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선 코스의 길이 이쁘고 편리하게 다듬어져 있었다면 해안둘레길 3코스인 구룡소길로 접어들면 길은 날 것의 분위기로 급격히 바뀌며 많던 사람들이 현저히 줄어들어 소박한 어촌과 해안으로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는데 바다가 공들여 다듬은 기암이나 바람이 조각한 무른 절벽이 착색되지 않은 표정으로 묵묵히 다가올 시간을 맞이하고 있었다.
그 사이 위태롭게 지나는 길을 거닐며 나아감과 머무름을 뒤섞어 관념의 횃불을 밝혀 찰랑이는 파도처럼 발을 디뎌 길의 따스한 이야기를 들었다.
흥환1리 마을에서 발산1리 마을까지 작은 도로를 사이에 두고 인가는 줄지어 자리를 잡고 있었고, 해는 어느새 정오를 훌쩍 넘었다.
해안둘레길의 여느 어촌마을처럼 발산1리 마을도 한적하여 잠잠한 파도 소리조차 증폭되어 울렸다.
포구도 조용하여 갈매기 지저귐만 가득 들어찼다.
해안둘레길 3코스인 구룡소길의 백미, 구룡소는 어느새 부쩍 다가와 3.5km 남았다.
발산리를 지나며 마주쳤던 어촌 마을과도 잠시 헤어져야만 했다.
해안둘레길이 진행될수록 마을 간 간격도 늘어나고, 해안 인가의 밀도도 희박해져 발산1리 마을에서 인가가 장군바위가 마을 초입을 지키는 발산2리 마을까지 그리 가깝지 않은 데다 지난해 수해로 해안둘레길에서 유실된 구간이 많아 기나긴 자갈밭으로 인해 진행 속도가 상당히 더뎌 시간 소요가 많았다.
하지만 그만큼 해안 절경의 민낯을 마주하며 색다른 경험을 채울 수 있었는데 해안둘레길 일대 전경 감상에 충실한 나머지 점심시간이 조금 늦어졌건만 이 구간을 지나며 짧게나마 시간의 흐름을 끊고 한숨을 돌리며 요기도 곁들일 수 있었다.
발산1리 마을의 끝집을 지나면 콘크리트로 포장된 길도 사라져 해안의 특징적인 길을 밟아 한참으로 걸어야 했다.
이제는 익숙하고 친숙해진 해안둘레길 이정표가 덩그러니 홀로 지나가는 길을 다잡아주고, 길에 대한 여행자의 의심을 깨쳐줬다.
길은 이렇게 바다와 해안의 진솔한 모습 사이를 파고들었다.
그래서 하나의 절경에 역치가 무뎌지는 것보다 이렇게 이색적인 것들이 길에 엮인 감동의 여운이 더욱 크고, 내성이 없었다.
문명의 소음이 배제된 공간을 지나는 길에서 잔잔한 음악 소리와 파도 소리를 헤집고 들리는 갈매기들의 수다에 음파의 진원지로 고개를 돌리자 녀석들이 편평한 갯바위에 모여 휴식을 취하여 특유의 수다로 연신 꽥꽥거렸다.
내륙에는 악동 까치가 있다면 바다의 악동은 갈매기며, 생존에 대한 유연성을 상상하는 사이 걷는 발끝에서 힘이 솟았다.
파도가 잔잔한 걸 알곤 꾀돌이답게 녀석들은 파도가 살짝 미치지 못하는 자리에서 바다를 조롱하는 것만 같았다.
처음과 달리 길과 그 주변 존재들은 확연히 다른 정취를 보였다.
천의 미소가 아마도 호미반도 해안둘레길의 매력이 아닐까?
그래서 길의 처음부터 끝날 때까지 항상 설렜다.
발산1리와 2리 중간 정도 되는 지점에서 기묘한 해안을 지났다.
저 모습은 마치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서 나오는 움직이는 성의 선단 같거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오물을 잔뜩 뒤집어쓰고 밍기적밍기적 움직이는 강의 신 같았다.
바다와 내륙을 아우른 자연의 절경 사이로 길이 절묘하게 지나 다음 만날 또 다른 절경을 기대하게 되는 모퉁이였다.
여기서 다시 걷는 걸음의 속도가 멈추다시피 느려졌다.
몇 세대의 지구 역사가 같은 자리에 모여 있거니와 사암 지층 구간에서는 기암의 결이 비스듬한 자세로 기울어져 딛고 선 자리에 파고들 기세였고, 그 셀 수 없이 많은 결들이 금빛 꿈을 한아름 안은 채 어느 한 군데 시선을 고정시킬 수 없었다.
