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 자연 그리고 만남

추억을 따라 점점이 산책하다_20171130

사려울 2019. 2. 15. 05:35

도심 구경이라면 서울에서도 지겹게 하는데 왠 대구까지 왔당가?

추억의 산책이라는 편이 적절한 표현이겠다.

지하철 중앙로역에서 내려 작심한 대로 정처 없이 꽤나 많이 돌아다니며 골목 곳곳을 누비고 다녀 줄곧 잡아도 10여 km 이상 산책을 한 것 같다.

정처 없다 보니 지도나 미리 짜여진 경로도 없이 그저 발길 닿는 대로 골목도 접어 들었다 대로변을 걷기도 하면서 얼추 지난 후의 경로-지도를 보며-는 반월당역>명덕역 방면 남문시장과 헌책방 골목(지금은 자취를 감추었다)>유신학원과 대구학원 뒷 골목>동성로 각종 골목길>옛 중앙파출소(맞나?) 인근>약전골목>서성네거리>곽병원>옛 만경관>옛 미도파백화점>학원서림>교동시장 순으로 걸어 다녔다.




서울로 따지면 청계천 헌책방거리처럼 헌책방이 즐비 했던 남문시장 인근은 세상의 변화에 따라 사라지고, 매끈한 건물이 점점 자리를 한 몫하고 있었다.

남문시장 내부는 불 꺼진 상점들이 많고 출처가 어딘지 알 수 없는 국밥이나 수육 냄새가 과거 기억을 상기 시켜 주었다.

혼자만의 아쉬움이라면 헌책을 구입하기 위해 책이 빼곡한 나머지 발 디딜 곳 조차 없는 다락방 같은 책방의 정취를 느낄 수 없단 것, 가뜩이나 좁은 공간에 여러 사람이 움직일 때면 서로 책 더미에 바짝 붙어 지나가거나 지날 수 있도록 해 주던 배려가 아름다운 미덕이었던 것 같다.

지금 서점의 분위기와는 상상할 수 없는 괴리감이 있다.




한길에서 벗어나 좁은 골목으로 살짝 꺾으면 이내 이런 풍경은 심심찮게 만날 수 있다.

문 닫은지 오래될 성 싶은 세탁소 처마는 이미 나무로써의 질긴 생명력을 버티는 듯 바스러질 정도며, 수십 번은 덧칠 했을 것 같은 시멘트 벽의 페인트는 그마저도 덕지덕지 벗겨져 한 바탕 세찬 바람에도 떨어져 나갈 만큼 낡았다.

한 사람 겨우 지나다닐 정도의 골목은 출퇴근, 등하교 길에 넘쳐 나던 사람들이 부딪히지 않게 서로 피하기도 벅찬데 여전한 것 보면 그 환경을 원망하지 않고 늘 순응하며, 또한 타인의 배려도 놓치지 않았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오래된 동네에 걸맞지 않게 아스팔트 도로는 새로 포장하여 매끈하다.




단과 학원의 최고봉 중 하나였던 유신학원은 이렇게 명맥만 남았고, 대구학원은 건물만이 남아 과거 영광의 자취만 보여줄 뿐 더이상 기지개도, 재기도 귀찮아 보였다.

넓은 강의실에 빼곡히 앉아 열강하던 강사와 학생들, 그리고 강의를 듣기 위해 강의실 입구에서 추위에 떨며 줄 지어 기다리던 장면들이 스쳐 지나갔다.

12,000원을 아끼겠노라고 도강-도둑 강의-을 할 때면 수강증을 검열하는 분들이 들어 올까 노심초사 하며, 볼펜 한 자루를 들고 검열하시는 분들이 오면 수강증을 깜빡해서 못 가져 왔다면 볼펜으로 손바닥 한 대로 넘어가는, 나름 허술한 검열 과정이 지금은 인정이었구나 싶다.

일대에서 가장 높은 빌딩 중 하나였던 유신학원은 높은 빌딩이 없어져 이제 초라한 명맥만 남았고, 대구학원은 얼추 흔적만 알아 볼 수 있는 자취만 남아 딱딱하게 서 있던 회색빛 건물은 없었다.

희안하지?

아직도 건물들과 일대 풍경들이 기억에 생생하게 남아 있어.

