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최초의 고갯길이자 남북을 잇는 요충지인 계립령로 초입에 자리한 절터에 도착하여 폭염을 뚫고 하늘재로 향하기 전, 역사의 흔적에 잠시 숙연한 상상에 빠졌다.
한 때는 성행했고, 또 한 때는 외면받았던 하늘재 길목은 창칼을 겨누거나 큰 희망의 고갯길이 되기도 했지만 이제는 무거운 공기만 가득했다.
그래서 그 무거운 정적의 내음과 자취가 이끄는 대로 길을 밟으며 둔중한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하늘재는 충북 충주와 경북 문경을 잇는 고갯길로 공교롭게도 충주 방면은 미륵리, 문경 방면은 관음리란 지명을 갖고 있었다.
미륵과 관음이라...
이승과 저승의 고갯길이 하늘재, 계립령이란 말일까?
미륵대원지는 충청북도 충주시 수안보면에 있는 고려전기 석굴을 주불전으로 하는 사찰터로 1987년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하늘재[寒喧嶺]·계립재[鷄立嶺]·새재[鳥嶺]에 둘러싸인 험준한 산골짜기 북쪽 기슭에 북향하여 조성된 석굴을 주불전으로 하는 절터이다. 창건 연대나 내력, 사원의 정확한 명칭을 알 수 없으나, 고려 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짐작된다. 석굴은 거대한 돌을 쌓은 위로 목조로 세운 자취가 있으나 지금은 남아있지 않다. 발굴 당시 ‘미륵당초’라고 새겨진 기와가 나와, 통일신라 후기에서 고려 전기의 사원으로 추정된다. 현재, 충주 미륵리 석조여래입상(보물, 1963년 지정), 충주 미륵리 오층석탑(보물, 1963년 지정), 석등, 당간지주 등 중요한 석조 문화재들이 남아있다. 전설에 의하면 신라 경순왕의 아들 마의태자가 나라가 망한 것을 슬퍼하며 금강산으로 가는 도중, 누이인 덕주공주가 월악산에 덕주사를 지어 남쪽을 바라보는 마애불을 만들자 태자는 북향의 석굴을 지어 덕주사를 바라보게 하였다고 한다.
[출처] 충주 미륵대원지_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연일 때 이른 폭염이 물러날 기미는커녕 그 위력은 날로 더했다.
그래서 먼 길보다 집에서 부담 없는 거리에-철저히 주관적이긴 하지만- 언젠가 찾겠다고 마음먹은 곳을 물색했는데 동탄을 기준으로 마지노선은 남쪽 아산-천안 방면, 남동쪽 진천-음성-괴산-충주 방면, 동쪽 여주-원주, 북동쪽 양평, 북쪽 가평까지 내 멋대로 영역을 지정한 뒤 지도를 살펴보자 단숨에 '하늘재'에 북마크한 표시가 되어 있었고, 곧장 카메라와 슬링백을 챙겨 충주로 떠났다.
하늘재를 가기 위해 괴산 연풍을 지나 도착한 미륵대원지 주차장에 차를 주차한 뒤 절터로 향하는 길에 특이한 바위가 보였다.
흡사 조령산을 축소한 듯한 바위 위에 동그란 작은 바위? 돌?이 올려져 있었고, 행여 굴러 떨어질까 싶어 작은 고임석을 대어 놓았다.
평범한 것들이 모여 특이한 존재가 된 표상 같았다.
주차장에서 절터로 가는 길목에 독특한 이 바위를 지나 조금 걷다 보면 얼마 가지 않아 미륵대원지가 나왔는데 생각보다 꽤 넓고, 입체적이었다.
이런 산골짜기의 낮게 패인 지형에 절터라고 하기엔 비교적 완성된 사찰이 있을 줄이야.
에이는 뙤약볕, 천 년을 버텨온 저력에 한낱 여름 햇살은 일상의 일부인 양 묵묵했다.
중원 미륵리 석등은 높이 2.3m. 1976년 충청북도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이 석탑이 있는 미륵대원(彌勒大院)은 보통 사원과는 달리 전실과 주실이 북향(北向)하는 특이한 배치이며, 주실에는 독립된 미륵불입상이 중앙에서 북향하여 멀리 월악산(月岳山)을 바라보는데 석등과 오층석탑이 일직선상에 놓여 있는 단탑식 가람배치를 이루고 있다.
주실 앞에 전실이 있고, 전실 동쪽을 이어 큰 회랑(廻廊)지가 있으며 회랑지에서 낮게 건물지 유구가 남아 있다. 각각 1963년 보물로 지정된 충주미륵리석불입상과 충주미륵리오층석탑의 중간에 있는 이 석등은 우리나라 석등의 기본형태인 8각으로 지대석만 4각구조이다.
전체적으로 균형이 잡힌 우수한 작품이다. 석등의 형식은 방형의 지대석과 연화대석(蓮花臺石)은 1석으로 조성되었는데, 연판(蓮瓣)은 단엽(單葉) 8판복련(八瓣覆蓮)이며 간주석은 아무런 장식이 없는 8각석주(八角石柱)이다.
