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주 34

적막 가득한 부론에서_20200117

부론에 도착한건 자정이 가까워진 꽤 늦은 시간이었다. 가뜩이나 일찍 찾아오는 시골 밤에 더해 부론 외곽에 있는 한강변은 말끔한 산책로의 모습과 달리 평소에도 인적이 드문데 이 늦은 시각이면 사람은 고사하고 지나가는 차량의 불빛도 반가울 지경이다. 흥원창에 자리를 잡고 삼각대를 펼쳐 카메라를 작동 시켰지만 무엇보다 이 장면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꽤나 오래 전부터 힐링하는 나만의 은밀한 몰취향인데 오랜만에 온 반가움이 배가 되어 겨울 추위조차 느낄 수 없었다. 3개의 강이 이 부근에서 만나는데다 수도권의 젖줄인 한강이란 의미만으로도, 또한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 한적하면서도 시야가 탁 트인 전망을 생각하면 이 자리를 동경하는 건 이제 습성이 되어 버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번에 여주를 찾은 건 ..

나무의 자태_20191221

은사 댁에서 포근한 밤을 보내고 이튿날 일어나 밖을 나오자 하늘이 비교적 흐렸다. 비는 오지 않았지만 마치 잠시 후 비를 뿌릴 기세라 마을 주변을 둘러보는데 고도 차이로 계단식 밭 한가운데 우뚝 선 소나무 두 그루가 멋스러웠다. 여름 동안 무성히 자랐던 칡넝쿨과 밭을 빼곡히 메웠던 참깨 단, 고구마 줄기는 널부러져 있지만 그 허허로운 벌판에 자리를 지키고 서 있는 소나무는 시선을 잡아끌기에 충분했다. 밭을 일궈도 소나무가 멋져 그대로 둔다는 은사께선 다음 해 여름을 앞두고 마당에 있는 원두막을 소나무 곁으로 옮기겠다고 하신다. 지대가 높아 마을을 두루두루 둘러볼 수 있을 정도로 전망이 좋고, 언덕배기를 배후에 두고 있어 여름이면 시원할 것만 같았다. 다만 여름부터 가을까지 이 밭만 오면 소리소문 없이 산..

여주 밤 하늘_20191220

여주에 도착할 무렵 은사께선 여주역에 도착하신단다. 오랫 만에 뵙는 거라 저녁은 여주 재래시장에 들러 삼겹살을 곁들인 저녁 식사를 하기로 하고 역할 분담으로 저녁 식사에 필요한 식재료를 사러 다녔다. 은사 댁에 도착하여 허겁지겁 저녁을 뽀개면서 얼큰하게 소주 한 잔을 통해 배 부른 뒤 한층 평화로워진 뱃속을 달래다 문득 여주 밤하늘에 은하수가 관찰될까 호기심에 카메라와 이번에 구입한 삼각대를 챙겨 언덕을 올랐다. 여주라고 해도 한창 벗어난 곳이라 마을 전체는 사위를 에워싸듯 완전 깜깜했는데 주위가 워낙 깜깜해 랜턴을 켜자 대기 중 바람을 타고 떠다니는 먼지가 많았다. 대구에서와 달리 여주에 왔을 때는 약간 뿌옇긴 해도 이 정도일 줄 몰랐건만 밤이 되자 옅은 안개가 끼여 밤하늘에 은하수는 고사하고 별도 그..

햅쌀 선물_20191012

임실 여행 중에 집에 도착하여 고스란히 모셔 놓은 쌀 2포대는 은사께서 직접 보내 주신 선물이다.일가 형제 친지 가족분들이 옛부터 여주에서 터전을 잡고 계신 분들이라 농번기에 함께 농사도 짓고 꾸준히 왕래도 하시면서 왕성한 사회적 활동을 하시는 분도 많으신데 이번에 추수를 하셨다고 일 년 치 양식을 주셨다. 여주쌀이야 워낙 유명해서 밥을 짓게 되면 마치 기름을 살짝 두른 것 마냥 빛깔이 반짝이고 찹쌀을 섞어 놓은 마냥 밥알이 찰지면서 탱글탱글하다.한식에서 반은 밥이라고 늘 현미, 콩을 적절히 섞은 잡곡밥으로 식사를 챙기는데 이번 여주쌀로 만든 하얀 백미밥은 그야말로 꿀이 따로 없을 만큼, 흔히 게장 같은 걸 비유해서 밥도둑이라고 한다면 여주 백미밥은 반찬 도둑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심리적인 부분도 무시..

새벽 이슬_20191001

뒤척이다 잠에서 깨어 자리를 박차고 나와 텅빈 것만 같은 시골 마을의 새벽 공기를 마주했다.아직 여명 조차 서리지 않은 새벽이지만 조금 있다 보면 뉘적뉘적 여명이 암흑을 깨치고 스펀지에 물이 스며들듯 허공을 서서히 밝히기 직전의 시각이라 아무런 인적도, 날벌레도 없는 이 자리에 서서 이슬 내음이 살짝 실려 있는 새벽 공기를 깊게 들이마셨다. 신기하게도 가로등 하나 밤새 불이 들어와 위안이 된다.이 빛마저 없었다면 멍한 암흑에 얼마나 심심하고 적막 했을까?마치 황망한 대해에서 만난 등대처럼 이 빛이 내려 쬐이는 곳을 거닐며 세상에 동등하게 뿌려진 대기를 찬찬히 훑는다.처음 이 자리에 섰을 당시 같은 자리에 가로등이 있었지만 시간의 굴레처럼 빛 바랜 전등이 힘겹게 뿌려대는 빛도 지금처럼 의지할 곳 없는 대해..