게다가 유신학원과 대구학원 사이 뒷골목에 도서 도매점이 하나 있었는데 직원들이 분주히 책들을 옮기는 어수선한 분위기에 끼어 소설책을 훑어 보고 알바비를 떼다가 몇 권씩 책을 고르면 책 나르던 직원들 중 내가 서 있던 곳과 가장 가까이 있던 직원이 책 표지에 인쇄된 가격표를 보고 대충 가격을 합산하고, 그 책값을 지불하면 책을 포개어 가장 바깥 표지에 대충 종이를 덧대고 붉은 싸구려 노끈으로 익숙한 솜씨로 매듭지어 건네 줄 때 설사 책 더미가 무거워 손바닥이 벌겋게 달아 오를 지언정 행복감에 그 싸한 통증을 잊고 꾸역꾸역 집으로 돌아왔던 기억과 감흥이 너무나 생생하다.

미로 같은 골목을 요리조리 헤쳐 다니며 잠시 짬내어 책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던 도매점 갈 때의 기분이란...

학원 앞에 오락실은 입추의 여지가 없이 붐비었는데, 알바 도중 잠시 휴식 시간에 오락실을 들러 크게 터져 나오던 음악을 듣는 기분 또한 잊을 수 없다.

최대한 돈을 아끼겠다고 러닝 타임이 긴 곡을 선곡 했는데 7분이 넘던 마이클 잭슨의 Will you be there, 10분 남짓한 스콜피언스의 Dynamite를 누르면 질서 정연하게 쌓여 있던 CD가 픽업으로 로딩 되며 재생 전 공백의 설렘도 어찌 잊으랴.

이런 기억들을 추억으로만 간직한 채 그 동안 잊고 살아온 만큼 내 삶이 그토록 치열 했던가?

활자와 기록의 절실함을 다시 한 번 감탄하게 된다.




기대가 크면 실망이 크다고 했던가?

기억 만큼이나 자취가 남아 있을 거란 기대와 달리 흔적이 거의 없어 실망을 잔뜩 안고 있는 마당에 오래 있어본 들 뭔 소용 있겠나 싶어 이내 학원가와 그들과 연결된 골목길에서 자리를 뜨고, 바로 대구 최대 서점 중 하나 였던 제일서적 부근으로 걸어 갔다. 

기억에 중앙파출소 부근이라 익숙한 기억으로 여유가 있어 곧장 거기로 가지 않고, 조금 둘러 제일서적 앞 좁은 도로(현재의 동성로1길)의 가장 먼 갈림길에서 제일서적 방면으로 걸어갔다.

이유 중 하나라면 친구들과 뻔질나게 드나 들던 노래방이 몇 군데 있었는데 현재 봉산주차장 부근에 밀집되어 있던 노래방이 도시를 통틀어 가장 저렴 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최신곡 업데이트는 그리 신속하지 못했지만 7,000원을 내면 손님이 적은 뜸한 시간대엔 3시간까지도 연장을 해 주는 나름 쥔장의 센스 터지는 운영이 마음에 들었다.

그마저도 2~3시간 정도 노래를 부르다 쥔장이 기계를 끄는게 아니라 우리 성대가 남아 나질 않아 자발적으로 나갔던 만큼 주머니 사정이 넉넉치 않은 학생들에 대한 배려였겠다.

노래방 자리를 지나 옛 제일서적 자리로 가던 길을 재촉하던 중 다리 피로도 풀겸 카페에 들러 커피 한 잔 때리는데 학습에 집중한 스터디 그룹이 눈에 많이 띄이고, 소근대는 열띤 대화를 하는 그룹도 있었다.

한 자리에서 마냥 시간을 보낼 수 없어 약전 골목으로 다시 출발, 가끔 들리던 한약방을 찾아 봤지만 대략적인 위치만 기억하고 간판은 아리까리했다.

여긴지 삼보인지?



이런 쪽바리 침략기 풍은 뭐지?

제일 교회 맞은 편에 상당히 고풍스런 건물이 있다.



서성네거리로 곧장 전진해서 다시 큰 도로를 따라 중앙로 방면으로 천천히 걸어가던 중 만난 공중전화 박스라...

무슨 할 이야기가 그리 많았는지 선불카드를 구입해서 이 전화기에 꽂고 잠시 수다를 떨다 보면 몇 천원 짜리 카드는 얼마 못 가 돈 달라고 깜빡거렸다.

