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 자연 그리고 만남

둘레길의 끝에 작은 성취감, 호미반도 해안둘레길 4코스_20240117

사려울 2024. 4. 2. 21:08

시작엔 끝이 있고, 끝 또한 시작과 필연의 연결 고리를 가진다.
하나가 지날 즈음 또 다른 하나가, 길이 희미해지면 어느새 다시 선명해지고, 드넓은 바다에 한 꺼풀 파도가 결 주름 지으면 이내 다른 파도의 결이 하얀 선을 긋는다.
그 이중적인 공존이 거듭될수록 길섶은 어느샌가 착색된 의도를 벗겨내고 농후한 자연의 속성에 한 발짝 다가섰다.
해안둘레길에 디딘 발걸음은 어느새 깊은 자연에 은둔 중인 구룡소를 만나게 되는데 바다의 온순함이 되려 바위 속에 숨은 용의 은신이 되어 진중한 포효는 들을 수 없었지만 이 모든 존재의 유기적인 결합으로 인해 어느 하나에 집중하고 실망할 필요 없었다.
자연의 호흡과 맥박이 멈추지 않는 한 감흥의 역치는 변함없기 때문이었다.

 

원시적인 해안길을 찬양하며, 호미반도 해안둘레길2_20230508

길은 오직 하나를 위한 이기적인 상형문자가 아니다. 앞서 바다와 인간 사이 교묘한 교착점이 길의 화두였다면 구룡소 일대 길은 야생의 바다에 인간의 발자취가 잠시 후퇴한 길이면서 회피하

meta-roid.tistory.com

대동배 2리에서 해안둘레길은 입던 옷을 벗어던지고 새 옷을 갈아입었다.

그와 동시에 길의 정취도 확연히 달라졌는데 구룡소길이 원시적인 형태였다면 4코스인 호미길은 다시 매끈하게 가공된 형태로 변신했고, 다만 2코스인 선바우길과 다른 점이라면 근래 가공한 것보단 토착민들의 삶의 정수가 녹아들어 이쁘기보단 소박한 정취가 가득했다.

바다 데크길 또한 대동배 2리에서 구만리로 넘어오는 지점이 마지막으로 인적이 수시로 오가던 선바우길과 달리 호미길은 전체적으로 고요했고, 다만 마지막 목적지인 호미곶에 다다르면 그간 아껴두었던 인적의 연모를 터트리듯 인파 수준으로 급격히 변했다.

아스팔트의 딱딱한 길에 무척 건조해져 있었던 건지 대동배 2리를 지나자마자 만난 바다 데크길이 무척 반가웠다.

게다가 거대 바위 절벽이 연이어 펼쳐지는데 마치 거대한 하나의 무리 같을 만큼 이음새를 찾아보기 힘들었다, 아니 귀찮아졌다.

그냥 보이는 대로 즐기고 싶어진 게 더 솔직한 심정이기 때문이었다.

첫 번째 데크길과 다음 데크길 사이 몽돌해변은 여전히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숨기려 하지 않았다.

널브러진 오래된 나뭇가지들과 해변으로 밀려든 생활 쓰레기가 뒤엉켜 있었고, 바다와 언덕 사이 폭이 좁은 해변에 돌은 거친 바다와 이제 막 언덕에서 알처럼 탄생한 천둥벌거숭이처럼 모양도, 크기도 제각각이었다.

딛는 발걸음마다 '촵촵'거리며 서로 엉키고 설키는 웃음소리를 냈고, 그 소리가 무거워진 걸음에 활력이 될 줄이야.

거대한 바위 절벽을 지날 때 마치 어디서 본 것처럼 낯설지 않았는데 모아이상 바위란다.

정면에서 보면 환상이 깨지는데 이와 같은 구조에서는 영락없이 모아이 석상이거나 아님 영화에서 종종 보던 마스크 옆모습 같았다.

굳이 누군가 인공적으로 조각한 게 아니겠지?

모아이상 바위를 끼고 우측으로 휘어지는 데크길을 조금 더 걸어가면 최종적으로 바다 데크길이 끝나는데 이 길을 기획한 분들도 아쉬웠는지 마지막 길 끝을 전망대처럼 높이 올리곤 마무리했다.

