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성 12

여정 끝의 시리도록 선명한 시간, 정선 고성산성_20220318

이번 여정의 마지막은 나지막한 산에 틀어 앉아 휘몰아치는 동강과 첩첩이 버틴 산세에 둘러 쌓인 산성으로 저만치 먼 곳에서부터 숭고한 자연에 기대어 꿈틀대는 길이 모이는 곳이었다. 짙은 구름과 달리 청명한 대기 아래 심연과 같은 적막은 이따금 떨어지는 빗방울이 지면에 닿아 깊은 겨울잠에 허덕이는 낙엽을 깨우기 위한 속삭임에 감미로운 울림을 증폭시켰다. 전날 찾아간 칠족령 절벽길의 아찔한 절벽이 선명하게 서있고, 그 아찔함 가운데 홀로 몸부림치는 하늘벽구름다리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인간의 존재가 참으로 초라하게 여겨졌다. 그럼에도 미물 같은 초상에 짙은 화장을 하느라 여념 없는 내 모습도 투영되어 겸손한 자연의 모습이 한발 떨어져 비로소 위대한 진면목을 깨달았다. 여정을 떠날 때 무겁던 봇짐은 비교적 홀가..

산책을 통한 휴식, 금성산성_20211221

대숲 사이로 지나는 겨울바람이 지난 시절의 흔적을 노래한다. 나무와 바위가 만든 그 길 따라 사념과 사색을 반복하듯 좁은 보폭을 맞추어 익숙 해질 무렵 향그로운 노래의 선율이 멈추고, 더불어 발걸음도 멈춘다. 텅 빈 산기슭에 역사가 빚은 관문을 넘어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헤아릴 즈음 나지막이 속삭이는 물과 풍경 소리에 먹먹했던 세속의 피로는 어느새 잊게 된다. 아주 가끔은 세상에 혼자라 느끼는데 무수히 이고 지고 쌓인 돌이 하늘로 뻗은 탑을 보노라면 새옹지마에 찌뿌린 미간은 무릇 거대한 강처럼 선명하고 넘쳤으리라. 여유의 세계, 금성산성_20200623이번 담양 여행의 목적은 국내 최고의 인공 활엽수림인 관방제림과 강천산과 이어진 산자락 끝에 담양 일대를 굽이 보는 금성산성. 소쇄원, 메타세콰이아길, 죽..

힘든 여정의 감로수, 치악산 남대봉/상원사_20210817

평소 산을 거의 타지 않는 얄팍한 체력에도 뭔가에 이끌린 듯 무작정 치악산기슭으로 오른 죄. 평면적인 지도의 수 킬로를 우습게 본 죄. 시골 출신이라 자연 녹지의 낭만만 쫓은 죄. 여전히 대낮 기온 30도를 웃도는 여름에도 물 한 병 의지한 채 내가 마냥 청춘이라 착각한 죄.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부실한 준비로 치악산에 오른 건 전적으로 내 책임이었고, 산길로 따라가며 내내 자책했다. 산이름에서 '악'이 들어가는 산은 입에서 '악!'소리가 난다고? 치악산 남대봉을 오르며 카메라 넥스트랩과 백팩조차 땀에 완전 절어 버릴 만큼 체력의 바닥이란 게 이런 기분인가 싶다. 산길 400m가 그렇게 지루하고 더딘지, 평소 인적이 거의 없다는 반증인지 길조차 애매하거나 온통 이끼로 뒤덮인 산길을 의심조차 없이 방..

겨울을 잊게 하는 산림욕장_20210121

삼년산성 북문에서 바로 산림욕장으로 나아갔다. 너른 공간임에도 시선에 굶주릴 만큼 인적이 드물어 적막과 더불어 내린 눈이 대부분 고스란히 쌓여 있고, 대부분 공간을 채우는 소리는 청명하게 울려대는 새들의 지저귐이다. 가끔 예상 밖의 시설도 있지만 도심 숲과 비교 되지 않는 자연의 녹지와 가공이 적어 친숙한 길이 촘촘히 연결되어 있고, 곳곳에 쉼터는 빠지지 않았다. 생각보다 집에서의 접근성이 좋아 등잔 밑이 어둡다고 왜 이제서야 방문했을까 뒤늦게 꽁꽁 숨겨진 숨은 그림을 찾은 성취감도 얻었다. 맨발숲길의 작은 늪과 데크길, 그리고 쉼터가 차분하게 이어져 있다. 뒤돌아 우뚝 솟은 삼년산성의 동북치성을 바라봤다. 꽤나 두텁고 거대해 보였다. 한길 따라 내려오면 극기훈련장과 산림욕대가 있었는데 두터운 낙엽이 쌓..

겨울 바람도 침묵하는 삼년산성_20210121

보은 시가지와 인접한 삼년산성과 삼림욕장은 일전에 방문 했던 충주산성처럼 군민들이 애용하는 녹지며 공원이다. 속리산을 가기 위한 관문인 보은 방문은 처음이지만 어느 제약회사 트레이드 마크인 정이품송과 법주사가 유명하다는 것 외엔 아는 바가 없어 이틀 머무르기로 한다. 미리 여행 계획을 치밀하게 세우는 편이 아니라 대략 유명한 곳만 탐색해 보니 말티재와 삼년산성이 눈에 들어왔고, 때마침 말티재 휴양림을 일찌감치 예약한 뒤 간단히 위치 정도만 파악한 상태로 보은에 도착하여 우선 가장 인접한 삼년산성을 들렀다. 산림욕장 내부는 넓고 잘 다져진 길로 미로처럼 연결되어 있고, 얼마 전 내린 눈과 얼어 붙은 여울이 오로지 한다. 걷기 좋은 탄탄한 길을 버리고 여울 따라 울퉁불퉁한 길로 들어서 걷는데 왠지 매끈한 길..

