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 자연 그리고 만남

호수 속 가슴 아련한 추억의 횡성호수길B_20221011

사려울 2023. 12. 7. 02:12

길을 걷는 동안 바로 옆에 줄곧 호수가 동행하는 둘레길을 따라 A코스를 지나 B코스로 접어들었다.
전날 기습적인 추위와 두터운 구름이 몰려와 물안개는 만나볼 수 없지만 걷기 수월한 호반길은 젖어드는 가을이 길섶 호수와 숲을 흔들어 깨웠다.
그래서 쉴 새 없이 돌아가는 시계는 잠시 뒤로하고 오롯이 마음이 추동하는 여유만 쫓다 보니 걷는 걸음에서 피로가 발목을 잡지 않았다.
시간의 관용이 일상에서 익숙해진 습성을 마비시켜 늦어도 조급하지 않았고, 앞이 아닌 곳으로 시선을 던져도 불안하지 않는 횡성호반은 얼마 남지 않은 녹음과 다가올 신록 사이에 깊은 잠을 자기 전, 변모의 숙연함이 찰랑였다.

B코스와 A코스의 다른 점은 너른 길에서 오솔길로 바뀐다는 점이었고, 같은 점은 호수와 숲의 경계를 예리하게 관통했다는 점이었다.

복잡한 호반의 경계를 마치 숲과 호수의 가교인 양 저렇게 파고들어 아울렀다.

게다가 길을 편리한 대로 지나치게 가공하지 않았다는 것 또한 이 길의 매력 아닐까?

길이 뻗어나가는 곳을 따라 시선을 이어가자 그림 같은 곳이 보였다.

호수와 아슬아슬하게 닿을 만한 경계에 벤치와 우두커니 선 나무의 모습에서 하나의 그림이라 여겨도 좋을 만큼 호젓한 기색이 완연했고, 여기에 가을색 물감이 채색되었다면 그 풍류는 극치에 다다랐을 터.

호수에 밀려 내륙이 깊게 움츠린 지점, 은사시나무숲이란다.

복잡한 호반의 선이 있어 이 길 위 산책이 아름다운 시간 아닐까?

곡선의 길과 하늘로 뻗은 수직의 나무가 언뜻 어울리지 않을 것 같았지만, 이렇게 디딘 땅에 여유가 충만했고, 그 여유를 채운 공간들은 오롯이 쉼의 의미를 다소곳이 품고 있었다.

좀 전에 봤던 호수와 땅에 걸친 듯한 자리에 도착했다.

멀리서 볼 때와 가까이 다가섰을 때의 상이한 모습에서 차이는 확연했다.

멀리서 볼 때엔 그냥 걸어두고픈 액자의 이상적인 모습이었다면 가까이 다가서자 현실과 이상을 아울러 잠시 앉아 발아래부터 펼쳐진 호수에 명상의 사념을 돛단배로 띄울 모습이었다.

어느덧 디딘 땅이 위태로워지고 호수는 거대해졌다.

이 다리를 건너면 9월에 찾았던 옥천의 부소담악과 같은 정취의 길로 변했다.

양옆 호수에 위태롭게 떠 있는 길은 꿋꿋이 호수를 지나 섬과 같은 은둔의 숲과 호수로 이어졌다.

양옆은 호수로 길은 위태롭지만 그 길 위를 걷는 마음은 한 치의 불안도 없었다.

그럼에도 호수 위를 걷는 착각이 들었다.

호수에 떠있는 듯한 길은 조금 더 진행하게 될 경우 두 갈래로 갈라졌고, 8자 모양처럼 다시 만났다.

위태로운 길을 지나 두 갈래 갈림길에서 앞서 지나왔던 그림 같은 자리를 돌아봤다.

여전히 그림은 선명한 숲과 호수를 간직한 채 미동도 하지 않고 굳건히 붓질을 하며 가을을 서서히 채색했다.

갈림길에서 좌측길로 진행하면 다시 호수와 뒤섞인 자리가 나왔다.

호수를 향해 뭍이 나가고자 함이었을까, 아니면 호수가 뭍을 껴안은 곳일까?