그 빛깔이며 그 역동적인 무늬, 그리고 그것들이 모여 하나의 거대한 바위 절벽에 압축되어 한 가지 편견으로 재단되기를 거부하며 그저 감상하길 바랬었나보다.
금빛 해안 절벽을 지나면 선명하던 길은 자취를 감췄고, 자갈로만 채워진 해안을 걸어야만 했는데 디딘 발이 고정되지 않고 요동치는 바람에 도약하는 다리에 힘이 잔뜩 들어 걷는 속도가 뚝 떨어졌다.
게다가 어디선가 밀려온 건지 아니면 누군가 배출한 건지 몰라도 가공되지 않은 나무 조각부터 가공된 합판이며 나무 조각들이 많았고, 잘못 밟으면 눈에 띄지 않던 못의 날카로운 부분이 신발 밑창을 뚫어 발바닥이 찔려 버릴 가능성도 다분했다.
실제 무심코 합판을 밟았는데 못이 밑창을 뚫어 버릴 뻔 했지만 다행히 짧은 못이었길 망정이지 하마터면 파상풍 걱정에 여정을 포기할 뻔했다.
이 구간과 나무들이 널브러져 있는 구룡소 조금 못 간 지점에서는 정말 조심해야 스것다.
멀리 발산2리 마을이 보일 무렵, 지나고 보면 마을 사이 거리가 제법 있어 한참을 걸었다.
그럴수록 의인화된 존재들도 점점 이름을 잃어가는 대신 그걸 애타게 기다리는 존재들은 무궁무진했다.
장군바위가 버티고 선 발산2리 마을에 가까워지면 도로와 바다의 간극은 급격히 좁아지고, 그마저도 수해로 길이 유실된 부분이 많아 다시 929 도로에 합류하여 발산2리에 진입하게 되는데 이 길의 경우 파도를 상쇄시킬 만한 갯바위가 없어 파도의 기세가 어느 곳보다 거세어 미쳐 바다로 돌아가지 못한 바다가 길에 흥건해 지날 때엔 파도가 물러난 틈을 기다려야만 했다.
갯바위 하나가 마치 히말라야의 바위 산을 축소시켜 놓은 품새였다.
저기에 눈이 내려 하얗게 덮인 설경도 나름 멋지겠다.
수해의 상처가 그대로 드러난 해안둘레길 이정표는 지난번 여정에서도 저렇게 위태롭게 자리를 지켰는데 이번에도 크게 다를 건 없었다.
그래도 네가 있어 다행이다.
여기서부터 929 도로에 합류하여 딱 한 사람 정도 지날 수 있는 도로가로 걸었다.
발산2리 발산항이 인척으로 가까워질 무렵 바다의 수해 뿐만 아니라 산에서 밀려 내려온 수해도 확연히 눈에 띄었다.
지난번 방문 바로 전에 태풍과 폭풍으로 인하여 해안둘레길도 유실되었지만 산사태로 토사가 밀려 내려오면서 나무까지 도로를 덮쳤던 현장을 봤었다.
워낙 상흔이 컸던지 아직 복구 중이긴 해도 지난번에 비해 많이 정돈된 모습이었다.
도로가 공간이 거의 없어 도보 중에 차량이 다닐 땐 좀 아찔한데 그래도 통행이 적은 곳이라 그나마 다행이었다.
이런 갯바위가 있었다.
발산2리 마을에 들어서기 전, 여긴 해안둘레길의 형체가 있어 다시 도로를 벗어나 이 길로 잠시 걸었다.
역시 감정이 없는 아스팔트는 도저히 구현할 수 없는 풍미가 있다.
다만 해안둘레길에서 길의 형태가 제각각이라고 해서 어느 하나 우위를 논할 수 없었다.
적재적소에 주변 풍광과 어울리는 길의 형태를 고심했을 거고, 그래서 길의 본질과 낭만은 여전히 그 길에 서려있기 때문이었다.
위와 같은 장군바위에 다다르기 전에 해안둘레길이 끝나고 갯바위를 넘어서 다시 도로로 접어들었다.
몽돌해변이라 불러도 좋을 만큼 해변엔 몽돌만 있었다.
해안둘레길에 돌을 엮어서 만든 길이 끝나 다시 도로에 합류, 바로 장군바위에 도착했다.
발산항의 장군바위는 도로 바로 옆 해변에 우뚝 선 바위로 거대 기암은 아니지만 해변에 홀로 선 바위의 모습이 마치 마을 뿐만 아니라 동해 건너 걸핏하면 침략하던 쪽빠리를 지키기 위함이 아니었나 싶었다.