굳이 전망대처럼 해놓지 않았지만 황토색과 금빛이 뒤섞인 바위를 올라 그 바위의 특이한 빛깔을 감상하면서 앞으로 가야 될 방향을 살필 수 있도록 길은 따스한 배려를 했다.

데크길이 끝나고 길의 형체가 희미해지긴 해도 여전히 길을 인지할 수 있는 수준이었고, 그 일대엔 황톳빛 바위와 그 바위의 잔해들로 채워져 있었다.

길을 걷다 다시 특이한 형상의 바위 앞에 멈췄다.

새의 부리 같기도 한데 전체적인 형상은 하늘로 향하고 있는 무언가임에 틀림없었다.

희미하던 길의 형체는 다시 명확하게 드러났다.

동네에 종종 보이는 무장애 황톳길처럼 길은 땅 위에 단단히 누워 유연한 곡선을 그리고 있었는데 바로 옆엔 다시 바다가 다가와 찰랑이는 이야기를 들려줬다.

멀리 구만리에 들어선 멋진 숙박시설도, 그 아래 맑디맑은 동해 바다도, 무겁지만 하늘의 명쾌한 푸르름도 한데 어우러져 멋진 액자 같았다.

그와 동시에 발걸음에도 힘이 실렸다.

해안둘레길은 구만리 초입에 인가가 거의 없는 방파제를 지나 구만길에 합류, 완만한 오르막으로 조금 더 진행하자 멋진 바다 전망의 작은 공터에 시비가 자리 잡고 있었다.

월보 서상만 시인의 시비와 함께 지친 걸음을 잠시 쉬어갈 수 있도록 벤치도 자리 잡고 있었고, 까마득히 먼 내륙의 해안선도 육안으로 충분히 관찰할 수 있었다.

아마도 쨍하게 맑고 청명한 날이면 영덕 숙소 일대도 훤히 보이겠다.

시비를 지나 갈림길이 나왔고, 우측 길은 929 도로에 합류하는 오르막이며, 좌측 길은 해안선을 따라 계속 진행하는 뿌듯한 내리막이었다.

물론 머뭇거릴 새 없이 해안선을 따라 시원하게 뻗은 좌측길을 밟았고, 드문드문 널려 있던 인가와 달리 멋진 숙박 시설들이 연이어 고개를 내밀었다.

오후 3시 52분.

구만 방파제를 지나며 또다시 습관적으로 왔던 길을 되돌아봤다.

해안둘레길은 바다와 언덕 사이 위태로운 공간을 교묘히 파고들었고, 그 너머 남서쪽 하늘엔 얇은 구름 틈바구니로 햇살이 엷게 내비쳤다.

아마도 이게 하루의 마지막 햇살 아니었나 싶었던 게 점점 구름이 무거워지더니 호미곶에 가까운 포구를 지날 무렵부터 빗방울이 떨어졌고, 다행히 방수 재킷을 겉에 껴입은 덕에 적당히 비를 맞으면서도 크게 젖을 걱정을 덜어 끝까지 여정에 집중할 수 있었다.

테트라포드에 둘러싸인 구만 방파제를 지나며 반가운 '해파랑길'이란 문구에 시선이 닿았다.

크게 보면 해파랑길이고 세세히 보면 호미반도 해안둘레길이라 단순히 그 문자에도 설렐 수밖에 없었다.

구만방파제 옆에 이런 구조물도 보였는데 자연이 만든 것 같기도 하고, 어찌 보면 인공 구조물 같기도 했다.

전체가 하나의 바위 같아 자연 구조물 같고, 너무 매끈하게 곡면을 그리고 있어 인간이 필요에 의해 만든 게 아닌가 싶기도 했으니까.

조금은 이국적인 정취, 흔한 도로에서 느낄 수 없는 한적하고 서늘한 느낌.

틀어놓은 음악의 볼륨을 올려 텅 빈 도로에서의 자유감 또한 확장시켰다.

선바우길과 구룡소길을 지나며 곁에 선 바다의 느낌과 사뭇 다르게 하나의 얕은 벽이 존재하는 길이 바로 호미길이라 하겠다.