그 자리에 잠시 우두커니 서서 멀리 지나왔던 액자를 다시 바라봤다.

형체는 희미해졌지만 여운은 그대로였다.

길의 끝이자 시작인 곳에 배 선수 모양의 전망대로 서 있었다.

앞서 갈라졌던 길이 다시 만나는 곳, 길은 만나기 무섭게 끊어진 육지를 넘어야만 했다.

다리를 건너 다시 갈림길과 마주했다.

다리를 건너 바로 갈림길이 나왔는데 이렇게 헤어진 길은 결국 육지의 끝에서 만날 운명이었다.

바로 옆에 거울 같은 호수가 있는 길, 묘한 쾌감의 연속이자 감성의 역치를 뛰어넘었다.

좌측길로 얼마 가지 않으면 배 모양 전망대에 다다를 터, 가는 길에 벤치가 걸어온 피로를 말끔히 덜어주겠단다.

그저 발아래부터 뻗어나간 호수를 바라보며 시나브로 피로를 털어주겠단다.

길옆 호수 방향으로 미세한 점이 보여 다가서자 거대한 거미 한 마리가 집을 지어놓고 터전을 만들었다.

길의 끝이 인척에 다다랐다.

끝의 후련함이 아닌 아쉬움은 점점 커져갔다.

갈라졌던 길이 마지막으로 만나는 장소, 그곳에 육지와 길의 끝이 기다리고 있었다.

전망대에 도착했다.

전망대 앞에는 작은 섬이 그들만의 견고한 호수의 성벽을 쌓아 영원의 제국을 건설했다.

어느 누구도 그 세상에 발을 들일 순 없었지만 동경의 시선은 성벽을 훌쩍 뛰어넘을 수 있었다.

지금까지 걸어왔던 길을 멀찍이 바라봤다.

직접 걸을 때와 또 다른 느낌으로 걸을 때의 잔잔함은 이 자리에 서는 순간 모든 시간이 멈춰 영속적인 조각품이 되었다.

돌아가는 길은 왔던 길과 다른 길을 선택했다.

많은 걸 보고 느끼고 싶었던 욕심을 주체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쉬움에 나도 모르게 뒤돌아서 더 이상 갈 수 없는 길을 물끄러미 바라봤고, 그 담담한 모습으로 인해 발걸음을 옮기기 쉽지 않았다.

잔잔한 바람이 호수에 작은 물이랑을 만들며 피아노 소리가 잔잔히 울리는 형태를 표현했다.

왔던 길 또한 갈 때와 큰 차이는 없었지만 길을 통틀어 같은 건 하나도 없었다.

지나왔던 길이 그제서야 선명하게 보였고, 그 길을 통해 다시 돌아가기 전 호수에 둥둥 떠다니는 나약한 뭍과 간신히 잇는 다리를 담았다.

지난 대청호의 부소담악으로 가는 길처럼 호수 위에 위태로운 모습 이면에 유연한 모습도 보였고, 이 모습이 이 길을 단적으로 보여준 징표였다.

가는 길에 유독 무거운 고독에 외로이 앉아 있는 벤치들이 눈에 띄었다.

횡성호수길을 온다면 길 주변의 다양한 모습도 좋지만 길이 꿈틀대며 역동적이고 단아한 이 자체의 모습 또한 장관이 아닐 수 없었다.

앞으로 가야 할 길은 올 때의 길과 달리 둘레길처럼 돌아서 나가는 길이 있었고, 그 길을 선택했는데 결국 길은 원점에 대한 믿음이 있기 때문에 두려움 또한 전혀 없었다.

부쩍 다가온 가을은 무심코 지나칠 수 있기도 했지만 이렇게 정황을 포착한 순간부터 이미 마음속까지 가득 들어차기 시작했다.

새벽부터 길을 찾은 보람은 어느 하나로 명확하게 대답하는 대신 길 전체의 깊은 메아리 같은 모습 때문이었는데 그런 가운데 방점을 찍는 것들이 몇 가지 있었고, 이 또한 그중 하나였다.

