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 자연 그리고 만남

짧은 만남, 긴 여운, 대구 비슬산_20240411

사려울 2024. 6. 30. 18:04

주어진 3시간 중 비슬산 정상 천왕봉에서 보낸 1시간을 제외한다면 2시간 정도의 짬이 주어졌고, 그 시간의 진수를 맛보기 위해 잠시 앉아 쉬는 시간은 사치라 여겨질 정도로 발바닥에 불이 났었다.
대견사 - 천왕봉 - 진달래 군락지 - 대견봉을 거치는 동안 그 많던 사람들은 순식간에 떠나버리고, 진달래 사이로 간간이 지나던 연인의 속삭임이 하루가 꺼져가는 석양의 햇살처럼 은은한 여운으로 번졌다.
천왕봉 허공을 가르던 한 무리 까마귀 떼의 활보, 진달래 사잇길에 얽힌 다양한 진풍경, 대견봉 아래 펼쳐진 세상의 이면들, 기암괴석에 기댄 사찰, 그리고 커피의 진득한 향처럼 은은히 번지는 땅거미를 끝으로 드라마틱했던 비슬산 여정을 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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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슬산의 유가사_20170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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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 표지석과 그 비슷한 높이에서 또 다른 세상을 포용하고 있는 진달래 군락지와 대견봉이 겹쳤다.

정상에서 폰으로 대충 봐도 절경의 유전인자는 변형이 전혀 없었다.

다시 한 번 더 대견봉을 자세히 살폈고, 품처럼 너른 고원에 얼룩처럼 불긋불긋 진달래 흔적이 보였다.
낮은 고도에서 부터 점차 봄이 산을 거슬러 오르는 걸 알 수 있었다.
뒤편에 봉긋 솟은 봉우리가 대견봉이며, 좌측 기상관측소가 조화봉으로 1천m가 넘지만 전체적으로 지세가 온화했다.

대견사로 오르내리는 셔틀버스를 탔던 곳으로 산언저리 무심히 흩뿌려진 산벚이 인상적이었다.

몇 년 전 유가사에 들렀었는데 그때와 달리 위치를 서로 바꿔 관찰한 셈이었다.
산벚이 필 무렵이라 실제 이 모습이 한 폭 그림 같았다.

한 무리 까마귀 떼가 요란하게 허공을 휘저으며 자유를 만끽하는 진풍경 또한 충분히 취할만한 장면이었다.
까마귀는 분명 막연하거나 무심하게 떼를 지어 일시에 떠도는 건 없겠지.
그래도 4년 전 우리 가족 생명의 은인이었으니까 그래서 내겐 영물이었다.
실제로 그런 사료들도 많았는데 이참에 까마귀는 몰라도 까만 냥이 한 번?
그러면 나는 쫓겨나겠지?

세상에 우뚝 솟은 천왕봉 표지석에 기대어 성취감과 절경이 주는 감흥에, 또한 떠나기 전 아쉬움에 흠뻑 취했다.

정상 표지석 아래에 새 생명이 움튼 흔적이 포착되었다.
역시 자연의 생동감은 어느 하나 소홀하거나 하찮은 게 없었다.

하산하는 길에 지나쳐 왔던 번개 맞은 자리들 중 여기가 가장 참혹했다.

서둘러 하산하여 좀 전 천왕봉에서 동경의 씨앗을 뿌렸던 진달래 군락지로 스며들었다.
그 많던 사람들이 대부분 이 길을 거쳐 군락지 내부로 갔었는데, 또 그 많던 사람들은 어디로 갔는지 인적의 정황을 느낄 수 없었다.
이럴 때가 앗싸, 가오리다!

아직 꽃망울은 굳게 닫혀 있었지만 상상의 힘은 망울을 틔워 산을 온통 물들였고, 그 핑크 파도 사이 초록의 소나무는 묘하게 조화로웠다.

