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 자연 그리고 만남

일상_20191005

사려울 2019. 10. 7. 03:39

간편한 차림은 약간의 한기를 느낄 수 있는 가을스런 날씨가 열어놓은 창을 넘어 온 집안 구석구석 퍼진다.

마음에 단단히 벼르고 벼른 다짐 중 이 귀한 계절을 잠시도 허투루하게 보내지 말자고 했던 만큼 몸에 덕지덕지 붙은 귀차니즘을 털어 내고 약간의 한기를 그대로 느끼며 집을 나섰다.



가장 접근하기 쉬운대로 반석산 둘레길에 올라 길을 따라 자라고 있는 계절의 흔적들을 면밀히 살피며 천천히 걸어갔다.

평소 같으면 이렇게 세심한 관찰 없이 후딱 한 바퀴 돌았을 터인데 오늘 만큼은 시간에 쫓기지 않고 내 마음 끌리는대로 보폭도 조절하고 쉬고 싶을 때 자리를 가리지 않고 쉬기로 했던 만큼 시선이 멈추는 걸 마다 않는다.

길 가장자리에 넝쿨들이 여기저기 촉수를 뻗고 있는 모습을 보자 단단한 지형지물에만 자라는게 아니구나 싶다.

무른 흙과 부엽토 투성인데 손으로 살짝 당겨보자 의외로 단단하게 바닥에 고정 되어 있다.



반석산에서 발원하는 작은 여울에 신선한 물소리가 경쾌하다.

얼마전 비가 내린 여파로 수량이 좀 더 많기야 하겠지만 그래도 여전히 마르지 않는 자연의 역동이 가던 걸음걸음 힘을 더해 준다.



낙엽 무늬 전망 데크에 오르자 오전에 잠시 뿌옇던 대기가 조금 청명해 진 걸 알게 된다.

같은 자리에서 무심코 쳐다 보면 하루 종일 어떤 세상일지 생각하는 것조차 귀찮을 때가 있는데 마음에 온기를 넣어 조금 노력을 하게 되면 더 넓은 창이 열리고 더 많은 진실에 눈을 뜰 수 있다.



반석산 중턱을 거의 한 바퀴 돌 무렵 대부분 꽃잎이 지고 가을이 한창일 자리에 시선을 단번에 사로잡는 꽃이 있다.

크기가 아주 작지만 그 작은 것들이 모여 하나의 큰 꽃처럼 보여 잡아 당긴 시선을 달콤한 파동으로 물들여 준다.

근데 초점이 겉도는 구만.




둘레길을 한 바퀴 도는 마지막 경유지가 복합문화센터로 늘 다니던 계단을 버리고 조금 더 걷더라도 숲길로 난 오솔길을 택했다.

첫 걸음과 동시에 가장 눈에 띄는 건 바닥에 자욱히 떨어져 있는 밤송이다.

밤나무가 많은데다 한창 밤이 영근 시기가 지나 자연스레 떨어진 밤송이를 동네 주민들이 속속들이 알차게도 솎아 냈다.

어느 여성분이 바닥을 둘러 보며 밤을 줍줍하는데 거의 허탕치고 있다는 씁쓸한 표정이다.



이번 주말엔 야외음악당에 별 다른 공연이 없는지 좌석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많지만 스테이지는 텅 비어 있고, 아이들이 뛰어 노는 소리만 익살스럽게 들린다.

복합문화센터 통틀어 앉아서 쉴 수 있는 벤치와 공간이 많아서 이제는 적절한 장소에 사람들 구경하기는 익숙해져 있고, 더불어 초창기에 데이트를 즐기는 연인들이 많았다면 이제는 함께 시간을 보내는 가족들이 많아졌다.

잔디밭은 잘 관리가 되어 아주 매끈하게 펼쳐져 있고, 사람들이 출입을 하지 않아 까치들이 신났다.




복합문화센터 정원에 의외로 많은 다양한 꽃들이 활짝 꽃망울을 터트렸는데 그 중 가장 많은 꽃은 단연 들국화로 누구나 한 번은 지나는 길에 가벼운 시선 정도는 던져 화사한 그물에 낚인다.




가까이 다가서서 들국화를 훑어보자 벌만 있는게 아니라 모기도 팔굽혀 펴기를 하듯 꽃술에 주둥이를 박고 열심히 꿀을 먹고 있다.

가만히 있지 않고 쉴 새 없이 팔굽혀 펴기를 하는가 싶더니 금새 다른 꽃에 주둥이를 쳐박고 똑같은 행동으로 꿀을 빨아 줍줍한다.



이제 꽃들도 깊은 겨울잠에 드는 준비를 하는지 꽃잎이 많이 떨어졌다.



이름은 모르지만 보랏빛 작은 꽃들이 모여 큰 꽃을 만들고 그래서 눈에 완연히 띄이도록 손을 흔들고 있다.

자세히 보면 이 작은 꽃 하나하나도 무척 정교한 아름다움을 발산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반석산에서 단연 아름다운 꽃은 이거다 라고 확신할 수 있는 게 바로 요 녀석인데 땅바닥에 넙쭉 붙어 지나치기 십상으로 처음 마음 먹은대로 시간에 구애 받지 않고 천천히 내가 원하는 대로 시선을 던지자 비로소 평소 보이지 않는 아름다움도 감상할 수 있다.

크다고, 화려하다고 해서 가장 아름다운 건 아니란 반증처럼 흉내내기 힘든 진한 핑크를 담고 가을을 즐기기에 한창인 녀석들인 만큼 어느 누구의 시선을 전혀 시샘하지 않는다.



가을이 되자 단순한 이파리에서 꽃잎으로 변신했다.



반석산을 통틀어 가장 많은 나무 중 하나가 밤나무다.

아직도 가지에서 영근채 떨어질 기미가 없는 녀석들은 다람쥐와 청솔모의 겨울 나기에 식량이 되어 주겠지?

여전히 신록은 남아 있지만 조만간 찾아올 가을의 진면목을 기대함과 동시에 상상이 만들어 준 행복 또한 황금 같은 계절을 여러 해 겪는 동안 배운 본능적 희열이다.

그저 시간을 스쳐 지나는 필연으로 간주하기엔 자연이 주는 희망들은 무척이나 많고 이채롭다.

밤나무 열매를 의식하지 않고 지나친다면 그저 주위에서 자라는 나무일 뿐이지만 조금 관심을 둔 시선으로 바라본다면 풍족한 열매에 든든한 것처럼 시간도, 계절도 주렁주렁 열린 풍족한 열매를 수확할 수 있다.

다만 차이라면 밤나무에 밤은 내가 아닌 밤이 꽃 필요한 생명의 목숨과 같지만 시간과 계절의 열매는 수확 할수록 더욱 빼곡한 열매를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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