겨울이 마냥 건조하고 삭막한 게 아니라 이런 정취에선 기가 막히게 잘 어울릴 만큼 이국적인 풍경에 마치 양념을 가미한 느낌이었다.

짧은 공백 지대에서 그 흐름에 변화는 바다 전망의 멋진 카페, 벨마레로 여긴 회사 사우가 추천해 준 곳이었지만 이번엔 인연이 아니었다.

어디선가 트럭 한 대가 카페 앞에 정차하더니 물품을 내리곤 쏜살처럼 어디론가 사라졌고, 잠시 기다려볼까 주저하다 오후 4시가 막 넘어서는 시점이라 아직은 겨울 낮이 짧아 가던 속도만 늦추고 머무르지 않기로 했다.

카페벨마레에서 커피 한 잔을 한다면 겨울 바다 내음에 도치되는 여기에서 마셔야 되겠다.

멀리 희끄무레한 내륙 사이에 바다를 두고 어디선가 불어오는 차디찬 바람을 뺨으로 느끼며 즐기는 커피가 내면에 코튼 이불처럼 양면의 알싸함을 느끼게 해 주지 않을까?

아니면 그저 발아래 바다를 둔 것만으로도 이번 여행의 풍미를 가장 잘 읽고 이해하는 과정일 수 있겠다.

카페를 지나 조금 더 걷다 보면 작은 소나무숲이 자리를 잡고 바다에 넋을 잃었다.

여기 또한 벤치에 앉아 잠시 감상하고 싶긴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겨울밤이 찾아오는 데다 조만간 빗방울이 떨어질 분위기라 걷는 속도를 조금 올렸다.

하얀사랑 연수원이라 지칭된 곳을 지날 때 명칭처럼 하얀 건물이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지금은 운영을 하지 않은 채 시간이 오래 지난 건지 건물의 하얀색이 변색되어 시간의 흔적을 전혀 가릴 수 없을 만큼 얼룩과 변질이 그대로 드러났다.

이 길만의 색다른 정취가 있긴 했으나 굳이 따지자면 요건 옥에 티랄까?

하얀사랑 연수원과 해맞이터를 지나면 지난번 지나쳤던 독수리바위 전망대가 있었다.

전망대 바로 앞바다는 자연 방파제가 있어 특히나 잔잔하던 파도조차 힘을 잃고 하얀 이빨을 숨긴 채 살며시 밀려들었고, 영일만 너머 수평선에 올라탄 뭍은 섬에서 바라보는 역동적인 정취를 그대로 품었다.

독수리바위는 오랜 세월 동안 풍화작용으로 인해 조각된 바위의 형상이 독수리의 부리를 닮은 바위이다. 본래 이 지역은 풍파가 심하면 고기(청어)가 밀려나오는 경우가 허다하여 까꾸리(갈고리의 방언)로 끌었다는 뜻에서 지어진 지명으로 [까꾸리개]라고도 부른다. 독수리바위를 가까이서 조망할 수 있는 곳으로 내려가면 바닥에 독수리 트릭아트가 그려져 있고, 인근에는 갈매기 조형물도 있다.
호미곶의 땅끝인 이곳에서 서쪽으로 지는 석양의 노을을 바라보면 대흥산 너머 층층의 산과 시가지, 일렁이는 포스코 굴뚝이 보이는데 그 모습이 동양화를 연상케 하는 절경이다.
[출처] 독수리바위_대한민국 구석구석
 

포항 독수리바위> 여행지 :대한민국 구석구석

포항 독수리바위

korean.visitkorea.or.kr

독수리의 힘일까?

그리 희박하던 인적은 여기서부터 시작하여 호미곶에 이르기까지 점점 많아졌고, 지금까지 걸었던 길의 연장선상임에도 길섶의 풍경들은 말끔한 어촌 마을로 점점 변모해 갔다.

더불어 호미곶의 끝이자 육지가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다는 좌절의 진풍경인 양 매끈한 여느 관광지처럼 세련된 숙박시설이나 공원들이 공백을 채웠다.

독수리바위를 지나 해안도로를 계속해서 걷던 중 지금까지와 조금은 색다른 파도가 밀려왔다 물러났다를 반복했다.