이제 막 지나왔던 길을 되돌아보자 유일한 3명의 인적이 반가웠다.

그리 큰 소리로 대화를 나누는 게 아님에도 거짓말처럼 급작스럽게 적막한 틈이라 상대적으로 큰 소리처럼 들렸는데 그 소리가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에 반가웠던 이유였다.

바위 틈사이 솟구친 생명의 강인한 표상이었다.

군락지 일대가 습지처럼 여기저기 물 흐르는 소리가 미세하게 들렸고, 이런 고산지대에 습지 형태 또한 신기했다.

인공적으로 조성한 건지, 아님 정말 자연적으로 형성된 곳인지.

문득 지난해 초가을 여정을 즐겼던 대암산 용늪이 떠올랐다.

 

대암산_2023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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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셔틀 운행 전 1시간 남은 시점이었는데 사람들이 빠져나간 진달래군락지는 마치 해가 지고 저녁 어스름이 피어난 것처럼 묘한 정취가 피어오른 상태였다.

그래도 시간이 남은 걸 확인하고 진달래 군락지 내부로 이어진 길을 잰걸음으로 걸어 전망대 하나를 발견, 주저 없이 거기로 향했다.

전망대에 올라서자 조금 더 높다고, 조금 더 넓고 먼 시야를 제공받았다.

게다가 군락지 사잇길의 형체도 선명해졌다.

물론 만개한 진달래 가운데 우뚝 선 초록의 상록수가 더욱 압권이겠지만 관여도, 의도할 수도 없는 자연이기에 현재의 상태에서 찾을 수 있는 멋도 나 스스로를 위한 가장 현명하게 즐기는 방법 중 하나.

대견봉으로 향하는 길, 절벽 위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묘한 정취를 자아내는 대견사와 석탑 또한 절경의 일부였다.

막차가 출발하기 약 40분 정도 남은 상황이라 걷는 걸음의 속도를 한층 높여 걷기 수월한 구간에선 거의 뛰다시피 했다.

대견봉으로 하는 데크길과 야자매트길은 기암괴석 잔치가 벌어지는 곳이었고, 인척 같은 거리에 걷는 재미는 찰떡궁합이었다.

두 바위가 형제처럼 나란히 붙어 이름하야 형제바위.

상감모자를 닮았다고 상감모자바위도 있었다.

초점이 맞지 않아 상이 맺히지 않았지만 소원바위도 있었고,

거대한 백곰바위도 있었다.

마치 두 얼굴이 포개져 뽀뽀를 하는 듯한 형상의 뽀뽀바위.

대견봉으로 가는 길에 정자 전망대에 도착하여 진달래 군락지를 다시 감상하며, 진귀한 풍경에 잠시 넋 놓았다.

전체적으로 비스듬하게 기울긴 했지만 대견봉과 월광봉 사이 광활하고 편평한 지세에 진달래가 빈틈없이 가지를 하늘로 뻗었다.

비슬산이 내어준 고원에 꽤 많고 다양한 존재들이 상호작용을 하며 전체가 쉽게 접할 수 없는 절경이었다.

정자에서 완만하고 짧은 봉우리를 넘어서면 대견봉 정상과 함께 또 하나의 전망대가 서 있었고, 지금까지와는 다른 시선의 절경이 뻗어있었다.

가까이 대견사와 멀리 강우관측소가 있는 조화봉, 석검봉, 관기봉이 차례로 늘어서 있는 모습도 보였다.

또한 산언저리를 굽이치는 유일한 도로도 한 데 뒤섞여 장관이 따로 없었다.

대견봉은 낮은 산처럼 보였지만 그 봉우리에서 세상 모습은 정적이며, 전체가 하나로 이어졌다.

구름 사이 흐르는 노을을 보자 퍼뜩 정신을 차렸고, 얼마 남지 않은 시간으로 인해 미련 없이 떠나야만 했다.

