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나러 가는 발걸음이 이다지도 가볍고 설렐까?
텅 빈 도로에도 가을 빛결 흘러넘쳐 틀어 놓은 음악소리는 파도가 되고,
굽이치는 바람은 젖는 노가 되어 동심원 따라 항해하는 가을 대기에 심연에 숨어있던 자연의 자취가 총총히 발을 내딛는다.
울진에서 영양 수비로 가는 유일한 길인 917 지방도를 타기 위해 옥방에서 합류, 지나는 차량이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한적한 이 도로를 따라 영양 수비로 향하던 중 신암과 수하 경계 즈음 되는 고갯길 무렵에 잠시 가던 길을 멈추고 신암천 가을 정취를 포획했다.
거대하거나 특출나기보단 소소하게 숨어 있는 작은 가을 정취 또한 흘려 넘길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좋은 기회, 좋은 구도를 찾는 사이 찰나의 기회를 날려 버린 적이 많은 경험 때문이랄까?
어차피 가을이라는 대분류 속에 지형적인 소분류가 속한 만큼 본질은 가을이며, 어느 지역이 되었건 광범위한 전체를 아우를 수 없어 한 지역을 찍고 그 일대 가을을 경험하는 게 내 기준에서는 합당한 이유며 목적이었다.
그래도 다행이라면 매번 가을비가 내렸던 과거에 비춰 이번엔 적당한 구름이 끼었을지언정 비는 내리지 않아 카메라를 적극 활용할 수 있다는 장점은 분명했다.
영양에서의 첫 번째 가을은 반딧불이 생태숲으로 숙박을 목적으로 지어졌다 어떤 이유에선지 운영이 중단된 곳인데 장수포천(왕피천)을 중심으로 일대가 멋진 지형을 가진 곳이었다.
숙소 앞 나무에 가을이 깃들면 캘린더 배경에 나올 법한 정취가 연출되어 여기 오면 항상 들러 이 모습을 담아가는데 이번 또한 절정의 가을 정취를 선사해 줬다.
그냥 덩그러니 서 있는 나무가 마치 액자 속 가을 유화 같아 만약 가을이란 단어를 상형문자로 표현한다면 이런 모습이지 않을까?
처음 왔을 때는 초여름 반딧불이 축제가 있던 날의 어두컴컴한 밤이라 윤곽조차 알 수 없었지만 다시 찾은 그 해 가을엔 마치 애덴동산 같았다.
적당한 녹음에 얼룩 자국처럼 물든 가을과 그 지상을 배경으로 하늘은 그 무리에 신이 나 새파랗게 물들어 절정의 어울림을 과시했었다.
더불어 집착이 강하던 비는 오지 않고 대신 쨍한 햇살을 가려준 덕분에 사진으로 담거나 산책을 즐기는데 있어서도 전혀 무리가 없어 천금 같은 기회가 아닐 수 없었다.
잠시 머물며 서성이던 머리 꼭대기에 큰 말벌집을 뒤늦게 발견하곤 주저할 겨를 없었다.
말벌이 미친 듯이 허공을 날아다니던 모습을 보곤 셀카봉을 잡고 우사인 볼트만큼 잽싸게 도망쳐 차에 들어왔는데 심박수가 돌아올 때까지 한 동안 앉아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진정이 되어 그 자리를 완전히 벗어난 뒤 옮긴 곳은 반딧불이 연못으로 첫 연을 맺었던 자리로 호수변에 사람들이 자리를 잡고 풍등을 날렸었다.
서 있던 자리에서 하천 너머 정취를 다시 한 번 감상했다.
가을 속에 천문대라...
자리를 옮겨 수생식물 관찰장을 거쳐 숲속광장으로 향했다.
이따금 내리쬐는 햇살에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수생식물 관찰장 또한 2년 전과 비교하면 거의 변화가 없어 도리어 정겨웠다.
