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 자연 그리고 만남

날 것 그대로의 해변을 따라, 축산 해파랑길_20220315

사려울 2023. 2. 20. 18:58

앞서 해파랑길 20코스를 여행했다면 축산에서 해맞이공원까지는 21코스란다.
군사 목적의 잔해가 꽤 많이 보이지만 이제는 철거되어 이내 잊혀지고, 그 철조망에 고립되었던 원시의 해안이 기지개를 켜며 도리어 문명의 피로감을 바다로 날려줬다. 
소나기처럼 쏟아지는 봄햇살 아래 세상이 잊고 지내던 작은 마을은 부러움조차 잊었는지 무심한 자연의 날갯짓으로 쉴 새 없이 해풍 위 중력의 끈을 엮어나갔다.
작은 음악 소리를 벗 삼아 시작된 막역한 걸음은 해 질 무렵 아름다운 광시곡이 가르쳐준 길 위의 산책이 되어 파도 소리에 맞춰 사뿐한 춤사위가 되었다. 
해안을 따라 굴곡진 길과 달리 언덕 언저리에 붙은 길은 함께 평행을 그릴지언정 그 모습과 느낌은 사뭇 달랐다.
이왕 동해 바다를 만날 거라면, 또한 지나치게 가공된 길에 잠시 등질 거라면 해안길이 멋진 대안이자 어딘지 모를 가려움을 속시원히 긁어줬다.
마치 증발된 세상에 혼자 남은 사념 마냥 멍하니 앉아 무심히 자연소리에 섞인 음악소리와 마주한 게 언제였던가 까마득했다.

죽도산에서 내려와 해파랑길로 가기 위해서는 블루로드현수교를 건너야 했는데 현수교는 사람만 이용하는 게 아니었는지 갈매기가 절도 있게 한 줄로 서서 쉬고 있었다.

현수교를 건너며 죽도산 전망대를 지나온 죽도산 전망대를 되돌아봤다.

죽도산 블루로드현수교를 건너면 해변을 관통해야 되는데 이름 모를 해변은 규모가 작은데 반해 외견상 꽤 깔쌈한 숙박시설이 있었고, 모래 알갱이는 무척 특이했다.

현수교는 축산천 하구를 건너는 다리로 약간 출렁이긴 했지만 여타 관광지에 우후죽순처럼 들어선 출렁다리에 비해 아담하고 덜 출렁거렸다.

해변 모래는 모래이기보단 차라리 앙증맞은 자갈에 더 가까웠다.

바다와 가까울수록 모래알은 굵고, 멀어질수록 부드럽고 작았다.

이렇게 보면 모래알이 무척 이쁘다.

해변 가장자리인 바깥 모래는 결정이 가장 작고 부드러웠지만 일반 모래에 비하면 결정이 굵고 미세한 먼지가 없었다.

이렇게 바다와 인접할수록 모래알은 점점 굵어졌는데 이런 해변을 밟고 걷는 느낌이 의외로 좋았다.

이렇게 보면 표가 날까?

바다 인접한 곳은 결정체가 굵고 점점 멀어지고 가장자리로 갈수록 결정체가 가늘고 부드러웠다.

톳인가?

가끔 횟집에서 맛나게 먹은 것과 슷비슷비하게 생겼는데 동글동글한 건 뭐지?

해변의 특이한 모래를 감상하는 사이 해변 건너편 해파랑길 입구가 어렴풋이 보였다.

해변에 깔쌈한 숙박시설은 씨포트리조트로 그 경관과 더불어 아담하면서 조용한 해변이 멋져 다음에 이용해 봐야 될 각이었다.

해파랑길 입구에 접어들어 많은 바위들이 모여 있었고, 그 바위들은 마치 번뜩이는 용암이 메듀사의 눈빛에 그대로 굳은 것만 같았다.

이렇게 멋진 해변이 지도상에서 이름이 없을 줄이야.

마그마가 출렁이는 듯한 기암이 뒤섞인 해변의 해파랑길을 따라 천천히 걸어갔다.

