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 자연 그리고 만남

거친 파도 장사해변을 끝으로 영덕과 작별_20240119

사려울 2024. 4. 5. 17:04

영덕을 떠나며, 해파랑길 19코스 중 부경2~부경1~장사해변까지 걷다 강구에서 대게를 납치했다.
떠나는 길이라 아직 못다한 이야기는 다음을 기약하는 매듭으로,
갈수록 거세지는 겨울 동해 바람과 파도는 백두대간 골 깊은 유혹으로,
그와 대조적으로 정적이 흐르는 어촌 마을은 안식으로 역설하며 만나게 될 존재의 필연에 충실하자.
그럼에도 떠나는 길에 불변의 진리, 시간은 매정하고 제트기류보다 빨랐다.

해파랑길 19코스는 영덕 블루로드 D 구간으로 화진해변에서 시작하여 장사해변, 남호해변을 거쳐 강구항에 이르는 동해안 도보길
[출처] 해파랑길 19코스(영덕 블루로드 D)_한국관광공사 두루누비
 

해파랑길 19코스 영덕 블루로드 D

쪽빛 파도의 길(D코스)은 영덕 어촌 생활상을 엿볼 수 있게 영덕 남정면의 마을을 통과하는 구간이다. 낮은 담장으로 서로 정답게 붙어 있고 좁다란 골목을 지나면서 현 지역 주민들이 그물에서

www.durunubi.kr:443

숙소 체크아웃을 한 뒤 차량은 그대로 두고 숙소 뒤편과 연결된 해파랑길로 내려왔다.
잠시지만 그게 뭐라고 정들 줄이야.
동해가 한눈에 보이는 멋진 숙소라 지난번에 이어 이번에도 연을 맺었는데 7번 국도변이라 접근성도 좋지만 무엇보다 도로에서 보이는 숙소는 비교적 규모가 작게 느껴지는데 반해 해파랑길에서는 꽤 규모가 컸다.
아무래도 숙소를 기준으로 바다와 내륙 방면 고도차가 확연해 대조가 명확했다.

숙소 바다 방면 바로 지나는 길이 해파랑길이라 길에 내려서자마자 장사해변으로 방향을 잡고 걸었다.
마을을 관통하는데 그랬던 것처럼 길마다 같은 게 하나 없었다.

부경항 너른 주차장에 도착.
이 어촌마을의 매력이 여실히 드러났다.
7번 국도 너머 첩첩 산이, 장대한 동해엔 첩첩 파도가, 마을 사람들의 터전엔 인류 이전부터 존재하던 것들이 뒤섞여 있었다.

부경항을 지나 인가와 바다 사이 거대 갯바위 위를 지나는 해파랑길에 접어들었다.
하루가 지날수록 바다 바람이 거칠어져 사진 찍는 순간 손을 연실 흔들어 댔다.
그래도 이 멋짐을 담지 않을 수 없지!

기세 등등하게 밀려드는 파도들은 연신 테트라포드에 부딪혀 굉음과 함께 내륙을 향해 넘어 들었다.

이번 동해 여정에서 경주 해파랑길 여행을 제외하고 내내 흐렸다.
내가 선택할 수 없어도 불만이 없는 건 마치 필요하지만 상투적인 선택에 이골이 난 것처럼 결정장애가 생기는 점심 메뉴 고르기 같았다.
더불어 매 순간순간이 같지 않은 풍광인 만큼 그 순간순간이 독창적인 자연의 액자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테트라포드에 부딪혀 허공에 큰 물보라를 일으키는 장면을 찍으려면 요상하게 파도는 잠잠해졌다.
그렇다고 이 자리에서 마냥 시간을 보낼 수 없는 노릇이라 다른 장소에서의 기회를 엿보게 되는데 더 요상한 건 자리를 뜨면 다시 거센 파도가 물보라 장관을 일으켰다.
이래서 자연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생명이 있나 보다.

파도는 연신 때려도 바위는 묵묵히 자리를 지켰다.
언젠가 문드러지고 흩어지겠지만 단단히 버티고 요동이 없는 건 인간에게 없는 거룩한 인내가 바위처럼 굳기 때문이었다.

장사해변으로 넘어가기 전 마지막 인가 앞 해변은 거짓말처럼 파도가 잔잔했다.
테트라포드나 여타 방파제가 없음에도 신기하게 파도가 거의 없는 호수 같았다.
자연 방파제의 위력이라고 하기엔 작은 만처럼 내륙으로 움푹 들어가긴 해도 전적으로 갯바위가 막아주는 게 아닌데도 이렇게 개구라 같았다.

작은 해변을 지나면 해안가 길이 마을로 급격히 선회하여 7번 국도에 합류하게 되는데 마을과 장사해변 사이 민간인 통제 구역이 있기 때문이었다.
7번 국도 따라 조금만 걷다 보면 장사해변이 나왔고, 해변이 시작하는 구간에 모래사장으로 내려와 비에 젖어 비교적 단단해진 해변을 조금은 수월하게 걸으며 멀리 장사상륙 전승기념관 방향으로 향했다.

