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여정의 마지막은 나지막한 산에 틀어 앉아 휘몰아치는 동강과 첩첩이 버틴 산세에 둘러 쌓인 산성으로 저만치 먼 곳에서부터 숭고한 자연에 기대어 꿈틀대는 길이 모이는 곳이었다.
짙은 구름과 달리 청명한 대기 아래 심연과 같은 적막은 이따금 떨어지는 빗방울이 지면에 닿아 깊은 겨울잠에 허덕이는 낙엽을 깨우기 위한 속삭임에 감미로운 울림을 증폭시켰다.
전날 찾아간 칠족령 절벽길의 아찔한 절벽이 선명하게 서있고, 그 아찔함 가운데 홀로 몸부림치는 하늘벽구름다리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인간의 존재가 참으로 초라하게 여겨졌다.
그럼에도 미물 같은 초상에 짙은 화장을 하느라 여념 없는 내 모습도 투영되어 겸손한 자연의 모습이 한발 떨어져 비로소 위대한 진면목을 깨달았다.
여정을 떠날 때 무겁던 봇짐은 비교적 홀가분한데 반해 텅 빈 사유는 빈 공간이 무색할 만큼 묵직했던 걸 보면 어렴풋한 목적이 점차 선명해지며 시골 장터에 들러 막연히 찾던 추상의 멘토를 만나 명확한 실체를 챙기게 되는, 그래서 나는 막연히 떠나 명확히 돌아가게 된다.
높은 하늘을 나는 수리매 가족도 궁극의 생존을 안도하게 되면 집으로 돌아가거늘.
정선 고성산성은 강원도 정선군 신동읍의 고성리와 덕천리 경계지점인 해발 425m의 산능선을 따라 돌로 쌓은 산성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정선군의 동쪽 5리 지점에 둘레 782척(237m), 높이 8척(2.4m)으로 돌을 쌓아 올렸고, 그 안에 성황사(城隍祠)가 있었으나 절반이 무너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출처] 정선 고성리산성(旌善古城里山城)_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교직원 수련원 출입구를 지나면 고성산성 푯말 바로 전에 차량 한 대를 주차할 수 있는 공간에 차량을 두고 도보로 천천히 걸었다.
고성산성으로 향하기 전 가장 먼저 너른 유원지 같은 공원이 맞이했다.
동강의 진수를 모아 놓은 안내도라 차라리 여기에 여정을 맡겨도 좋겠다.
산성 아래는 대부분 사유지인지 경작 중인 곳이었고, 거기를 지나면 산성 안내표지판이 보여 가르쳐준 방향으로 계속 진행했다.
산성으로 오르는 뿌듯한 오르막길은 뜸한 인적과 달리 이렇게 잘 정비되어 있어 길을 헤매거나 과한 힘이 들지 않았다.
지금까지의 오르막 경사도가 완만해지는 이 시점이 산성이었다.
산성에 도착.
포토존이 익살맞았다.
성곽을 보면 근래 재현한 산성임을 한눈에 알 수 있는데 결과적으로 한적한 공원이나 다를 바 없었다.
제1산성이라 표기된 걸 보면 성벽이 드문드문 서 있는 게 아닌가 짐작할 수 있었다.
비교적 정갈한 제1산성의 모습.
제1산성의 끝에 다다라 성벽에 오르면 백운산과 동강, 그리고 동강 따라 그어진 길에 접하고 있었는데 올 때 저 길을 타고 여기를 찾았던 셈이었다.
백운산 능선이 마치 날카로운 칼날 같았는데 정말 그런지 몰라도 이 자리에서 보면 그렇게 보였다.
더군다나 대기가 무척 청명한 날이라 능선의 선예도는 더할 나위 없이 선명했기 때문에 마치 날카로운 칼날에 서슬 퍼런 분위기도 감돌았다.
제1산성을 떠나 제2산성으로 향했다.
보이는 곳이 제2산성인지 몰라도 왠지 그럴 것만 같았고, 가는 길은 야자매트가 깔려 있어 아침 일찍 내린 비나 눈으로 질퍽이거나 미끄럽지 않아 걷기 수월했다.
저리 멋진 소나무는 지금까지 얼마나 저와 같은 시련을 겪었을까?
역시나 제2산성이 적중했고, 앞서 산성과 달리 여긴 완만한 오르막이었다.
제2산성을 지나 얼마 걷지 않으면 이내 제3산성이 나오는데 여긴 앞서 두 성벽과 달리 나지막했다.
제3산성을 지날 무렵 성곽 내부에 원래 산성의 잔해가 아닐까 싶은 허물어진 성벽이 보였다.
여기까지 오는 길은 걷기 무난했고, 조금 추운 날씨긴 해도 걸친 얇은 패딩으로 충분했다.
뼝대에 걸친 하늘벽 구름다리는 육안으로 어렴풋이 보였다.
전날 저 뼝대 위를 걸었다니 이렇게 보면 그 아찔함이 새로웠다.
전날 칠족령 전망대 방향으로 시선을 돌려보면 전망대는 산등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지만 산세는 매우 선명했고, 시야는 장쾌했다.
동강이 지나는 이 일대는 실로 절경의 연속이었다.
탱글탱글 열린 생강꽃을 보면 누가 뭐라 해도 봄이 왔음을 항변하는 것만 같았다.
한 바퀴 돌아 마지막 제4산성까지 도착했다.
여기를 지나서 산성에 오른 시점까지 한 바퀴를 도는데 대략 1km 남짓 되었다.
문득 고개 들어 하늘을 보자 까마득히 높은 허공에 매 가족이 하늘을 유영하고 있었다.
이렇게만 보면 어미 따라 세상을 유영하는 새끼의 세상 나기 같은데 어쩌면 가장 행복한 비행의 한 장면 아닐까 싶었다.
제4산성의 끝에 다다를 무렵
뒤돌아 왔던 길을 되짚어봤다.
산성에 오른 뒤 줄곧 머릿속에 맴도는 단어는 하나뿐이었다.
'평온'
산성 내부는 별반 특징은 없었고, 여름 동안 무성하게 자란 칡넝쿨과 그 가운데 자라는 나무, 그리고 한 켠에는 하늘로 곧게 뻗은 전나무숲이 있었다.
산성 인척에는 동강전망 자연휴양림이 보였다.
언젠가 캠핑을 나선다면 꼭 한 번 찾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문명이 배제된 절경을 품은 곳이다.
떠나기 못내 아쉬운지 다시 제1산성으로 걸어 두리번거리며, 마지막으로 힘찬 근육질의 백운산과 휘몰아치는 동강을 바라봤다.
드물게 백운산의 속살이 절벽으로 드러나 있는데 보이는 것과 달리 동강이 접한 곳은 절벽이나 다름없었다.
이른 아침에 내린 비가 아직은 풀잎에 맺혀 미약한 대기의 빛을 영롱하게 굴절시켰다.
산성을 서성이다 왔던 길 그대로 내려와 공원을 한 바퀴 둘러봤다.
고방정?
왠지 의미 있는 정자 같은데 인적이 전혀 없는 공원 가운데 덩그러니 놓여 있어 무척 고독해 보였다.
산성으로 가는 길은 대부분 잘 정비되어 있었고, 갈림길에선 혼동되지 않도록 작은 이정표가 세워져 있어 헤멜 이유는 없었다.
완연한 봄으로 가는 길목에 떠난 이번 여정의 마지막은 한적한 고성산성을 끝으로 마무리했고, 거쳐왔던 그 시간과 장면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며 다음 여정을 기대와 설렘으로 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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