그만큼 하루 종일 잔잔하던 바다와 대조될 정도로 파도의 끝에 힘이 실려 하얀 물보라를 일으키며 힘찬 소리를 동반했다.

불꽃이 타올랐다 그대로 바위가 된 듯한 기암괴석은 호미곶에서 방위상 가장 북쪽 끝에 위치했고, 지난번엔 밀물이 들어차 있어 실수로 발을 빠뜨려 발이 홀라당 젖어 버렸으나, 이번엔 썰물인 듯 바위까지 바닷물이 빠져 있었다.

그래도 변함없는 건 반도 끝 특유의 낭만과 고독이 공존했다.

가칭 불꽃바위도, 독수리바위도 그런 기제를 표현한 게 아닐까?

스타스케이프라는 비교적 규모가 있는 숙박시설을 지나는데 얼핏 보더라도 꽤 좋아 보였다.

호미곶과 가까운 해안엔 자연 방파제가 많았다.

덕분에 동해에서 밀려드는 거센 파도의 예봉도 꺾어줌과 동시에 새들의 휴식처가 되기도 했다.

얼마나 갈매기가 많은지 여기서 새우깡을 하나 드는 순간 갈매기밥이 될 수 있겠다.

구만1리로 접어들어 해안 도로와 맞닿은 민가에 지난번 봤었던 턱시도냥이 축대에 쉬고 있었고, 행여 부르자 도로를 가로질러 다가와 몸을 문질렀다.

다행히 지난번 경험으로 츄르를 넉넉히 챙겼는데 녀석에게 실컷 주자 허피스에 걸린 소리로 냥냥거리며 따라왔고, 얼굴 부위를 스담스담하자 녀석이 손바닥을 잡더니 꽉 물어 버렸다.

발톱이 얼마나 날카로운지 손꼬락에 구멍이 뚫리고 빨간 선혈이 맺혔다.

욘석아, 그러면 연신 몸을 비비지 말던가.

그래도 다음에 볼 때까지 건강하게 잘 지내렴.

해안둘레길은 포구를 관통하여 등대 박물관 방면으로 진행했는데 연오랑세오녀 테마공원에서 출발하여 여기까지 오는 동안 가장 큰 포구가 바로 호미곶항이었고, 전체적으로 인가도 많아 꽤 활기가 넘쳤다.

독수리바위에서 시작된 간헐적인 보슬비가 여기를 지날 무렵 굵어지기 시작해 길이 젖어들었다.

나도 내가 이쁜 줄 안다규~

호미곶항에 진입하고 나서 포구 따라 걸어 반대편에 도착, 포구 일대 규모가 제법 컸다.

호미곶해수탕 주차장을 지나서부터 해안 데크길로 따라가면 최종 목적지인 호미곶과 상생의 발이 나오게 되는데 빗줄기가 확연하게 굵어져 거리에 남아 있던 사람들도 바삐 자리를 떠나버렸다.

적막강산에서 그나마 빛이 뿜어져 나온 곳은 등대 박물관이었다.

내부는 전혀 모르지만 통유리창 너머 내부를 봤을 때 여러 테마가 있었고, 박물관답게 호미곶 등대의 지난날의 모습이 순차적으로 남아있지 않을까?

오후 4:55

시간적인 여유가 조금 더 있었더라면 등대가 지나온 날들에 귀를 기울여 보는 건데, 아까비!

등대 박물관을 지나면 실제 등대의 모습이 보였다.

오후 4:59

장장 5시간 반을 걸어 최종 목적지 호미곶에 도착했다.

오는 동안 충분히 둘러보며 사진으로 담거나 감상을 했고, 그렇게 담담히 호미곶에 도착하자 거대 문어가 손을 들어 반겨줬다.

전망대에서 동해는 더욱 거대하고 거칠고 진중해 보였다.

호미곶에 도착할 무렵엔 방수 재킷이 없었다면 금세 홀라당 젖을 빗줄기가 내렸고, 최종 목적지에 발을 딛자 내리는 비에 조바심은 전혀 없어 옷이 젖든가 말든가 별 관심이 없었다.

정각 17시.

이미 해는 지고, 잔해만 남아 호미곶을 밝혔다.