숲속광장으로 가는 길에 뒤돌아 무거운 적막이 깃든 수생식물 관찰장을 훑어봤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 몇 년 동안 연거푸 내리던 가을비가 이번엔 심술을 거두고 쾌청한 가을 하늘을 열어 놓았다.
다소곳 앉은 가을 녘은 거친 겨울 손길이 휘갈기는 숙명을 읽고 아껴둔 색동저고리 광채를 풀어 일렁이는 바람 물결에 섬섬옥수 곱게 나부낀다.
잠시 빌려 즐기는 가을 시선이 과한지 떠날 생각에 발은 벌써 천근만근, 가슴은 무중력인데 반해 발걸음은 육중하다.
그 매력이 아쉬워 지나는 태양도 불타는 단풍 사이로 가을 들녘을 훔쳐보고 있었다.
언제나 그랬듯 이번에도 이 너른 공원엔 아무도 없었다.
숲속광장 또한 변한 게 없었다.
지독한 고독도, 무심히 서 있는 나무와 그 나무 사이를 오가는 길도 그대로였다.
심지어 데크조차도 깊은 오지에서 변화를 거부했다.
숲속광장에서 솔바람전망대로 향했다.
솔바람전망대는 숲속광장과 앞서 머물렀던 숙박시설, 반딧불이 연못, 천문대가 모여 있던 언덕배기로 갈 수 있는데 말벌집을 발견한 까닭에 거기는 건너뛸 수밖에 없었다.
상대적으로 지대가 높은 곳이라 언뜻 보이는 곳들을 훑어보는 걸로 만족하자.
숲속광장에서 걸어왔던 길로 아껴서 걷고 싶은데 그 길을 지나 모자란 듯 뒤돌아봤다.
이럴 때만큼은 까마득한 걸 갈구했던 게 아닐까?
이내 소나무 전망대를 벗어나 하늘광장으로 방향을 잡고 소나무숲으로 걸었다.
정말 시간이 멈춘 걸까?
텅 빈 공간에 홀로 유영하며 꼬리처럼 따라붙는 사유는 불안함이 아니라 차라리 그러길 바라는 갈망인 양 가을을 훔쳐보는 눈빛에 밥수저 하나 얹듯 내심 집착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2년 전까지 어린 전나무가 자욱하던 터는 잔인한 기계음이 한차례 통과한 뒤 삭막한 표정으로 굳어 버렸고, 둥근 광장 한가운데를 아우르던 도형은 다시 원래의 흙으로 돌아갔다.
예단과 재단이 난무하며 갈피를 잡지 못하더라도 멋진 가을과 묵묵한 소나무숲은 한 자리에 뿌리를 내려 견고한 믿음의 가지를 몇 년째 드리운다.
지난번에 비해 대대적으로 리뉴얼되었다.
전나무들은 모두 베어내고 자작나무로 교체되고 큰 별이 박혔다.
조금은 이질적인 기분이 들었는데 비해 정겨운 잠자리 하나가 따라다녔다.
크게 한 바퀴 돌 심산으로 멈췄던 걸음을 다시 떼었다.
일대에 그 많던 어린 전나무는 2년 전 완전히 베어지고 자작나무 묘목이 촘촘히 들어섰다.
이럴 때 비틀즈 'Let it be'가 생각났다.
그나마 포근한 정취, 여행자를 위해 휴식의 다리를 기꺼이 줄 아량 같았다.
하늘광장을 크게 한 바퀴 둘러본 뒤 이제는 왔던 길을 따라 다시 소나무숲 쉼터로 향했다.
사실 여기서 가장 멋진 건 다름 아닌 소나무숲과 그 숲 속 작은 곳곳 사이에 한 뼘 땅 빌리고 사는 쉼터였다.
하늘 향해 곧게 뻗은 소나무들이 촘촘히 서 있고 그 사잇길 따라 여러 형태의 쉴 수 있는 시설들이 있는데 여긴 처음부터 있던 시설들이라 그리 이질적이지 않고 리뉴얼을 위해 추가적인 훼손도 없었다.