장사해수욕장은 영덕읍 남쪽 16km 지점에 위치하여 백사장 길이 900m, 폭 80m, 평균 수심 1.5m의 자그마한 해수욕장으로 인근 사람들이 많이 찾는다. 2km의 넓은 백사장 모래는 알이 굵고 몸에 붙지않아 맨발로 걷거나 찜질을 하기에 좋으며 백사장 뒤로 소나무 숲이 우거져 있다. 1.3m 얕은 수심 해수욕은 물론 조개도 잡을 수 있는 즐거움이 있으며 수상스키, 바나나보트, 제트스키를 즐길 수 있는 해양 레저시설이 있어 여름 휴양지로 적합하다. 또한 가자미, 광어, 우럭 등이 잡히는 바다 낚시터로도 유명하다.
[출처] 장사해수욕장_한국관광공사

바람에 더해 파도는 장난 아니었다.
장사작전 당시 함대를 기념관으로 개조했는데 위에서 바라보는 바다의 기세란 금세 쓸려 버릴 것만 같았다.

명색이 해변에 덩그러니 자리 잡은 특이한 구조물인 데다 거친 바다의 질감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어 기념관으로 방향을 잡았는데 유료 운영 중이었고, 내부는 딱히 볼 게 없던데 반해 장사해변 일대 전경을 감상하기엔 괜춘했다.
해변가에서 보는 바다와 바다에 떠 있는 자리에서 해변 일대를 바라보는 전경은 분명 풍경의 차이도 있었고, 감회의 차이도 명확했다.

장사상륙작전은 경북 영덕군 남정면 장사리에서 벌어진 상륙작전으로, 인천상륙작전 성공을 위한 인민군의 주의 분산과 보급로 차단을 위해 전개된 군사작전이다.
[출처] 장사상륙작전 전승기념관

오픈한 상태로 수리 중이란다.
이런 방만한 운영은 정말 진절머리 난다.

지나갔던 길을 되돌아 다시 힐링턴 방향으로 걷는 사이 어느새 거기를 지나 부경2리로 향했다.

이따금 거센 파도가 포구 방파제를 넘어 주차장까지 뛰어들었지만 그와 대조적으로 갈매기떼는 파도가 약한 지점을 교묘히 알아차리고 그 자리에 모여 한가롭게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힐링턴에서 장사해변으로 가는 길에 넘무넘무 유명한 흉가를 지나게 되었다.
물론 공포의 실체는 증명할 수 없고, 단순히 인간들에 의해 흉가란 낙인이 찍혔겠지만 흉가 체험이란 놀이엔 별 관심이 없거니와 그렇다고 애써 부정하는 편도 아니었는데 내게 있어 가장 명징한 신념은 영적인 존재보다 실체적인 존재, 즉 인간이 더 무섭다.
예전부터 마을 수호령이 깃든 나무나 바위도 도시화로 인해 밀어 버린 부분이 많은데 처음엔 저주나 악몽에 시달리더라도 결국 인간이 안착한 걸 보면 영적인 존재도 인간과의 줄다리기에서 결국 지친 게 아닐까 싶었다.
또한 다행스럽게도 난 아무런 감각도, 영안도 없어 믿기는 해도 예민하지 않은 데다 겁도 적당히 있어서 호기심이 왕성하지도, 무모하지도 않아서 적당히 듣고, 흉흉한 곳은 피하는 편이었다.
그래도 유명한 곳이라니 이렇게 멀찍이 찍은 사진 몇 장 정도는 남겨두자.

힐링턴으로 돌아와 주차된 차를 몰고 강구항으로 달렸다.
고속도로에 올리기 위해서 강구는 거치는 길목이기도 했고, 가족들과 냥이가 좋아하는 대게도 납치하기 위해서였다.
아직 제철이 아니라 살은 튼실하지 않았지만 싼 맛에 큰 아이스박스 분량을 삶은 뒤 채워 집으로 향했다.
대게를 삶는데 족히 10분 이상 걸려 그 사이 강구항을 둘러보는 건 덤이었다.

상행길에 들른 휴게소에 이런 감성 공간이 있어 커피 한 잔을 손에 들고 막연히 앉아 멍 때렸다.
그러곤 커피가 반 정도 남았을 때 다시 길을 재촉했는데 이번 2주 간의 여정 중 첫 주는 이동과 안전이 확보되는 동해 여정으로, 다음 한 주는 반대로 이동과 안전이 보장되지 않는 강원 내륙으로의 여정을 계획했던 만큼 이틀 휴식을 위해 집으로 향했다.
늘 지나면 깨닫게 되는 불변의 법칙, 여행의 시간은 겁나 빠르게, 매정히 흘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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