게다가 훈장처럼 매달린 소나무 한 그루조차 범상했다.
장군께 인사드리고 가던 방향으로 다시 걸음을 재촉했는데 장군바위 너머 수해로 인한 흉터가 보였다.
발산항에 도착.
지금까지 지나쳤던 여느 마을의 작은 포구처럼 적적했고, 유일하게 적막을 깨는 건 허공을 분주히 유영하며 걸판지게 수다를 떠는 갈매기만 떠들썩했다.
발산항을 지나면 해안둘레길을 통틀어 가장 기나긴 공백지대가 기다리고 있었고, 역설적으로 자연의 역할이 더욱 극대화된 구간이기도 했다.
그리고 해안둘레길 이정표를 통해 종종 봤던 모감주나무와 병아리꽃나무 군락지가 마을 뒤편 언덕에 있었는데 바다와 길에 너무 집중한 나머지 이번에도 거기를 패쑤해 버렸다.
지나고 나서야 '아차!' 싶은 곳인데 어차피 겨울에 꽃을 기대하기 힘든 계절이라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게 아닐까?
모감주나무는 초여름에 노란꽃을, 병아리꽃은 4~5월에 하얀꽃을 틔우는데 가뜩이나 여름이면 사지가 축 늘어져 바다는 엄두를 못 내는데 병아리꽃은 가능하겠다.
병아리꽃은 바닷가 근처 낮은 산지나 섬에서 드물게 자라는 낙엽 활엽 떨기나무이다. 줄기는 모여나며, 높이 1.5~2.0m이다. 잎은 마주나며, 난형 또는 긴 난형, 4~10cm이다. 잎끝은 꼬리처럼 길게 뾰족해지고, 밑은 얕은 심장형 또는 둥글며, 잎 가장자리에 날카로운 겹톱니가 촘촘하게 있다. 잎 앞면은 짙은 녹색이고 주름이 지며 뒷면은 연한 녹색으로 털이 있다가 차츰 없어진다. 꽃은 4~5월에 햇가지 끝에 양성화가 1개씩 달리며 흰색이다. 꽃잎은 4개, 길이 1.5~2.5cm이고, 꽃 지름은 3~5cm이다. 열매는 수과이며 길이 7~8mm의 타원형, 9~10월에 검게 익고 윤이 난다. 우리나라 황해도, 경기도, 강원도, 경상북도 등 중부 지역 이남에 나며, 일본 혼슈, 중국 동부~중북부 등에 분포한다. 기온에 대한 적응력이 강해서 널리 심을 수 있으며, 꽃이 아름다워 관상 가치가 높은 생물자원이다. 관상용으로 심는다.
[출처] 국립생물자원관_병아리꽃나무
해안둘레길 전 구간에 걸쳐 소규모의 산발적으로 열거되어 있는 몽돌해변 또한 발산항을 지나 바다와 만나는 시점에 소소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원래 발산항 일대 마을 인가가 많았을 거라 예측되는 게 전형적인 어촌마을 인가는 높은 밀도로 붙어 있는데 인가 사이 듬성듬성 사택 하나 규모의 밭이나 빈터가 보였다.
발산항을 지나 해안과 맞닿은 언덕이 있어 그 작은 틈에 차량 한 대가 지날 정도의 길이 있고, 길과 언덕 사이 넓지 않은 공간에 민가가 있어 자연적 길에 민가의 살림살이들이 널브러진 게 보였다.
그래서 길이 진행하는 방향으로 민가가 길게 늘어선 모습이지만 협소한 공간으로 인해 규모가 큰 민가는 없었고, 마을 규모에 비해 꽤 긴 구간에 민가가 줄지어 늘어서 있었다.
호미곶까지 9.4km, 구룡소까지 1.1km 남았단다.
출발할 때에 비해 구름이 무거워졌고, 마치 금방 비가 내리더라도 하등 이상할 게 없는 하늘이었다.
비야, 조금만 더 참아주렴.
포장된 길이 끝날 무렵, 갯바위가 길을 막아섰다.
그 바위 너머 파란 지붕의 민가가 이 마을의 마지막 집으로 거기를 지나면 해안둘레길에서 가장 원시적인 길의 형태를 알려줬다.
파란 지붕을 끝으로 민가는 소멸하고, 가끔 마주치는 사람들이 반가웠다.
정말 원시적인 해안의 형태로 정취가 급격히 변화되고, 마주치는 사람들이 거의 없는 구간의 시작이었다.