소나무숲을 걸어왔던 길이 아닌 또 다른 갈래길인 수생식물 관찰장으로 걸어가자 화사한 인사를 건네는 가을이다.
뜨겁던 눈을 식힐 수 있는 뒤뜰 습지 데크길엔 무던히 촘촘한 거미줄과 적재적소에 나뒹구는 낙엽이 이따금 몸을 뒤집고 빛을 굴절시켰다.
'잠시'라는 무의식은 '기나긴' 의식을 뒤덮어 갈 길 먼 기다림에 이기적인 몰입의 유희를 극대화시키던 '찰나'였다.
떠남에도 뒤돌아보게 되고 그러면 다른 표정으로 미소 짓는다.
작고 귀여운 습지에 갈대를 비롯하여 야생의 생명들이 자리를 잡았다.
그리 짧은 거리가 아닌데도 감상에 젖느라 주차된 곳에 근접했고, 여기서 방향을 틀어 작은 데크 다리를 건넜다.
수생식물 관찰장은 이전과 달리 그대로 방치해 놓았는지 야생의 식물들이 가득했는데 차라리 덜 가공된 여울 습지가 정감 어렸다.
떠나기 아쉬웠던지 다시 숲속광장으로 걸었고, 포장된 길 따라 완전한 공백의 주차장에 도착했는데 무심코 졸고 있는 단풍인데 눈이 이다지도 뜨거울 줄이야.
또 한 번의 출발처럼 숲속광장 초입에 들어섰고, 아쉬운 듯 숲속광장을 휘돌아 본 뒤 작별했다.
촉촉한 가을비에 등을 떠밀렸던 예년과 달리 이번엔 충분히 머무르며 곱게 익은 단풍과 함께 물들어가는 가을 정취에 흠뻑 젖었고, 그 사실을 모르는지 이 땅에 남겨진 자연은 묵묵히 침묵의 미소로 화답했던, 시간조차 함께 쉬며 길을 거닐던 추억이 될 수 있었다.
반딧불이 생태숲에서 출발하여 곧장 수비면으로 향했는데 지난번과 달리 통고산 휴양림에 수건이 제공되지 않아 하나 장만할 겸 하나로마트에 들르기로 했다.
물론 가을이 자욱하게 물든 조용한 도로를 질주했다.
하나로마트에서 수건과 함께 간단한 식료품 몇 가지를 구입하여 나오는데 까만색 냥이 보여 불렀더니 녀석은 한 치 망설임 없이 다가와 몸을 비볐다.
근무하시는 분이 오며 가며 밥을 챙겨 주신단다.
얼마나 아름다운 손길이기에 녀석 또한 사람을 전혀 경계하지 않고 처량하게 울길래 때마침 트렁크에 캐닌 습식이 몇 개 있어 햇반 용기에 뜯어 줬더니 있는 자리에서 원샷해 버렸다.
극소수의 몇 분이 창고에 대소변을 상습 투척해서 이 녀석을 쫓아내야 된다고 해서 걱정하시는데 빈 박스 하나에 흙만 담아 주면 해결되련만.
식사 끝내는 모습을 마지막으로 햇반 그릇과 쓰레기를 회수해서 오는 길에 한참 동안 뒷모습을 응시하는 녀석의 애절한 시선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얼마 전 출산 했다는데 어미의 건강이 곧 애기들의 건강이라 다 먹을 때까지 쪼그려 앉아 기다려줬다.
강인한 모정이 늘 새끼들과 함께 한다면 그 얼마나 든든하겠냐마는 녀석들이 살아가기 힘든 세상이라 마음 한 켠이 짠했다.
이 지구에서 함께 살아가는 생명인데 인간의 단편적인 생각으로 재단되지 않길 바랄 뿐이었다.
정겨운 마음을 챙긴 뒤 영양 수비를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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