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새벽에 걷는 호수길 따라 가을은 깊게 뿌리를 내려 정체된 공기 속에서도 독특한 향취가 줄곧 함께 걸었다.
대부분 호수 둘레길이 호수에서 멀찍이 떨어져 평행선을 그린다면 이곳 호수 둘레길은 호숫가에 녹아든 나뭇잎도 식별할 만큼 지척에 붙어 묘한 정취가 있었다.
마치 동네 공원길을 걷는 착각에 빠질 정도로 길은 탄탄하게 닦여져 있었고, 그 길의 지루함에 발길 돌릴까 싶어 파생된 길은 산중 오솔길처럼 한두 사람이 지나갈 정도의 폭에 호수와 숲 사이를 교묘하게 뚫고 호수로 돌출된 반도로 지그재그 뻗어 있어 걷는 재미도 솔솔 했다.
새벽에 피어오를 물안개는 기대할 수 없는 날씨라 아쉽지만 모든 만족을 채울 수 없는 노릇이었고, 8km 조금 넘는 도보길을 걸으며 도시와 다른 텅 빈 산책로에서 산책의 무료함과 피로를 잊은 채 쉼 없이 길의 안내에 내맡기는, 사념의 무중력 상태는 비바람 몰아치는 인생의 항로에서 잠시 한 몸 비빌 수 있는 작은 섬이자 우산이었다.
횡성호수길
2000년 횡성댐이 완공되면서 횡성호라는 인공호수가 만들어졌고 그 호수를 중심으로 총 31.5km 6개 코스의 횡성호수길이 조성되었다. 횡성호수길은 1코스 횡성댐 길(횡성대-대관대리 3.0km 약 1시간), 2코스 능선길(대관대리-횡성온천 4.0km 약 2시간), 3코스 치유길(횡성온천-화전리 1.5km 약 1시간), 4코스 사색 길(화전리-망향의동산 7km 약 2시간 30분), 5코스 가족 길(망향의동산 9.0km 약 3시간), 6코스 회상길(망향의동산-횡성댐 7.0km 약 2시간 30분) 이렇게 테마별로 구성되어 있다.
그 중 5구간 가족 길(9km)은 횡성호를 가까이서 제대로 만끽할 수 있는 코스로 유일하게 출발점으로 되돌아오는 회귀코스이다. 망향의 동산에서 출발해 회귀하는 A 코스는 한 폭의 그림 같은 호수에 비친 물그림자를 감상할 수 있는 세 곳의 전망대와 아기자기한 조형물들이 곳곳에 있어 쉬엄쉬엄 사진찍기 좋아 관광객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다.
B 코스(4.5km)는 원시림이 가득한 오솔길이 이어진다. 호수 파노라마 풍경을 볼 수 있는 횡성호 쉼터 전망대와 은사시나무 군락지가 환상적인 세계로 안내한다. 횡성호수길 5구간은 2020년 문화체육관광부 ‘열린관광지’로 선정되어 일부 구간(주차장-가족쉼터)에 대해 무장애 동선 정비를 완료하였다.
[출처] 횡성호수길_대한민국 구석구석
여명이 닿기도 전, 어둑한 새벽에 도착하여 폐부에 신선한 공기를 넣는 동안 여명이 찾아들고, 어둠이 걷힐 무렵 호수 둘레길을 향해 첫 발을 내디뎠다.
너른 주차장에서 호수 둘레길로 가는 길엔 걷기 좋은 데크길이 있어 걸음을 디딜 때마다 새벽 상큼한 공기를 뚫고 데크에 통통 울리는 소리가 무척 경쾌한 아침 새소리처럼 울려 퍼졌다.
사실 어둠이 걷힐 때까지 차에서 뜬눈으로 음악을 듣고 있다 하루 빛이 다가올 때 감각이 둔감해져 멍한 상태로 있다 한 분이 안개를 헤치듯 어둠 속을 뚫고 가는 모습에서 기실 어둠이 아닌 새벽 여명이 밝았음을 자각했고, 그분이 걷는 길을 따라 총총히 걸어 둘레길에 닿을 수 있었다.