실제 여기서부터 구룡소까지 지난번엔 한 사람, 이번엔 맞은편에서 다가와 마주친 한 사람과 같은 방향으로 진행하는 두 사람이 전부였다.
해안둘레길에 들쭉날쭉하게 서 있는 갯바위를 지나면 이렇게 길의 명맥을 유지했다.
길 바로 옆에 찰랑이는 파도가 끊임없이 두드리는 해안둘레길의 매력, 처음과 마찬가지로 그 매력과 흥미는 전혀 반감되지 않았고, 그만큼 내게 있어 해안둘레길만의 이런 정취는 다시 여기를 올 수밖에 없도록 마음을 사로잡았다.
작은 갯바위에 가마우지가 모여 망중한을 즐기고 있었다.
아른거리는 기억에 민물가마우지로 물고기를 잡는 나라가 있는 반면에 가마우지로 인해 어부들의 생계 위협으로 일일이 잡아서 저세상으로 보내는 나라가 있단다.
내몽골이었던가?
지난번처럼 이 모퉁이를 돌아 잠시 자갈밭에 퍼질러 앉아 잠시 심호흡했다.
앞서 해안 절벽들에 비해 더 높지만 확연한 특징이 없는 곳이라 그런지 이 구간을 지나는 사람은 거의 없었지만 이 절벽 또한 하나의 거대한 암반인 양 이음새가 없을 정도였다.
자갈밭에 퍼질러 앉아 고개를 올려 바위 절벽을 바라봤다.
금세 앞으로 넘어질 것처럼 아찔한데 그 척박한 절벽에서도 생명이 살아가는 걸 보면 삶에 대한 욕망과 집착은 생명의 본능이라 인본주의는 사실상 인간의 가장 우매하고 실패한 철학이었다.
이 자리에 앉아 음악 소리를 한껏 올리면 절벽에서 굴절되는 음파가 증폭되어 거대한 공연장에 온 착각이 들기도 했다.
예전 민간인 출입 금지 시절에 이런 기밀 시설의 흔적은 그대로 남아 있는데 이 잔해들이 무척 흉물스러웠다.
일반인 공개로 전환되며 사람의 출입이 없어지자 수풀이 그대로 자라며 그 빈자리를 메우기 시작했지만 일종의 과정에서 오는 어설픈 윤곽으로 인해 너저분하게 방치된 티가 너무 짙고, 관리 또한 안 되어 여기저기 무너지거나 붕괴 직전 상태라 이런 야생의 자연에 전혀 어울리지 않은 탓이었다.
최소한 이 해안을 걷는 동안 길의 형태는 사치와 같았다.
길 흔적은 전혀 없지만 단지 해안이라는 암묵적인 학습으로 인해 길이려니 하고 걷는 구간이기도 했다.
전방에서 조금 연세 있으신 분이 걸어오셨다.
해안과 잠시 작별하는 시간.
저 오르막 계단길부터 산길이 되고, 파도소리는 아득해졌다.
어느 여성분이 여기서 앞질러 갔는데 어찌나 걸음이 빠른지 구룡소 일대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을 정도라 행여 길과 마을을 지키는 수호신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계단에 올라 위로 오르기 전, 왜 여기서 길이 언덕으로 향하는지 알 수 있었다.
도무지 길이 비집고 들어갈 틈이 전혀 없었고, 이따금 바위로 치고 올라오는 파도의 기세는 간담을 서늘하게 할 정도.
짧은 오르막 계단을 오르면 본격적인 산길로 쭉 이어지는데 군데군데 철장이나 기묘한 시설의 흔적을 보면 과거 군사 시설이 있었음을 어림 짐작할 수 있었다.
경사도가 완만해지는 길은 한 사람이 지날 정도의 폭으로 길 좌측은 가파른 경사도 아래 바다가 있었다.
언덕길을 조금 진행하다 보면 타이어로 다져놓은 내리막 계단이 있고, 작지만 외부와 격리된 골짜기에 작은 해변이 닿아 있는 무척 적막한 곳이었다.
해변으로 걷다 보면 다시 언덕으로 향한 오르막길이 나오고 앞서와 같이 호젓한 산길로 이어졌다.
지난번 기억이 되살아나 이 언덕만 넘어서면 구룡소가 나오고, 일대 지형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발아래 바다가 꿈틀대는 것도, 인적이 거의 없는 오지와 같은 정취의 산길 또한 워낙 독특했기 때문에 단 한 번 여행했던 기억이 있었음에도 세세한 건 몰라도 전체적인 길의 흐름과 길섶 풍경들이 생생하다는 게 신기했다.