이렇게 날 것 느낌이 그대로 간직된 해변에서 바닷소리는 그들만의 대화인 양 여러 소리가 교차했고, 그 소리 너머엔 무거운 정적만 흘러 걷는 길에 한 발 한 발 발자국 소리 또한 하나의 언어가 되었다.

바다와 말미산 사이에 두 갈래 해파랑길이 있는데 갈 때엔 거친 바닷길로, 돌아올 때엔 말미산 소나무숲 길로 걸었고, 두 길은 거의 인척임에도 전혀 다른 느낌으로 인해 기분 또한 각색으로 착색되었다.

이쯤 진행되면 해변 해파랑길은 형체가 사라지고 내가 걸으며 밟는 곳이 길이 되었다.

모래는 세상 문명을 거부하는지 걸음걸이를 더디게 만들었고, 바다가 노래하는 소리는 앞서 들리는 것과 또 다른 결이었다.

이따금 뒤를 돌아보면 닿을 듯 가까이 문명의 교집합이 형성되어 있었음에도 기분은 세상과 차단된 곳에서 홀로 격리된 느낌이었다.

발이 빠지는 모래사장이 비교적 넓은 곳에 다다라 내딛는 속도는 해변에 맡긴 채 조바심 없이 걸었다.

지구가 태어나 두 시기가 만난 역사의 기록, 바위엔 그 두 시기의 중첩이 선명했다.

비교적 큰 모래 해변을 지나 바위 해변에 간신히 올랐다.

이 길에 흐르는 시간은 마치 거대한 수문에 갇힌 양 정체되어 있는 것만 같았다.

거대한 바위에 움푹 패인 곳은 보기와 달리 꽤나 깊었다.

뜨거운 열기에 출렁이며 서로 부딪히고 밀어내는 사이 시간은 멈춰버렸고, 거기에 끼어든 불청객은 덩달아 멈춘 시간에 갇혀 버렸다.

나무에게 나이테라는 시간의 흔적이 있고, 인간에겐 주름이 있듯 바위에도 시간의 무수한 흔적이 주름으로 새겨져 있었다.

그리도 당연하던 길이 희미해져 어딘가 있을 또 다른 길 찾기를 포기하고 잠시 쉬는 사이 하루 시간은 거의 꺼져갔고, 다시 만날 기약의 맹약만 남긴 채 다시 돌아가기로 했다.

멀리 죽도산은 한 없이 오그라들어 해변에 멀찍이 떨어진 섬처럼 다른 류의 세상 같았고, 한편으로는 고립된 요새 같았다.

전혀 모르던 지역에서 이런 경관을 보는 게 무척 고맙고 가슴 한 켠이 뿌듯했다.

돌아가는 길은 말미산 언저리 소나무숲길로 나무숲이 무성하고 길엔 소나무 낙엽이 자욱한 길이었는데 어느 순간 해변길과 점점 가까워지고 맞닿게 되어 있었다.

길 중턱에서 갈 때의 길을 뒤돌아 훑어본다.

두 갈래 길이 만나 왔던 길을 따라 걸었다.

아직 남은 낮과 함께 무사히 출발점으로 돌아온 안도를 뒤섞어 여기에 자리를 잡고 음악 소리를 부추겼다.

오직 파도 소리가 가득한 야생의 해변에 앉아 음악 소리에 심취한 사이 길을 따라 중년 부부 한 쌍이 지나 서둘러 음악 소리를 달랜 후 그분들이 멀어지길 기다렸다 다시 음악 소리를 부추겼다.

이때 심취한 노래가 임영웅의 '사랑은 도망가' 였다지?!

원곡도 좋지만 의외로 간결하고 거추장스런 감정의 데코가 배제된 이 보컬도 괜찮았다.

멋진 경관에서 울리는 음악 소리는 분명 그 울림의 격이 달랐다.

그 끝의 기분은 출발 때와 같은 설렘과 같은 순도로 남았고, 더불어 새로운 세상을 탐험한 성취감이 더해져 유희로 극에 달한 가슴을 고스란히 품은 채 짧지만 선 굵은 여정을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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