둘레길 초입에 깔끔한 지도가 있어 사진으로 담아 틈틈이 보면서 호수길을 걷기로 했다.
초행길이지만 길을 잃어버릴 염려는 없었으나, 초행이라 갈림길에서 방향 감각을 살짝 잃었을 때 이런 지도는 이정표 다음으로 깨알 같은 지침이 된다는 나름 경험을 통한 사전 정보 수집과도 같았다.
얼핏 지도를 봐서는 둘레길이 5구간으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전체가 잘 조성된 공원이나 다름없었다.
횡성호 둘레길에 들어서자 이 길의 특징을 대략적으로 유추해 볼 수 있었다.
바로 호반과 궤를 함께하는 길이라 묘한 기분이 들었다.
호수와 산 사이 경계를 거닐지만 두 세계 모두 공감대의 교집합에 속해 있다는 소속감이랄까?
그러면서 잔잔한 호수의 숨결을 그대로 느낄 수 있었다.
처음으로 카메라를 끄집어내 셔터를 눌렀다.
실제 동이 틀 무렵이라 여명이 물러날 시간이긴 했으나, 두터운 구름이 새벽 여명의 옷자락을 붙잡아 끈질기게 작별을 늦추고 있었다.
부스스 아침잠을 힘겹게 깨는 하루가 가을만큼은 늘어지게 늦잠을 자고 싶었나 보다.
호수에 잠기기 전, 마을을 연결하던 도로와 고갯길이 이제는 과거를 기록한 유물이 되어 버렸다.
과거 개골고개란 이름으로 수몰되기 전에 두 마을을 잇는 고갯마루와 같은 곳으로 둘레길은 우측으로 진행되었다.
자작나무 정령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걸으면 감상에 몰입할 수 있도록 안내자가 되어 줬다.
여기뿐만 아니라 둘레길 중간중간 이런 나무 정령들이 바른 길로도 안내했지만 자칫 무미건조할 수 있는 길의 무료함도 달래줬다.
호수에 수몰을 피한 일련의 수풀들이 이른 가을을 예고했다.
좀 전까지 어둑하던 새벽 여명이 완전 걷힐 무렵, 호수에는 여전히 정적이 남아 있었다.
호수길은 이렇게 복잡한 호반을 충실히 따르며 직선이 만연한 현대에도 순응하지 않고 서슴없이 수많은 곡선을 그려 나갔다.
구름이 두터운 떼를 지어 어디론가 총총히 흐르는 것과 반대로 호수는 그 자리에서 생선 비늘처럼 작은 이랑만 그릴뿐이었다.
가끔 길가에 지친 걸음을 달래는 벤치가 있었지만 아직은 이른 시간이라 깊은 잠에서 깨지 않았다.
사진을 찍으며 가다 서다를 반복하는 사이 앞서 갔던 분은 점점 거리를 벌리며 성큼성큼 나아갔는데 출발점과 연결된 A코스를 끝으로 멀리 B코스로 이어지지 않고 도중에 돌아 나가셨다.
다시 자작나무 정령들이 지키고 있는 벤치에 다다랐는데 편하게 쉬는 모습 또한 인간의 모습을 충실히 재현했다.
호수의 정취를 갤러리처럼 담아 놓은 호수 갤러리는 횡성호의 아름다운 계절을 전시해 놓았다.
또한 노을 쉼터이기도 해서 여서기 호수 조망으로 걸어왔던 피로를 털어낼 수도 있었다.
카메라와 아이폰을 병행하여 걷던 내내 호수와 길의 모습을 담았는데 결과물을 보면 확연히 차이가 났다.
카메라가 현재의 모습을 담는데 충실했던 반면 아이폰은 보기 좋은 수준으로 화사하게 담으며 새벽의 여명과 어둑한 대기를 조금 왜곡하기도 했다.