구룡소는 포항시 남구 호미곶면 대동배리 바닷가에 위치하는 연못과 같은 지형이다. 구룡소라는 이름은 과거 이곳에 아홉 마리의 용이 살다가 승천하였다고 하여 붙여졌다. 전설 속 아홉 마리의 용이 살았던 연못은 구룡소 지역 곳곳에 남아있으며, 이것은 사실 머린포트홀(해안형 돌개구멍)이다. 머린포트홀은 파도를 따라 자갈이 움직이면서 집괴암을 깎아 만든 접시 모양의 구조이며, 이곳에 바닷물이 채워지면서 연못처럼 보이게 되었다.
[출처] 대한민국 구석구석_구룡소 돌개구멍
문명의 소음이 거의 없는 산과 해변을 지나면 멋진 전망과 함께 전설이 잠들어 있는 구룡소가 도착 전에 가지 사이로 모습을 드러냈다.
구룡소에 도착하여 한참을 머물렀음에도 지난번처럼 용의 포효하는 울림은 듣지 못했다.
파도가 거칠수록 망망대해 여러 이야기를 간직한 파도가 용의 욕구를 자극하여 포효는 더욱 우렁찬데 파도가 약한 날이라 귀 기울이면 작게나마 소리만 들릴 뿐, 바위틈으로 용솟음치듯 뿜어져 나오는 하얀 물보라는 전혀 없었기에 조금 아쉽긴 했다.
파도가 센 것 또한 어딘가 역할이 있구나 싶었다.
그래도 용의 포효가 아니더라도 시각적인 볼거리는 충분했고, 그와 더해 설화와 경험에 의한 스키마로 일대 전경은 충분히 신비로웠다.
바위 절벽 아래 마치 손으로 주무른 것처럼 기암의 형태는 교묘히 짜여 있었다.-사진이 없는 게 미스터리-
구룡소에서 대동배 마을로 내려가면 왔던 길과 대비해 말도 안 되는 거리와 접근성을 가지고 있어 과정을 건너뛰고 차라리 구룡소만 즐긴다면 대동배 마을에서 해안을 따라오는 게 훨씬 낫지만 내 경우 과정을 즐기기 위함이라 애시당초 몸이 편한 방식은 여정에서 만큼은 거부했다.
그래서 몸이 지치고 아프면 걍 드러누워 버린다!
구룡소에서 해안을 따라 포장된 길을 걸어오면 헤어졌던 929 도로를 만날 수 있었는데 여기서 최종 목적지까지 7.5km 남았다.
어찌 보면 해안둘레길 중 대동배 마을에서 산으로 우회하는 길을 선택하지 않는다면 난코스는 거의 없어진 셈이었다.
대동배 1리를 관통하며 습관적으로 왔던 길을 되돌아봤다.
기암에 걸친 구룡소 전망대가 보이는데 이 또한 절경의 일부라 할 수 있겠다.
대동배 1리 포구를 지나며, 바다에 정박 중인 선박들과 더불어 이 마을 또한 지나쳐왔던 어촌마을처럼 한적한 분위기가 마을 전체를 은은히 밝혔다.
이따금 허공을 유영하는 갈매기는 정적을 깨고 느려진 시간의 심장에 심폐소생술을 하고 있었다.
대동배 1리 대동배교회에서 우회하여 산길로 안내하는 호미반도 해안둘레길을 외면하고 해안과 밀착하여 대동배 2리로 향하는 929 도로변을 걸어 다음 마을, 대동배 2리에 도착했다.
비교적 마을 규모가 작은데 반해 인가에는 밀도감이 높았고, 여느 마을처럼 평온이 도사리고 있었다.
도로변을 따라 걷는 사이 걷기가 수월해진 틈을 이용해 피로감이 스멀스멀 몰려들기 시작했고, 그 피로감에 딱딱한 아스팔트가 싫증 나기 시작할 무렵 해안둘레길은 다시 포장된 딱딱함을 버리고 바다로 향했다.
방파제를 지나는 시점에서 반가운 이정표가 응원했다.
이제 최종 목적지인 호미곶까지 5.7km 남았다고, 도로를 걷는 동안 무미건조해진 시선에 온기를 불어넣는 바다 데크길이 전방에서 기다리며, 호미반도 해안둘레길 3코스인 구룡소길은 작별을 고했다.
이제 즐긴 시간보다 앞으로 즐겨야 될 시간이 적은, 길의 끝에 다다를 일만 남았다.
충분히 즐겼다고 생각했음에도 계절이 끝나갈 무렵 드는 아쉬움처럼 그렇게 여정의 아쉬움은 벌써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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