대견봉엔 이렇게 퍼즐처럼 이어진 바위 위에 전망대가 있었는데 언뜻 각각의 조각들이 어설프게 짜여져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막상 그 위에 서면 기우임을 깨달았다.

막차가 출발하기까지 23분 남은 상황에서 비슬산에 올 수 있게끔 해준 진달래 군락지 안내도가 눈에 띄었다.

진작 이걸 참조했다면 군락지에서 두서없이 걸어 다니지 않았겠지.

물론 시간적 여유가 있었다면 헤매는 것도 여정의 일부겠지만 안타깝게도 그 시점에선 헤매는 여유가 사치인 순간이었다.

대견봉에서 대견사까지는 약 500m.

완만한 능선길이자 데크와 야자매트로 된 길이라 뜀박질하다시피 해서 대견사로 향했다.

진달래 군락지 위 능선에서 바라보이는 세상은 떠나는 마음에 안타까운 불을 지필 뿐이었다.

대견사에 도착하자 어디선가 까마귀 한 녀석이 먹이를 문 채 대견사지 삼층석탑 위에 사뿐히 내려앉는 순간이었다.

까마귀, 까치와 더불어 검은 고양이까지, 완전히 검은 녀석들은 내 눈엔 영물이었기 때문에 여행이나 산책 중에 만나는 녀석들은 허투루하게 지나치지 않았다.

게다가 해발 1,000m 절벽 위 전망 좋은 대견사에서 만난 까마귀라면 오죽하겠나.

대견사는 용연사, 유가사와 더불어 비슬산 3대 사찰이자 달성 12경 중 하나.
대구광역시 달성군 유가읍 휴양림길 232에 위치한 사찰이며, 대한불교 조계종 제9교구 본사 동화사의 말사다.
비슬산 정상에 있는 절로 한 때는 폐사된 상태에서 삼층석탑만 있었기에 '대견사지'라 불렀다.
창건자는 미상이나, 신라 흥덕왕 때 창건된 사찰이라고 전한다. 전설로는 당문종(文宗)이 절을 지을 곳을 찾고 있었는데 하루는 낯을 씻으려고 떠놓은 대야의 물에 아주 아름다운 경관이 나타났다. 이곳이 절을 지을 곳이라 생각한 문종은 사신을 파견하여 찾게 하였다. 결국 중국에서는 찾을 수 없게 되자 신라로 사람을 보내어 찾아낸 곳이 이 절터이다. 이 터가 대국(大國)에서 보였던 절터라 하여 절을 창건한 뒤 대견사라 했다고 한다.
창건 이후의 역사는 거의 전래되지 않고 있지만 삼국유사의 저자 일연이 승과 선불장에 장원급제한 뒤 초대 주지로 부임해 22년 동안 지냈으며 이 곳에서 삼국유사를 구상했다고 한다. 1416년(태종 16년) 2월 29일, 1423년(세종 5년) 11월 29일 이 절에 있던 장륙관음석상(丈六觀音石像)이 땀을 흘려 조정에까지 보고되었고 종파는 교종(敎宗)에 속하였다고 한다.
절의 폐사에는 빈대가 너무 많아서 이를 견디지 못하고 모두 떠나 자연스럽게 폐사되었다는 일반적인 설화가 전래되고 있지만 그 시기는 임진왜란 전후로 전해지고 있기에 임진왜란 때 일어난 화재로 폐사된 것으로 보인다. 그 뒤 광해군과 인조 때 재건되었으며 1900년 영친왕의 즉위를 축하하고 대한제국 축원을 위해 이재인(李在仁)이 중창했으며 관리를 안 하는 사이 1908년 허물어지기 시작하여 1909년 다시 폐허화되었다.
결정적으로 일제강점기인 1917년 강제 폐사됐는데 당시 대견사의 대웅전이 일본 쪽으로 향해 대마도를 끌어당기고 일본의 기를 꺾는다는 이유로 조선총독부가 민족정기를 말살하기 위해 강제로 없앴다고 한다. 
그렇게 100년 가까이 삼층석탑만 남은 채로 방치되는가 싶었지만...
2013년 8월 15일 전체 사찰 부지 3,633㎡에 대웅전을 비롯해 대견보궁, 선당, 산신각, 종무소, 요사채 등의 건물을 폐사 당시의 원형대로 최대한 복원하기 위해 공사를 시작했다. 특히 대웅전의 대들보는 지름 60㎝에 길이 10m인 강원도산 소나무 황장목으로 만들어졌는데 수령이 500년 됐고, 한 개 가격이 2,000만원에 이른다고 한다. 2014년 3월 1일 공사를 끝내고 복원 완료했다. 대견보궁에는 스리랑카에서 가져온 진신사리 1과가 모셔져 있다.
[출처] 대견사_나무위키