하루 일과 중에 도심에서 그리 긴 통화는 대기 줄에 선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으로 감당하기 어려웠고, 늦은 밤에 집 부근 공중 전화가 긴 통화에 안성맞춤이었다.

특히나 겨울은 찬 바람에 전화 수화기를 잡은 손이 추위에 고스란히 노출된 상태로 부동의 자세를 취해야 되는데, 좀 오래 있다 보면 손등에 떨어져 나갈 통증이 밀려와 이 공중전화 박스에는 없지만 대부분 도어가 달려 있어 꼭 닫아야만 했다.

근데 지금은 상식 없는 사람이라 눈총 받아 쥐구멍이라도 기어 들어가겠지만 당시엔 흡연에 대해 너무 관대한 나머지 전화 박스 안에서 담배 피는 몰상식 벌거숭이가 참 많았다.

그 매캐한 담배 연기도 누군가와 통화를 위한 의지를 꺾지 못한 걸 보면 워찌나 통화의 재미를 누렸던가?




곽병원은 울 집에서 가족처럼 지내던 안양 아저씨가 사고로 주위에 가족이 없는 상황에서 우리 가족이 빈 자리를 대신해 준답시고, 간병을 해 주던 병원이라 상당히 연세가 있는 병원? 내 나이가 얼마 되지 않았는데 그걸 워째 알까?




대구에서 메이저 극장 중 하나 였던 만경관은 유일하게 2관이 있었더랬지?

이 역시도 세월의 파고에 밀려 났고, 그나마 명맥은 유지하고 있긴 하지만 원래 극장이란 게 젊은이들의 상투적인 약속 장소일 만큼 번화한데 찾아간 이 날 만경관은 그저 조용한 갤러리 삘이 가득하다 못해 썰렁하기 까지 했다.

세월 앞에 장사가 없다는 건 사람만 아니라 사람의 촉수가 뻗어 이룩해 놓은 것들도 비켜갈 수 없다.




미도파 백화점은 중앙로에서 가장 큰 건물 중 하나 였고, 옥상 층에 스카이라는 유명 클럽이 있었다.

근데 아직도 이 건물이 버티고 있을 줄 몰랐다.

백화점은 없어지고 오피스며 상가 건물이 되었던데 이 미도파 백화점 좌측이 한일극장으로 비록 1관이지만 가장 많은 젊은 사람들의 핫플레이스로 각광 받는 곳이었다.

지금이야 실내에서, 카페나 지하철 역사 같은 곳에서 만날 수 있지만 당시엔 실내라는 게 운신의 폭이 적었고, 매표소도 외부에 노출되어 있어 인기 영화는 계절적 특성에 고스란히 노출된 채 긴 줄에 합류하여 발권 차례를 기다려야만 했다.

생각 나는 영화가 터미네이터2와 휘트니 휴스턴 주연의 보디가드로 아무리 남부 지방이 따숩다고 하지만 한겨울 추위가 고통스러운 건 매한가지다.

지금처럼 구스다운이 흔한 시기도 아니었으니까 무심한 찬바람에 사위는 나처럼 온 몸을 움츠린 채 떨고 있는 사람들이 가득했지만 그렇다고 줄 서기를 포기하는 사람은 없었다, 참 독하지?




제일서적이 가장 큰 서점이라 가끔 구하기 힘든 책을 사러 제일서적을 갔지만 거기도 없다면 학원서림을 갔더랬다.

근데 학원서림에서 구하지 못한 책은 없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책은 박완서의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로 보통 동네 단골 서점을 찾고 없다면 제일서적이나 학원서림을 찾게 되는데 온 동네를 뒤져 찾아 봤지만 도저히 구할 수 없어 마지막 심정으로 제일서적을 찾았다.

허나 거기도 없어 이 책은 구할 수 없구나 단념 했고, 혹시나 학원서림을 찾아 기대 안하고 여쭤 봤더니 직원이 잠시 자취를 감췄다 나타나면서 책을 갖고 왔다.

제일서적은 널찍하고 짜임새 있게 책장을 배치시켜 놓았던 구조라 나름 현대적인 깔끔한 분위기 였다면 지하에 있던 학원서림은 빈틈 없이 책을 쌓아 놓아 창고 같은 분위기 였는데 묘하게 그런 학원서림의 음침한 느낌이 좋았다.

