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 자연 그리고 만남

가을의 안동호반_20171107

사려울 2019. 2. 10. 05:47

집으로 돌아가는 날은 거창한 계획이 아니라 늘 그렇듯 주위를 둘러 보며 시간을 추억으로 아로 새긴다.

아이가 일기를 쓰고, 세일즈맨이 다이어리에 지났지만 간과해선 안될 포인트를 기록하듯.

아침 일찍 일어나 한 차례 적막한 호숫가를 둘러 보고 뒷정리를 마무리한 뒤 또 한차례 가족들과 함께 흩어진 시간들을 정리하는 것과 같다면 제대로 된 감정 전달일 수 있겠다.



이른 아침과 달리 호수와 숙소 주변을 가득 메웠던 안개는 다른 세상으로 던져 놓은 것처럼 일제히 걷히고, 전형적인 가을의 화사함이 자리를 떠나려는 사람들을 반긴다.

호수에서 바라본 숙소는 숲의 일부인 양 나무 숲에 뒤엉켜 빼꼼히 고개를 내민 부끄럼 많은 막내 같다.



휴양관에서 호수는 한달음에 당도할 수 있을 거 같지만 실상은 운동에 가까울 만큼 걷는 양이 만만찮다.

허나 데크가 매끈히 깔려 있어 걸음수를 헤아릴 겨를 없이 앞으로 빨려 들어 왠만한 방문객이라면 정신 나간 사람처럼 호수를 향해 하염 없이 걷게 된다.

단순히 주변에 녹아 있는 풍경이라면 모를까 호수의 거대한 위용에 매료될 수 밖에 없는 또 하나의 독립적인 풍경이라 나와 같은 자리에 서서 같은 방향을 바라 본다면 누구나 같은 판단과 행동을 하리라.



폰카, 아니 카메라라는 카테고리가 일상에 박히면서 누구든 이와 비슷한 행동 또한 이성의 프로세스에 당도하기 전 이런 행위를 할 거다.

마음으로만 가을과 풍경을 담는게 아니라 두고두고 꺼내볼 수 있고, 허공으로 흩어지는 감탄사를 나름 체계적으로 대신할 수 있는 방법이 이젠 카메라 셔터를 신중히 누르는 거니까.

콩나물 시루같은 대중 교통이나 엘리베이터 안에서 무안함을 해소하기 위해 스마트폰으로 시선을 맡기는 것과 같은 논리랄까?



호수의 위용에 걸맞지 않게 녹조가 상당하고 악취도 뒤따라 온다.

때론 자연을 방치하는 게 현명한 방법일 수 있다.

이익이 되었건 심미적인 기능 부여의 목적이건 간에 인간이 가공하는 순간 자연은 이렇게 변하는 걸 알면서도 여전히 인간의 횡포는 그칠 줄 모른다.



떠나는 가을, 만추의 풍경은 산골에서 부터 번져나가 겨울 준비를 재촉한다.

늘 아쉽고, 그래서 새로운 계절을 갈구한다.




휴양관이 보이지 않을 만큼 꽤나 멀리 나갔다 뒤를 돌아보곤 크게 한숨 돌리고 다시 휴양관으로 향하며, 잠깐 동안 둘러 봤던 시간 또한 다시 정리해 본다.

평화는 혼란의 먼지가 사라졌을 때 그 편안한 진면목을 음미할 수 있고, 매연이 가득한 도심 속에 늘상 노출되어 있었기에 자연이 퍼붓는 향기가 더욱 각별하듯 치열한 일상들 사이의 여행이 그래서 더욱 몽환적으로 느껴질 수 있겠다.




휴양림 내에 황토방도 있지만 이런 사슴 목장도 있다.

종종 사람들을 마주해서 그리 놀라지는 않고, 그들 본능에 내재되어 있는 경계심이 문득 치솟아 뭔가를 하다가도 이렇게 귀를 쫑긋 세우고 주위 목격되는 인적을 주시하는 습성이 있다.



그러다 늙은 사슴 하나가 무리에서 이탈해 우리가 서 있는 곳으로 다가와 괜스레 친한 척을 한다.



끝이 어딘지 모를 광활한 호수와 조금만 고개를 돌려도 빼곡히 들어차 있는 산세는 단조로운 바다가 시샘할 풍경이다.

그래서 늘 눈은 더 먼 곳과 더 넓은 곳을 찾아 두리번 거리고, 그러는 사이 계획된 시간들이 지나 늘 따라 오는 수순처럼 아쉬움의 흔적이 남는다.

가족과 함께 텅빈 공간 같던 이 첩첩 시골에서 보낸 시간은 그저 잊어 버렸던 평화와 화목을 되짚은 기회이자 추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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