아직은 설익은 가을이었지만 어느 순간 하나 왜소하지 않고, 그렇다고 화려하게 도드라진 것도 아닌, 이런 형용하기 힘든 진득한 것들이 있기 때문이었다.

한 무리 곧게 뻗은 나무숲이 호수에 떠 있는 섬에 의지하며 다가오는 계절과 지나가는 계절 모두를 감광하여 무심히 보여주고 있었다.

호수로 기나긴 팔을 뻗은 뭍이 좀 전과 달리 이제는 조금 여유를 되찾은 것인지 벤치가 일정한 간극을 두고 가만히 앉아 호수를 응시하고 있었다.

이렇게 호수와 한결같은 거리를 유지한 호반길은 처음이었다.

횡성이 그리 먼 곳이 아닌데도 늘 지나는 길목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건만 파랑새는 곁에 있었다.

한 뿌리, 두 가지.

독특한 나무의 형상을 감상했다.

이렇게 여러 숲과 여러 형태의 길을 천천히 걸었다.

B코스를 한 바퀴 돌아 원두막 쉼터가 인접한 자리로 돌아왔다.

둘레길에 접어들어 유일하게 장실이 있는 곳으로 환상 형태의 A코스와 B코스가 만나는 지점이기도 했다.

또한 구간이 바뀌면서 길도 이제 무장애길처럼 넓고 다부진 길로 옷을 갈아입었다.

장실 앞 차량은 아마도 여기 관리하시는 분이 아니었을까?

스카이워크처럼 호수 위로 떠 있는 전망대, 호수길 전망대에 도착했다.

A, B코스의 길을 함께 볼 수 있는 만 형태로 호수가 들어온 형상에 이런 전망대를 세워놨다.

특이하게도 길게 줄지어 뻗은 하늘의 구름도 인상적이었다.

여기 또한 자연으로 가득 채워진 나지막한 산들이 둘러싸여 있어서인지 새들이 마음껏 활보했고, 때마침 허공을 가르던 새가 멀리 또 다른 전망대 가까운 곳 호수에 내려앉았다.

초입에서 찍어놓은 지도를 펼치자 멀리 보이는 전망대가 '가족 쉼터'로 이름을 달고 있었다.

무성한 숲에 살짝 얼굴을 들이민 쉼터로 희미하게 이어진 길이 보였다.

그리 멀지 않은 거리라 10분 내로 갈 수 있겠다.

문득 새 한 마리가 호수 위를 낮게 유영했다.

이렇게 탄탄하게 닦여져 걷기 좋은 길을 걸어 가족 쉼터로 향했다.

자작나무가 많은 숲을 지나며 벌써 가을 준비에 여념 없는 자작나무가 이파리를 떨궈 유독 가을 정취가 물씬 풍겼다.

길을 걷던 중 앞서 머물렀던 호수길 전망대를 바라봤다.

호수길 초입에 자작나무 정령들은 이제 다양한 생명의 형태를 보여줬다.

그렇게 주변을 둘러보는 사이 도착한 가족 쉼터 위로 올라갔다.

가족 쉼터는 다른 쉼터나 전망대에 비해 너른 곳으로 동시에 여러 가족들이 이용해도 될 만큼 넓기도 했지만 탁자가 여럿 비치되어 있었다.

때마침 데크 위에 밟히는 게 있어 자세히 살펴보자 도토리가 자욱히 떨어져 있었다.

이 또한 가을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앞서 호수길 전망대에서 가족 쉼터를 바라봤다면 이제는 자리를 바꿔 가족 쉼터에서 호수길 전망대를 바라봤다.

아직은 여름의 잔해에 짙어 가을이 다가설 자리가 그리 넉넉지 않다고 여겼지만 이렇게 보면 가을은 알흠알흠 물들고 있었고, 계절을 멀리서, 함께 바라볼 때 그 진가가 와닿았다.

아직 오전이긴 했지만 여전히 횡성호가 움튼 세상은 거짓말처럼 평온했고, 구름이 두텁던 하늘도 점점 제 빛깔을 되찾기 시작했다.

