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 자연 그리고 만남

역사의 배흘림 기둥, 부석사_20211224

사려울 2023. 2. 9. 02:06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은 무거운 역사를 떠받든 나무의 곡선으로 유명하다.
매서운 삭풍마저 거대한 장벽처럼 버티고 선 백두대간을 넘지 못하고 발길을 돌릴 때 천년 사찰의 나부끼는 시간은 진중한 나뭇결 따라 파란만장한 인류의 애닮은 애환을 속삭인다.
세상 모든 사물에 사연은 있겠지만 역사와 동고동락한 나무 기둥엔 사연이 더해진 생명이 움터 마치 고행의 업을 지고 사는 수도승의 땀방울처럼 온통 갈라진 틈 사이로 휘몰아치는 번뇌의 눈동자가 초롱하다.
세속에서 부석사로 가는 길에 늘어선 나무조차 사욕을 간파한 시선이 돌아오는 길엔 온화한 동행의 미소로 승화된다.

부석사
부석사는 신라 문무왕(文武王) 16년(676) 해동(海東) 화엄종(華嚴宗)의 종조(宗祖)인 의상대사(義湘大師)가 왕명(王命)으로 창건(創建) 한 화엄종의 수사 찰(首寺刹)이다. 대사가 당(唐) 나라에 유학하고 있을 때 당 고종(高宗)의 신라 침략 소식을 듣고 이를 왕에게 알리고, 그가 닦은 화엄의 도리(道理)로 국론(國論)을 통일(統一) 하여 내외(內外)의 시련을 극복하게 하고자 귀국하여 이 절을 창건하였으며 우리나라 화엄사상(華嚴思想)의 발원지가 되었다. 부석사라 이름하게 됨은 불전 서쪽에 큰 바위가 있는데 이 바위는 아래의 바위와 서로 붙지 않고 떠 있어 뜬돌이라 한 데서 연유하였다 한다. 고려 시대에는 선달사(善達寺) 혹은 흥교사(興敎寺)라 불렸다. 1916년 해체보수 시 발견된 묵서명(墨書銘)에 의하면 고려(高麗) 초기에 무량수전(無量壽殿) 등을 중창하였으나 공민왕 (恭愍王) 7년 (1358)적의 병화(兵火)를 당하여 우왕(禑王) 2년(1376) 무량수전이 재건되고, 우왕 3년 (1377) 조사당(祖師堂)이 재건되었다.
경내에는 통일신라시대 유물인 무량수전 앞 석등(국보), 석조여래 좌상(보물), 삼층석탑(보물), 당간지주(보물), 석조 기단 등이 있고, 고려 시대 유물인 무량수전(국보), 조사당(국보), 소조 여래 좌상(국보), 조사당 벽화(국보), 고려 각판(보물), 원융국사비 등이 있다. 특히 무량수전은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목조 건물 중 하나이며, 조사당 벽화는 목조건물에 그려진 벽화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현재 유물관 안에 보관되어 있다. 무량수전 안에 봉안된 여래 좌상은 국내에 전래하는 최고의 소상(塑像)이다. 무량수전 서쪽에 있는 우물은 의상대사의 호법룡(護法龍)이 살았다는 우물이라 전한다.
[출처] 한국관광공사_대한민국 구석구석 - 부석사(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부석사[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여행지 | '열린 관광' 모두의 여행|한국관광100선:대한민국 구석

부석사[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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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에 출발했지만 금새 점심시간이 다가와 가던 길에 제법 넓고 사람들이 많이 찾는 중화요리집에서 식사를 해결한 뒤 다시 가던 길을 재촉하여 오후 접어 들어서야 부석사에 도착했다.

전형적인 초겨울 날씨라 익숙치 않은 추위에 사람들은 잔뜩 움츠린 탓에 부석사로 향하는 길은 꽤 한적했는데 지역을 대표하는 여느 사찰들처럼 주차장에서부터 사찰까지 진입로는 평탄하면서 그리 멀지 않아 산책하기 더할 나위 없었다.

주차장에서 사찰 본원이 있는 천왕문까지는 600m 조금 넘는 거리에 약 10분.

줄지어 늘어선 나무 사이로 알싸한 겨울 내음에 취해 어느덧 부석사까지 닿았다.

천왕문을 넘어 발을 디디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게 양측 삼층석탑과 정면에 범종각, 그 뒤로 봉황산이 시선에 따라 줄지어 있었다.

지도와 곁대어 보면 봉황산과 백두대간이 북녘을 막아선 움막 같은 지세에 부석사가 있어 사납던 겨울 여우바람도 이곳에선 자취를 감췄다.

시간이 조각된 나무 기둥에 손끝이 닿는 순간 겸허해졌다.

왜 인류가 초라하게 느껴질까?

범종각.

범종각을 지나 11시 방향에 무량수전을 이어주는 안양루 또한 나무 특유의 질감을 그대로 노출시켰다.

무량수전은 여느 화려한 사찰과 대비된다.

마찬가지로 나무질감의 표면이 그대로 드러나 나도 모르는 사이 그 질감을 촉각과 시각으로 느끼게 되었다.

내부에 조심스레 들어가자 왠지 모를 무게감에 압도당했다.

배흘림 기둥의 오묘한 곡선 때문일까?

엄청난 시간을 변형 없이 견딘 목조의 내적 강인함 때문일까?

무량수전을 빠져나와 둘러보던 중 삼색이 하나 구슬픈 울음소리를 내며 무언가를 찾아다녔다.

굶주린 게 아닌 거 같은데 추운 겨울에 아이들을 잃어버린 걸까?

마치 사람 언어로 풀자면 목 놓아 부르는 아리랑 같았다.

무량수전 옆 화단에서 볼일을 보다 다시 울어대기 시작했다.

안양루와 무량수전 사이엔 그리 크지 않지만 석등과 탑이 있는 공간이 있고, 부석사 아래엔 세속이 옅은 미세먼지에 어렴풋이 드러나 있었다.

봉황산 언저리에 있는 부석사는 계단식으로 이루어져 여타 다른 유명 사찰에 비한다면 작은 규모지만 짜임새 있게 구성되어 있었다.

안양루 아래 계단 따라 내려가면 범종각이 있고, 좌측은 응향각이란다.

번뇌와 갈증을 내린다.

다시 만난 삼색이는 여전히 구슬픈 울며  무언가를 찾아다녔다.

그러다 돌 틈으로 들어가는가 싶더니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홀연히 사라졌다.

올 때와 달리 무량수전 우측으로 휘어진 돌과 기와장으로 만든 길을 따라 계단이 아닌 완만한 내리막길을 걸었다.

부석사를 빠져나와 천왕문으로 향하며 사찰을 바라봤다.

부석사 내부를 방황하듯 쉴 새 없이 돌아다녔고, 천왕문을 빠져나오면서 다시 한 번 뒤돌아보게 되었다.

다시 왔던 길을 따라 부석사를 벗어났다.

많은 육감과 사유가 교차하던 순간이었다.

먼 길 달려와 천년 사찰에서 그리도 집착하는 찰나 같은 시간이 이토록 초라하게 느껴질까?

부석사에서 일주문을 지나 매표소 부근에서 특이한 나무가 유독 눈에 사로잡혔다.

오는 길에 중화요리로 끼니를 해결했음에도 닭발로 보일까?

아무리 봐도 닭발이나 사람 손등 같았다.

출출할 때 보면 닭발로, 자고 일어나서 보면 활짝 편 사람 손등처럼 보이지 않을까?

무튼 묘한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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