마을 수호신, 원주 부론_20190915

보호수이자 시골 마을마다 전해져 오는 전설 같은 당산나무들. 마을의 평온과 번영을 지켜 주는 갖가지 전설이 설사 꾸며진 이야기라 할지라도 사람들은 이 수호령에 무던히도 많은 위안과 안도를 꿰차고 시련을 극복해 왔었다. 수 백 년, 거센 바람과 병충에도 견뎌 온 걸 보면, 또한 지나는 길에 제 한 몸 바쳐 뙤약볕을 막아 그늘을 내어준 것만으로도 치부할 수 없는 생명의 존엄을 느낄 수 있다. 강원/경기/충북이 만나는 지역이자 원주/여주/충주가 인척이 지역은 사투리도, 지역 성향도 비슷하다. 부론의 보호수로 나무가지가 집 안으로 뻗자 그 자리를 내어줬던 과거 흔적들이 이제는 잘려져 나가고 차단되어 버렸다. 훈훈한 장면이었는데... (시간의 파고에도 끄덕없는 부론_20150307, 추억과 시간이 만나는 곳) 여..

8년 지난 새 것 같은 아이팟 나노_20190915

2011년 중반 경에 지인께 선물 드린 게 당시 출시된지 얼마 되지 않은 아이팟 나노 레드 에디션이다.에이즈 퇴치 기금으로 일부 전달 되는 프로덕트 레드는 애플스토어에서만 판매 되어 제 값주고 구입해서 깨알 같던 곡을 넣어 선물 드렸는데 처음 작동해 보고 '신세계'라는 표현을 사용 했던 이 아이팟 나노를 아직도 잘 간직하고 계신다.게다가 민트급을 넘어 부드러운 천에 닦아 놓으면 새제품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거의 완벽하다.그걸 본가에서 가져와 여주에 오실 때면 짱짱하게 음악을 틀어 놓고 일을 하신다는데 이걸 구입해서 선물 드리고 몇 개월 지나 나도 같은 아이팟 나노 블루를 구입했지만 거의 걸레와 같은 상태라 이것과 대조된다.허나 외관이 어떻든 여전히 출퇴근 길에 내 뮤직 라이프를 충족시켜 주고, 성능에 있..

천고마비라~_20190915

가을이면 여주는 결실로 풍성해진다.전형적인 가을 날씨로 햇살이 무척 따사롭던 휴일, 여주 지인께 찾아가 농사일 도와 드린 답시고 어설프게 거들다 줄무늬 산모기의 소리소문 없는 공격으로 순식간에 4방이나 물려 방탱이가 되도록 퉁퉁 붓자 올리브영에서 구입한 백화유를 바르고 가려움을 어느 정도 가라앉히는 사이 작은 텃밭 하나를 후딱 해치우셨다.대낮에 밭에서 산모기가 출현해서 맘 잡고 일해보려는데 방해를 하다니. 잠시 쉬다 함께 마을 여기저기를 둘러 보기로 하고 집을 나서자 너른 생강밭 위로 뜨거운 가을 햇살이 듬뿍 쏟아진다.여기는 여주에서도 아주 작은 마을이지만 전체적으로 완만한 구릉지대라 지금까지 홍수 피해가 전혀 없었고, 그러면서도 모래와 점토가 섞인 기름진 토양이라 밭농사가 잘 된단다.가까이 청미천과 남..

태풍 링링이 오던 날_20190907

올 들어 유독 예년에 비해 태풍 소식이 잦다.태풍 링링의 북상으로 비는 그리 많지 않지만 바람이 강력한 태풍이라는데 오늘 하루가 절정이자 고비란다.전날 집을 나서 원주에 들러 하루 지내는데 창 너머 바람 소리가 꽤나 강력한 태풍임을 직감할 수 있었고, 점심 해결하고 여주로 넘어와 종영형 잠깐 만나기 전에 커피 한 잔 사서 말 그대로 얼굴만 보고 헤어져 지인이 계시는 곳으로 왔다. 여주IC에서 내려 여주읍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돈까스 집 건물 외관이 특이하다.적벽돌로 쌓은 뒤 통유리를 외부에 덧대어 미관상 돈까스 집이 아니라 분위기 좋은 카페 같은 첫인상이다.종영형과 헤어져 지인이 계시는 곳에 도착하자 태양초-엄밀히 이야기하면 태양초가 아니고 건조기로 말린 건데 집에서 태양초 만들어 보면 정말 햇볕 좋은데..

여주 나들이_20190822

귀촌을 준비중이신 사회 은사를 만나러 여주에 갔다 개미 똥꼬 만큼도 도움이 되지 않는 도움(?)을 드리고 집으로 가기 전, 커피 한 사발 나눴다.가을 같은 여름, 타들어가는 햇살이 그득해도 가을의 기대감이 양산되는 휴일로 카페의 통유리 너머 마주하는 한강이 어느 때보다 평온하다. 유구한 한강을 벗삼아 따사로운 햇살로 노 젓는 돛단배 하나가 무척이나 평화롭다.어디서 어디로, 정처 없이 간들 닻을 내리면 한뼘 누울 곳 되고, 한 폭 액자 속 그림이 될 광경이었다. 탄생 순서로 서 있던 이쁜이 3인방.내 첫 차 였던 티코를 필두로 이렇게 멋진 차 삼 형제가 함께 모인 장면이 흔치 않은데.티코를 보게 되다니 영광이다.아직 매끈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거 보면 차주께서 정말 애정을 갖고 관리 잘 하셨나 보다.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