절벽 위에 올려져 바위 틈바구니에 있는 대견사는 기암괴석에 기댄 사찰이나 마찬가지로 생각보다 규모는 꽤 컸지만 저녁을 앞둔 시점이라 그런지 대견사 내부엔 인적이 전혀 없어 발자국 소리조차 크게 증폭되어 울렸다.

각종 기암괴석을 사진으로 반듯하게 담고 싶었지만 막차 출발 15분 남은 시점이라 마음이 급한 나머지 아이폰으로 흐르듯 사진을 담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 기암들은 하나같이 제각각의 모습과 형상을 하고 있어 그 사진만으로도 족히 1시간은 감안해야 되겠다.

속세를 바라보며 열반의 경지에 이른 부처바위를 마지막으로 대견사를 떠나 정류장까지 잰걸음으로 다가갔다. 

정류장으로 가는 길에 발치 아래 새 한 마리가 작별의 노래를 구슬프게 연주했다.

앞서 천왕봉에서 만난 새와 같은 종류였다.

정류장에 도착하여 기사님께 출발 확인을 했던 시간은 출발 전 약 5분을 남겨둬 겨우 한숨 돌릴 수 있었는데 그때 서넠엔 거대한 빛내림이 연출되었다.

거대한 비슬산만큼이나 실로 거대한 빛내림이 아닐 수 없었다.

버스 정류장에 잠시 대기하고 있는 사이 특정 기간 동안 셔틀버스 운행시간표가 있었다.

축제 동안의 임시 증편을 하여서 그런지 버스 운행 횟수가 장난 아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정시에 셔틀버스가 출발했고, 무사히 비슬산 휴양림공영주차장에 도착했다.

아침과 점심은 빵과 워터젤리 몇 개로 해결한 터라 현풍을 지날 때는 급격히 허기가 졌고, 언젠가 티비에서 봤던 현풍 수구레가 언뜻 머리를 스쳐 재래시장으로 곧장 달려갔다.

평일이라 그런건지, 아님 일찍 문을 닫아서 그런건지 대부분 수구레국밥집은 문이 닫혀 있었고, 시장 가장자리에 한 집이 영업 중이라 거기서 밥을 마시듯 한 끼를 해결한 뒤 대구로 향했다.

식사가 끝나고 차량을 주차한 현풍천변으로 돌아오자 세상을 태울 듯한 이글거리는 석양이 만든 장관이 펼쳐졌고, 잠시 서서 은은하면서 뜨거운 장관을 끝으로 선 굵은 비슬산 여정을 마무리했다.

약속장소인 대구 동촌유원지에 도착했을 때는 7시를 훌쩍 넘었고, 숙소에 체크인한 뒤 걸어서 유원지 번화가에 도착하자 시각은 8시를 살짝 넘었다.

대구 하면 막창 아니겠나.

친구들을 기다리는 사이 금호강 야경을 하루 여정의 안도의 마무리라 여기며 그렇게 대구에서의 하루는 깊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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