미호천의 시작, 망이산성_20200822

왜 그리 산성을 찾아다니세요? 근래 들어 종종 받는 질문인데 별 다른 의미 없어요 라고 하면 당연히 안 믿는다. 그렇다고 많은 산성을 오른 건 아닌데 최근 몇몇 사례가 있다 보니 그런 질문을 받는 건 당연지사. 여주 파사산성, 담양 금성산성, 오산 독산성, 안성 죽주산성, 이번에 찾은 음성 망이산성 정도 뿐인데? 근데 가만 생각해 보면 의외로 답은 간단하다. 산은 힘든데 산성은 상대적으로 큰 힘 들이지 않고 멋진 전망을 즐길 수 있다. 예나 지금이나 파수가 되려면 높거나 사방이 트인 곳이 제격이라 교통수단이 발달하지 않았던 예전에는 낮으면서도 사방이 트인 곳에 산성을 쌓아 주변 동태를 살피며 때에 따라 침략에 대한 방어를 해야 하는지라 지형이 바뀌지 않는 한 산성에 오르면 주변을 두루 둘러볼 수 있을 뿐..

웅크린 여름, 죽주산성_20200816

자그마한 숲을 지나 한적한 산성 안에 또 다른 녹음이 웅크린 채 잊혀진 시간을 되새긴다. 졸고 있는 시계바늘을 흔들어 깨워 걸음을 한 발 한 발 내딛는 사이 바삐 달려가던 해가 서녘으로 기울며, 치열한 여름의 허공을 붉게 적신다. 6년 전 지나던 길에 한 차례 유혹의 눈빛을 보내던 산중 성곽을 그제서야 찾아내곤 시간을 거스르듯 회상의 길을 찾는 동안 바람살이 반가이 맞이한다. 접근이 용이한 산성이라 가벼운 차림에 이내 성문에 접근할 수 있다. 때마침 녹음 사이로 석양이 몸을 숨기기 직전이다. 비교적 아담한 산성 내부는 하나의 공원으로 단장되었다. 성곽을 따라 오르다 보면 하늘과 만나는 선을 종종 만난다. 산성의 서쪽에 있는 성문으로 진입하여 약속한 듯 시계 방향으로 걷는다. 성곽의 오르막길에 오르자 주위..

도심의 작은 쉼터, 독산성_20200717

억겁 동안 세속을 향해 굽어 보는 나지막한 산에 둥지를 틀고 앉아 잠시 기댄 문명의 한 자락. 그 담벼락에 서서 흐르는 공기를 뺨으로 더듬어 본다. 마치 하나의 형제처럼 산성과 사찰은 나약한 의지를 위로하며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많은 바램들을 몽롱한 목탁 소리로 바람처럼 흩날린다. 많은 시간을 버텨 왔지만 앞으로 맞이해야 할 시간의 파고가 미지의 세계를 가르는 두려움처럼 막연한 시련과 희열을 향해 나아가리라는 의지의 등불이 꺼지지 않기를, 또한 자연의 포용이 변치 않기를 기대하는 포석 같다. 석양의 볕이 꺼지며 하나둘 밝혀지는 문명의 오색찬연한 등불이 특히나 아름다운 저녁이다. 도심에 둘러 쌓인 작은 녹지치곤 꽤나 멋지다. 사람들의 발걸음만큼이나 분주한 까치가 알싸한 데이트에 여념 없다. 독산성에 오르..

여유의 세계, 금성산성_20200623

이번 담양 여행의 목적은 국내 최고의 인공 활엽수림인 관방제림과 강천산과 이어진 산자락 끝에 담양 일대를 굽이 보는 금성산성. 소쇄원, 메타세쿼이아길, 죽녹원은 워낙 유명 인싸인데다 특히나 소쇄원은 광주와 화순 사이에 끼어 있어 거리가 멀고 3년 전에 다녀온 터라 이번 여행 동선에선 고려하지 않았다. 지인과 저녁 식사 약속으로 시간이 촉박하여 금성산성 초입 보국문과 충용문까지 여행하기로 한다. 한적한 주차장에 차를 세워두고 백팩 하나 짊어진 채 금성산성으로 향하면 산성 탐방 안내도가 나와 대략적인 잣대가 된다. 산길치곤 완만하고 너른 길이라 걷기 알맞다. 거기에 더해 이런 대숲과 나무 터널이 있고, 걷는 동안 숲을 쓸어 올리는 바람 소리는 곁들여진 음악과 같다. 나비 하나 나풀거리며 주위를 맴돈다. 20..

정적 짙은 파사산성_20190524

파사산성은 막국수로 유명한 여주 천서리와 순대가 유명한 양평 개군면 경계에 위치한 작은 산성으로 남한강이 지나는 지리적인 이점 덕분에 큰 힘을 들이지 않고 올라도 전망이 굿이다.전국 곳곳을 다녀 보면 의외로 찰진 만족을 주는 숨겨진 여행지가 많고, 알려지지 않은 만큼 고요한 환경에 힘입어 느긋하게 즐길 수 있다.파사산성 또한 그런 범주의 여행지인데 세마대 독산성과 비슷해서 같은 고장 사람이라면 식상한 동네의 명승지 정도일 수 있겠지만 어디까지나 난 여행자고 생애 처음 밟는 땅이라 알려지지 않은 명승지다.천서리를 지나 남한강을 따라 양평 방면으로 조금만 더 진행하면 이포보 부근 대신석재가 있는데 거기 텅빈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비교적 잘 다듬어진 등산로를 따라 오르면 얼마 걷지 않아 쉽게 산성의 성곽이 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