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 자연 그리고 만남

시리도록 아름다운 한파, 용평리조트_20240122

사려울 2024. 4. 15. 20:46

폭설이 내린 이튿날 용평의 한파와 강풍은 쉽게 접할 수 없는, 그야말로 살을 에이는 통증과도 같았다.
그로 인해 발왕산 명물인 케이블카 운행은 잠정 중단 되었고, 스키 인파는 부쩍 줄어든 상태로 잠시 장갑을 벗은 사이 손등과 걷는 내내 노출된 뺨을 파고드는 통증은 만만한 게 아니었다.
그렇더라도 산등에 널부러진 설경을 일일이 찾아 헤매는 시간은 통증을 극복할 유일무이한 특권인 양 눈에 보이는 길의 형태에 완전히 몰입했다.
연신 엄청난 기세로 발왕산을 삼키던 구름이 오래 버티지 못하고 지나버리면 뒤따르던 구름이 다시 산봉우리를 폭식했는데 그게 일상인지 산은 그저 머무를 뿐이었다.
하루 지나면 여기와 작별해야만 하는데 그 사이 강풍의 화가 누그러져 산 위 겨울 왕국에 초대하려나?

아침 느지막이 일어나 괜히 농땡이를 부렸고, 그러다 꿀맛 같은 여가 시간이 원망하는 것 같아 퍼뜩 정신이 들어 부랴부랴 간단히 봇짐을 챙겼다.

들어오는 추위라 강풍이 어찌나 맹렬한지 창 너머 전날까지 내린 눈이 바람에 휘날려 맑은 하늘 아래 다시 눈발이 흩날렸다.

그런 살벌한 광경을 조금 필터링해서 보면 흔히 접할 수 없는 이색적인 풍경이라 한참을 감상해도 질리지 않았다.

강풍이 불어 화창한 날씨에도 또 한 번 눈을 흩날리던 순간, 마치 꿈속의 안개처럼 내린 눈은 절경의 골마다 하얀 겨울빛을 뿌렸다.
섭씨 영하 22도의 한파도 감탄사를 꺾을 수 없었다.

간단히 챙긴 봇짐을 메고 산책하듯 스키장을 크게 돌아서 케이블카 정거장에 도착했는데 강풍으로 인해 잠정적으로 케이블카 운행이 중단되었고, 재게 시점은 풍량에 따라 달라지기 땜시롱 미리 단언할 수 없단다.

용평에 온 가장 큰 목적이 바로 이건데 좌절되는 순간 잠시 멘붕이 오기도 했지만 어찌하리오.

매표소를 돌아 나오려는데 가족으로 보이는 한 팀이 나처럼 매표소에서 심각하게 이야기를 나누는가 싶더니 돌아섰다.

발왕산 케이블카를 타기 위해 서울에서 이른 아침부터 곧장 내려온 한 가족이 운행 중단으로 안타까워 쉽게 발걸음을 돌리지 못했다.
어찌 보면 같은 입장이라 돌아선 자리에서 서로 위로하는 수밖에 달리 손쓸 방법이 없었다. 
만 가지 표정의 자연이 늘 같을 수 없어 순간순간이 유일한 기회이자 돌아올 수 없는 시간이며, 그래서 그 순간 최선을 다하는 게 최고의 순간이기도 하다.

초강력 한파와 강풍으로 스키장도 비교적 한산했다.

손 뻗으면 닿을 듯한 위치에 발왕산이 있건만 여기까지 왔을 당시엔 어떻게 한 번 도전해 볼까? 싶어 가장 가까운 초보자 코스 스키장으로 다가갔었고, 막상 두터운 눈과 엄청난 강풍에 맞닥뜨리자 산책이나 해야 스것다는 손바닥 뒤집듯 마음이 바뀌어 돌아서서 스키장 가장자리 길을 따라 무작정 걸었다.

다시 타워콘도로 돌아왔지만 딱히 정해진 경로가 없어 무작정 길 따라 걷다 전날 산 중턱 그림 같던 빌라촌이 떠올라 거기로 향했다.

내린 폭설의 여파로 길은 어디 하나 매끈한 곳 없었지만 그렇다고 걷기 곤란할 정도로 발을 묶진 않았다.

그림 같던 빌라촌은 버치힐콘도로 애니 포레를 지나 길이 이어졌는데 전날까지 어찌나 많은 눈이 내렸는지 산으로 향하는 길은 모두 눈 속으로 숨어버렸다.

그러면 그 순간부터는 길이 아니다.

버치힐콘도에 진입.

막상 콘도에 들어가지 않는 이상 길에서 멋진 장관을 기대하기란 힘들 만큼 나무와 다른 지형물에 가려져 있었다.

전날 밤 그리 아름답던 야경의 일부분이던 버치힐콘도는 실제 산언저리에 위치한 아주 멋진 곳이었다.

북유럽 눈 덮인 숲 속 마을 풍경을 오마주하여 꽤나 이국적이면서도 이질감이 전혀 없었다.

이럴 줄 알았다면 여기로 예약을 하는 건데 아까비!

어느 정도 해가 기울기 시작할 무렵 숙소로 돌아와 완전히 짐을 풀어버렸다.

한파와 강풍의 위세에 짓눌려 버린 탓도 있었고, 온전히 하루 계획을 머릿속에 그렸다 좌절당한 상실감이 동시에 밀려들어 무얼 하고자 하는 패기마저 꺾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눈으로 나마 편하게 즐기기 위해 찬바람 가득 실내에 들이며 창 너머 세상을 주시했다.

좀 전 버치힐콘도의 그림 같은 풍경이 가장 먼저 이목을 끌었다.

고개를 우측으로 조금 돌리자 스키장과 그 너머 까마득히 있던 발왕산 드래곤캐슬이 언뜻 보였다.

오전엔 짙은 구름 뭉치에 연신 가려지는 바람에 발왕산 정상이 보이지 않았었는데 그 구름이 옅어지면서 미세하게나마 형체는 알아볼 수 있었다.

시선을 좀 더 주시하자 그 형체는 선명해지긴 했는데 분명 발왕산 정상의 드래곤캐슬이 육안으로도 충분히 보였다.

이제는 시선을 버치힐콘도 기준에서 좌측으로 돌려봤다.

버치힐콘도 옆으로 그나마 가장 가까이 위치한 산과 그 산에 너른 눈밭이 보였는데 그게 바로 안반데기가 얹혀진 고루포기산이었다.

이렇게 하루를 허송세월 보냈고, 그런 만큼 육체적인 휴식은 충분히 취할 수 있었다.

그러니 제발 이튿날엔 발왕산 정상으로 길을 열어주소서, 비나이다~ 비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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