바람결에 출렁이며 자욱한 봄내음이 가슴까지 술렁인다.
봄이면 철쭉이, 가을이면 억새가 터줏대감이 되어 무던히도 여행자들을 설렌 이끌림에 마주치는 고원은 그 일몰 또한 아름답다.
갈망하던 은하수는 한 번도 만나지 못했지만 실망의 매듭이 풀릴세라 가슴을 현혹시켜 돌아갈 의지를 잊게 된다.

언덕으로 봉긋 솟아올라 다시 그 위에 닭벼슬처럼 첨예하게 자리 잡은 황매산 능선은 공존하는 두 세상이 다른 책임을 부여받은 마냥 시선으로 판별되는 질감이 대조적이다.

철쭉과 억새 군락지가 너른 고원에 사지를 펼쳐 드러누워 있다면 한 줄기 산자락은 그와 다른 생명들이 울타리를 치고 그들만의 영역을 만들어 지내는 형상으로 철쭉만 만났던 지금까지와 달리 이번엔 황매산이 이끄는 길 이야기를 나누기로 한다.

끝물에 다다른 철쭉이 투혼을 불태운다.

오백나한일까?

계단을 오르며 연신 주위를 둘러보는 사이 그 끝에 도착하는 순간 고된 오르막의 반문을 잊게 된다.

전망대를 지나 그어진 길 따라 하나의 산모퉁이를 돌자 또 다른 철쭉 군락지와 더불어 산성의 흔적이 있다.

어느 길로 가야 될지 고민되는 이정표.

열정과 노력이 살짝 빠진 1,000미터는 하루 지난 녹차처럼 우려낸 맛이 전혀 없다.

1,000미터 고지의 철쭉은 절정의 봄을 합창 중이다.

천천히 걸어 산성 가까이 도착.

황매산을 오르는 능선길의 특이한 자태가 가장 먼저 시선을 압도한다.

좌측은 오후 햇살이 쏟아지는 쪽으로 철쭉이, 우측은 동트는 햇살이 비추는 쪽으로 상수리를 비롯하여 이른 신록이 움튼다.

산성에는 드문드문 사람들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철쭉 군락지 사이로 데크길이 있어 산성을 들른 사람들은 약속이나 한 것처럼 데크길을 따라 남은 봄을 기억의 창고로 열심히 옮기고, 그걸 반기는지 바람 따라 손을 흔드는 꽃잎은 쏟아지는 햇살을 잘게 부순다.

생선 비늘처럼 수직으로 솟은 황매산 봉우리 능선은 자칫 봄꽃에 매력이 가려질 뻔 했다.

조금만 고개를 들고 시선의 초점을 멀리 가져가지 않았다면 이 자리에 서지 않았을 걸, 먼 길 보람은 사소하게 작은 표현 뒤에 크나큰 의미가 숨겨져 있다.

시인이 시를 쓰고 마침표를 찍는 펜 끝은 미세한 떨림이 있을까?
여행자가 한길을 버리고 선이 불분명한 귀로에 서면 불안보다 묘한 호기심이 발동하여 동경이 만든 상상의 세상이 길 끝에 서서 반기듯 환한 자태로 눈을 마주치리라.
몇 번의 연은 호기롭지 못한 이음새로 너덜거려 발길이 스칠 수 없었고, 외려 지나치려던 결단의 흔들림이 무뎌진 의지의 칼끝 마냥 이정표에 현혹되어 어부지리 오르던 걸음이라 얼마나 무거웠을까?
막상 저지르고 나면 완전히 다른 인격이 뛰쳐나와 발에 닿는 대지의 토닥임을 잡으려 잠시 멈추는 걸음은 사치가 되고, 길가에 일렁이는 사유는 트로핀이 된다.
어디론가 강하게 음각된 길은 수줍어 고개를 숙인 양귀비인지 굽이친 끝은 내미는 손끝이고, 허공을 살랑이는 하늘빛 공간은 갈라드리엘의 미소 같다. 

산마루로 가는 길.

그 길이 궁금하여 넋 잃은 사람처럼 길 따라간다.

산으로 오르던 중 문득문득 뒤돌아 보면 고원처럼 탁 트인 또 다른 세상을 깨닫는다.

능선 따라 이런 데크길을 만들어 놓은 인간도 때론 위대함을 깨닫는다.

정상과 가까워질 무렵 잠시 땀을 식힐 겸 눈을 시원하게 쉴 수 있게 한다.

들판을 연분홍으로 물들인 철쭉이 얼마 남지 않은 봄을 알려준다.

해가 많이 기울어 하루의 시간도 저물어간다.

황매산 정상 또한 널찍하다.

정상과 연이은 능선에서 봄의 축제가 시작되고, 신록의 옷으로 갈아입는다.

황매산 정상에서...

미세 먼지가 있던 날이라 은하수는 보기 힘들겠다.

공중을 유영하는 패러글라이더.

지리산의 모습이 어렴풋하다.

황매산 정상 따라 능선길로 조금 걷다 뒤돌아본다.

이 자리를 끝으로 왔던 길로 다시 되돌아가며, 오를 때와 다른 세상의 모습을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바라볼 터.

철쭉이 한창이다.

해가 질 무렵이라 고원의 빛깔이 무르익었다.

내려가던 길에 무언가 지나는 게 보여 길을 멈추자 녀석도 가던 길을 멈추고 빤히 쳐다본다.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바로 담비였다.

꽤 먼 거리지만 서로 수 초 동안 눈이 마주쳤고, 카메라를 준비하는 사이 녀석은 유유히 사라졌다.

사진 좌측 상단의 작은 쉼터를 지나 바로 옆 빼곡한 철쭉 사이 맨땅을 지나는 게 보였는데 담비를 직접 본 건 처음이다.

황매산 봉우리에서 내려오며 마지막 테라스 전망대에서 이 장면을 아래 두고 한참을 앉아 음악을 곁들인다.

봄이 내린 땅도 지는 하루가 아쉬운지 그 빛깔이 유난히 짙다.

석양이 견고한 서쪽 구름에 걸렸다.

석양을 배웅 나온 사진사들.

서녘마루 잰걸음으로 돌아간 석양의 여운이 끝나기를 기다려 달려온 길을 밟아야 되는데 좀처럼 발걸음을 돌릴 수 없다.
뜨거운 석양의 이글대는 불빛이 하늘을 태울 듯한 기세는 속절없는 독단 같지만 기실 밤새 암흑으로 식어버릴 허공의 싸늘한 외로움에 등을 토닥여줄 온기며 필연의 재회에 대한 안도의 배려다.
그 따스한 진동을 온몸으로 쬐며 어렵사리 한 발 한 발 떼는 땅거미의 깊은 여운이자 찰나의 인연에 대한 구슬진 한 장 점묘화다.
어렵사리 구름의 붓으로 되새기는데 그래서 발걸음을 떨어지지 않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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