전망대에서 상생의 손과 건너 광장은 비의 습격으로 사람들이 뿔뿔이 흩어져 한적했는데 이렇게 손등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비의 습격이 있어도 그나마 호미곶에서 드물던 인적을 만났고, 그 인적 또한 꾸준히 오고 가는 사람들 덕분에 발길이 끊이지는 않았다.

손은 언제나처럼 수평선 위로 손을 뻗어 하늘을 떠받들었다.

확실히 썰물이라 바다 수위가 낮았다.

굵은 빗줄기가 바다에 떨어져 연신 수면에 점을 찍어댔다.

다른 건 몰라도 신발 내부가 살짝 젖었지만 어차피 젖은 데다 이제 더 이상 긴 도보 여정이 없어 크게 개의치 않고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맞은편 광장 방면에도 대칭적으로 손이 하늘을 떠받든 채 굳어 있었다.

호미반도 해안둘레길의 여정을 끝맺으며, 타는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지난번 들렀던 카페로 향했으나, 다른 상점으로 리뉴얼된 상태였던 데다 해가 지며 굵은 빗줄기가 그칠 줄 모르고, 땅거미도 점점 희미해지자 많은 상점들이 문을 닫아 버려 어쩔 수 없이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언제 버스가 올 지 몰라 반대 방면의 불 켜진 버스 부스에서 기다리는데 서둘러 비를 피하던 한 가족과 외국계 여성 2명도 버스 부스 내부에 머물렀지만, 구룡포행 버스에 모두 타버린 뒤 홀로 머물렀다.

지난번 호미반도 해안둘레길 여정에서 미리 찍어놓은 버스 배차 시각표가 생각 나 살펴보자 17:50행 버스가 보여 미리 정류장에 서서 너른 유채꽃 벌판의 땅거미에 기대었다.

차량과 병행한 대중교통 여행은 늘 불편함과 친숙함이라는 이중적인 매력이 공존했다.

30여분 버스를 타고 출발지였던 연오랑세오녀 테마공원 주차장에 도착, 일월대는 출입 통제 중이라 그 아래에서 포항 야경에 도치되었다.

백팩에 있던 컵라면과 비엔나 소시지를 꺼내 텅 빈 공원에서 멋진 야경을 반찬 삼아 허기진 속을 달랬다.

 

연오랑세오녀 테마공원에서 출발하여 호미반도 해안둘레길 따라 호미곶까지 약 18km를 걸어서 도착, 적당한 피로감과 성취감을 적립시켰다.
앞서 선바우길은 바다의 본질을 잃지 않으면서 길에 구현할 수 있는 어촌의 정취가 깊게 베어 소소한 아름다움을 구현했다면 구룡소길은 바다와 해안의 날 것 그대로를 최소한의 가공으로 구현했고, 호미길은 바다와 해안의 특색을 그대로 살린 이전 테마와 달리 사람이 살아가는 맛을 최대한 가미한 데다 특히 호미곶 일대 마을은 지금까지와 비교해 가장 크고 넓으며, 또한 이전까지 산과 바다의 비좁은 틈을 경유했다면 여긴 너른 평원과 정박 중인 배가 빼곡할 만큼 포구의 규모도 컸다.
해안에 간헐적으로 솟은 기암도 지금까지와 달리 마치 살아 비상하는 것처럼 역동적이었고, 바람살도 거셌다.
호미곶에 다다라 떨어지기 시작하는 빗줄기가 순식간에 일대를 을씨년스럽게 변모시킨 건 비단 보슬비 때문이 아니라 겨울 하루 시간이 꺼져갈 때 잠재된 허무의 마법 아니겠나.
늘 그렇다.
시작할 때 두려움과 의문은 철저히 잊혀졌고, 끝날 때 성취로 인한 효능감과 더불어 지난 것들에 대한 소중함은 머릿속 공식을 거쳐 가슴속 뜨거운 희열로 타올랐다.
드물게 운행하는 버스를 홀로 탄 채 하늘의 불빛이 꺼지고, 땅거미가 가라앉고, 문명의 오색등이 켜지면 하루 동안 스친 세상들을 조각조각 포개어 마음 불꽃을 피웠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