마치 책 더미에 둘러 쌓여 숨바꼭질도 하고, 대화를 나누거나 책에 파묻혀 곤히 낮잠을 잘 수 있을 것만 같은, 모든 인테리어적 기교를 배제하고 오로지 눈에 보이는 거라곤 책 뿐이라 그냥 보고만 있어도 행복했다.

그런 학원서림 흔적을 찾아 갔지만 건물은 그 자리에 있음에도 아쉽게 학원서림은 자취도 없었다.

그래서 길 가던 방향 대로 동아백화점 뒷편 교동시장을 향해 걸음을 재촉했다.

가던 도중 송죽씨어터가 보이네!

라디오에 간간히 광고 때리던 송죽극장은 아직 흔적이 남아 있다.

허나 여기서 영화 본 적은 없? 어벤저를 여기서 봤던가?

메이저 상영관이 아니라 야시시한 영화를 여기서 자주 했던 거 같은데?




교동시장 초입엔 납작만두와 떡복이 같은 분식집이 몇 군데 있고, 거기를 지나면 그물처럼 작은 길이 촘촘히 깔려 있는 교동시장이 나온다.

서울로 따지면 세운상가와 같은데 미군이 쓰는 생필품과 당시 일제 가전, 특히나 워크맨과 같은 포터블 제품들을 구할려면 교동시장을 찾거나 중앙로 지하상가를 찾아야 했다.

성인이 되면서 알았지만 용팔이 테팔이라는 말처럼 지하상가는 제품을 팔기 위해 호객 행위와 세치 혀로 고객을 무척이나 기만하고 바가지를 씌웠었다.

용팔이 테팔이란 말은 사실 소비자가 그들과 같은 사람들을 빈정대는 용어인데 그 부정적인 표현을 만든 건 결국 그들인데 지금 텅빈 교동시장을 생각해 보면 마치 중국 역사에서 반짝하고 사라졌던 진, 수나라 같다.

말이 옆으로 샜군.

분식점이 즐비한 곳에서 가전을 파는 교동시장으로 넘어가는 길목에 바로 이 오래된 식당이 지하에 있었는데 돈가스가 무척 유명한 집이 었다.

1,200원 짜리 돈가스를 시키면 다 먹지 못하고 남길 수 밖에 없을 만큼 양이 무지막지한데 처음에 묽은 스프가 나오고 이어 고깃덩어리 2개가 있는 본 메뉴가 나오지만 그 2개가 쬐깐한 2개가 아니라 우리가 흔히 먹는 한국식 돈가스 2인분과 같은 양이라 한창 소화력이 왕성한 나도 남길 정도 였다.

지하 그리 넓지도, 그렇다고 좁지도 않은 공간에 뭔 사람들이 그리 많이들 오시는지...

이 간판은 당시 그대로라 신기하다.

지금은 지하로 내려가는 셔터가 내려져 있지만 한창 성행할 때엔 이 좁은 통로가 늘 사람들이 들락날락 거렸을 정도로 유명한 만큼 오는 사람들이 참 많았다.

그 때 그 맛을 생각하면 궁금하구만.




바둑판처럼 조밀한 교동시장을 촘촘히 둘러 보던 중 교동시장 다운 물품을 발견했다.

공테잎으로 가장 흔하게 쓰던 이 테잎에 노래를 넣기 위해 얼마나 공을 들였고, 그 공들인 테잎의 노래를 들으며 얼마나 몰입을 했던가.

그러고 보니 울 집에 아직 워크맨 몇 개 남아 있는 거 같은데 작동은 할려나?

유독 겨울이 되면 옛생각이 나는 이유는 뭘까?

다른 계절들은 활동이 수월한 만큼 기억을 쌓아둘 일들이 그리 많지 않아서 일까?

작심하고 추억 산책을 했던 날이라 간소하고 편한 차림에 하루를 시간 내어 돌아 다녔고, 실제 당시 흔적들은 거의 없었지만 잊고 지내던 기억들을 충분히 회상하며 많은 생각의 물결에 떠다녔다.

그 시절 나와 잠시 스쳐 지났지만 기억에 생생히 남은 사람들은 지금 어디서 뭘하고 지낼까?

밤 하늘에 별처럼 세상 어딘가에서 미약하지만 길잡이가 되는 빛을 뿌리며 누군가의 희망 나무로 여전히 잘 지내고 있길 바라며, 추억 산책을 마무리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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