B코스를 한 바퀴 돌고, 다시 원점으로 가는 A코스를 걸으며 초입과 점점 다가설수록 어둡던 대기는 가을의 심장 박동이 뛰듯 맑고 경쾌한 대기로 생동감이 돌기 시작했고, 가는 길에 산림욕장을 거쳤다.

쉴 수 있는 공간으로 짜임새 있게 꾸미긴 했지만 출입금지 상태라 여기서 더 이상 들어가지 못했는데 얼핏 촘촘히 들어선 소나무 숲을 스치는 가을향이 향그로웠다. 

들어올 때와 달리 나가는 길은 차라리 산길에 가까웠다.

그렇더라도 걸음의 본질은 끝까지 잊지 않았다.

타이타닉 전망대란다.

타이타닉 선수처럼 생기긴 했는데 앞에 떡하니 가린 나무로 인해 그리 타이타닉 기분을 내긴 쉽지 않겠다.

설마 여기서 타이타닉 흉내 내는 된장은 없겠지?

길을 거의 다 돌아 마지막 전망대인 오솔길 전망대에 다다랐다.

다른 길들과 달리 여긴 비교적 호수와 고도차가 꽤 있는 지점이었고, 그래서 산의 오솔길 전망대라 명명했을 터, 그래서 호수 표면과 비슷한 눈높이를 보여줬던 여타 전망대와 달리 여긴 멀찍이 떨어져 보는 착각이 들었고, 돌아갈 즈음이라 호수가 아닌 일대 세상을 세세히 둘러보길 바랬는지도 모르겠다.

오솔길 전망대가 보여주는 세상은 이랬다.

특히나 대기가 청명했던 날이라 여름의 무거운 세상에 균열이 생기며 단조롭던 녹음의 틈으로 숲의 성숙이 고개를 내미는 형국이었다.

A코스의 출발지와도 같았던 개골고개 작품이 멀리 보였다.

이로써 횡성호수길의 온전한 형태를 가슴에 담는 방점을 찍는 격이었다.

고갯마루에 옛시간, 아니 향수를 담은 작품, 바로 장터 가는 가족이었다.

'아버지와 어머니, 누나와 동생 그리고 바둑이까지 함께 떠나는 설레임 가득한 장터 가는 가족의 정겨운 여정을 조명해 보고, 오일장으로 이어주던 길은 호수에 잠겨 돌아가지 못하는 길이 되었지만 잃어버린 기억에 대한 회상을 통해 과거와 현재를 잇는 마음의 길을 연결하고자 하였다.'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일생 중 한 순간의 아름다운 추억을 누구나 간직하며 그 추억을 자신만의 자랑으로 여긴다.

이 또한 그런 자랑들의 여러 접점이 아닐까?

바둑이도 장터 가는 길엔 설레는지 쉴 새 없이 흔들어대는 꼬리가 상상 속에서 그대로 재현되었다.

더군다나 수몰민들의 추억은 허허로운 호수 속에 잠자고 있어 얼마나 아련할까?

요즘은 보기 힘든 꽃이 되었지만 어릴 적엔 이 꽃의 달콤한 꿀을 무던히도 많이 먹었다.

그래서 횡성호수길은 단지 자연을 향유하는 길이기도 했지만 아득한 추억을 회상하는 길이기도 했고, 이런 도화선이 촉발한 불꽃이 가을이라는 은은한 장작을 만나 가슴속에서 아련히 타올랐다.

설레는 길의 시작과 달리 아쉬운 길의 끝, 대입된 공식처럼 횡성호수길 여정이 끝나고, 수몰 전 고갯길에서 그제서야 깊은 한숨을 들이쉰다.
호수길은 크게 두 환상길이 눈사람 형상으로 이어져 있었는데 각각 시계 방향으로 산책하도록 권하고 있어 가는 길과 돌아오는 길 모두 다른 풍경이었다.
그 길이 끝나고 함께 만나는 지점이 옛 지명, 개골고개로 거기엔 작은 사루비아 화단과 장터 가는 길이란 작품이 익살스럽게 자리하고 있어 쉬면서도 눈은 즐거웠다.
그 흐뭇한 여운을 마음 장바구니에 챙겨 추억의 가족은 장터로, 난 다음 여정지로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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