사이좋은 자작나무 정령들.
복잡한 호반 따라 길 또한 셀 수 없을 만큼 지그재그를 반복하며 지루할 틈을 주지 않았다.
이성의 영역에서는 직선이, 감성의 영역에서는 곡선이 공식이자 진리임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줬다.
가을이 깊어감에도 여름의 잔해는 여전히 남아 무성한 풀섶 넝쿨이 사람 키를 훌쩍 넘겼다.
A코스에서 B코스로 이어지는 길목인 원두막 쉼터는 만남의 광장이자 마지막 장실이 있는 곳으로 A코스는 여기서 우측의 너른 길로 이어졌고, B코스는 좌측에 상대적으로 좁고 곡선으로 더욱 유연해지는 길로 이어졌다.
이렇게 보면 A코스는 몇 사람이 나란히 걸을 만한 넓고 매끈한 무장애길이었고, B코스는 한두 사람이 지날 수 있는 오솔길과 흡사했다.
원두막 쉼터의 원두막은 호수 조망의 트여있는 곳으로 지금까지 지나왔던 길과 앞으로 가야 될 방향을 유추해 볼 수 있는 곳이었다.
쉼터라 그런지 유독 자작나무 정령들이 사이좋았다.
원두막 쉼터엔 과거를 회상해 볼 수 있었다.
원두막이란 단어조차도 과거 유물이나 마찬가지로 흔히 과수원에 들러 직접 과일을 사서 먹을 경우 사다리를 타고 올라 원두막에서 너른 과수원을 조망하며 과일을 먹을 수 있는 곳이었고, 게다가 옆에는 아이들의 말뚝박기 놀이가 한창이었는데 이 또한 지금과 비교해 유물과 같은 놀이였다.
강원도 횡성군에는 태기산(泰岐山)이 있다. 진한의 마지막 왕이었던 태기왕이 신라의 박혁거세에게 패해 북쪽으로 가던 중 덕고산에 이르러서 신라와 대항하기 위해 성을 쌓았는데 그것이 현재의 태기산성이라고 한다. 태기왕은 산성을 쌓고 정예병을 훈련시켰다. 산성 안 평지를 개간해서 군량미를 보충하고, 산채를 채취해 부식물로 이용하였다. 군사들을 최강의 병사로 만드는데 주력하였다. 태기왕은 신라군이 올 수 있는 남쪽을 주로 경계하였다. 그러나 신라군은 남쪽을 경계한다는 것을 알고 반대편으로 공격해 결국 태기왕은 참패한다.
[출처] 진한의 태기왕이 쌓은 태기산성_한국문화원연합회
태기산의 유래, 바로 태기왕과 그가 다스리던 왕국의 이야기로 진한 맥국의 설화로 결국 신라에 흡수되었단다.
오색꿈길, 바로 오솔길과 같은 길로 복잡한 호반을 이어주는 B코스로 접어드는 순간이었다.
한 바퀴 약 4.5km의 B코스로 진입하기 전, 또다시 습관처럼 지도를 담아 지침서로 사용했다.
지금까지 너른 길을 밟아 한적한 호반의 가을 내음에 도치된 길을 뒤로하고 이제는 호수와 동행하는 오솔길로 접어들어 더욱 짙은 숲 내음의 진동 속에서 이채로운 곡선을 만날 차례였다.
'시간, 자연 그리고 만남'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가을 젖는 반계리 은행나무_20221011 (2) | 2023.12.07 |
---|---|
호수 속 가슴 아련한 추억의 횡성호수길B_20221011 (2) | 2023.12.07 |
이른 가을 흔적 봉화와 안동 고산정_20221002 (1) | 2023.12.05 |
가을 찾기, 일상_20220926 (1) | 2023.12.05 |
노을 지붕, 원주 반계리 은행나무_20220925 (2) | 2023.12.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