상대석은 하면에 각형(角形) 1단을 마련하고 단련(單蓮) 8판앙련(八瓣仰蓮)을 조각하고 판내(瓣內)는 화문을 장식하였다. 화사석(火舍石 : 석등의 점등하는 부분)은 4면에만 화창(火窓)을 뚫었으며, 8각개석은 낙수면의 합각이 뚜렷하고, 평박(平薄)하며 전각(轉角)이 반전(反轉)되고 정상에는 8각의 상륜(相輪) 받침 위에 연봉형으로 보주(寶珠)를 삼았다.
[출처] 중원 미륵리 석등_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고려시대 유물이 여전히 건재하다는 게 괜한 경이감과 더불어 그 많던 역사의 풍파를 당당히 견뎌 아직도 작은 등불이 출렁이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고려 초기 이 부근에서 많이 만들어진 일련의 커다란 불상들과 양식적 특징을 같이하는 석조여래입상이다.
전설에 따르면 신라말 마의태자가 나라의 멸망을 비통하게 여기며 이곳까지 와서 불상을 만들고 개골산으로 들어갔으며, 그 여동생은 제천 덕주사 마애여래입상(보물)을 만들었다고 한다.
모두 5개의 돌을 이용하여 불상을 만들고 1개의 얇은 돌로써 갓을 삼았다. 둥근 얼굴에 활모양의 눈썹, 긴 살구씨 모양의 눈, 넓적한 코, 두터운 입술 등은 고려 초기 커다란 불상의 지방화된 양식을 잘 반영하고 있다. 신체는 단순한 옷주름의 표현이라든가 구슬같은 것을 잡고 있는 손의 묘사 등에서 얼굴과는 대조적으로 간략함을 느낄 수 있다.
이 불상의 대담하고 거대한 모습으로 보아 새로 일어난 국력을 배경으로 만들어진 것임에 틀림없을 것 같다.
[출처] 충주 미륵리 석조여래입상_국가유산청
유난히 이목구비가 뚜렷한 석조여래입상 또한 그 표정에서 생명이 부여된 착각이 들었다.
아마도 과거의 규모에 비한다면 일부만 남은 흔적일 거다.
얼마나 많은 발자취가 이 땅 아래 숨겨져 있을까?
거대한 거북 모양의 바위는 금방이라도 살아 꿈틀거릴 것만 같았다.
그나마 이런 흔적이라도 남아 있었다는 게 신기했다.
미륵리 원터는 조선 이전 문경 관음리 절터와 함께 원의 기능을 담당했으나, 조선 들어 조령의 개통으로 점차 기능이 상실했을 거란다.
한 때의 부흥이 깊은 추억으로 서린 곳이라 공허함이 가득했다.
미륵대원지는 주변의 험하고 높은 산들에 둘러싸여 마치 사막의 오아시스와 같은 형세였고, 또한 기능도 했을 게다.
문경에서 넘어온 길은 여기서부터 당시 대도시였던 충주와 한양으로 연결하는 동맥이었다.
하늘재로 향하는 길은 특출 나지 않게 정갈했다.
삼삼오오 발길이 끊이지 않는 하늘재로의 첫걸음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미륵리 원터는 꽤나 넓었는데 세상 모든 만물을 태울 듯 따가운 햇살이 그대로 내려 꽂혀 한 때의 성행은 집착적인 공허만 남았다.
충주 미륵리 원터는 미륵대원지 창건과 더불어 지리적 중요성이 큰 이곳에 원을 별도로 세우고 운영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 원터는 고려초기 충주와 문경을 잇는 계립령로에 위치하며, 충주를 넘어가면 문경 관음리에 절터가 있는데 이 또한 원의 기능을 갖추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조령이 개통되면서 미륵리의 원은 점차 그 기능을 상실해 갔던 것으로 추정된다.
건물지에 대한 조사결과 두 차례 중수가 이루어진 것으로 나타났으며 건물의 형태는 '回(회)'자 구조로 가운데에 말을 묶어 두는 마방을 두고 주변에 여행자와 관리인이 기거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우리나라 최초의 고개길이며 남북을 잇는 요충지인 계립령로에 자리했던 이 원터는 미륵대원지와 더불어 사원과 역원의 기능을 두루 갖춘 중요한 유적지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고갯길인 계립령은 사료에 156년 여름 개통 되었단다.
그래서 무심코 들어섰다 예사롭지 않은 기운을 느낄 수 있었는데 그 많던 야망과 애환들이 오고 가는 동안 길은 많은 염원과 절망이 모여 이승과 저승의 길목처럼 다가왔다.
하늘재에 들어서는 길.
지금은 역사가 서린 산책로로 재탄생했다.
오랜 발자취로 흙이 굳어 돌보다 더욱 강인한 길이 되어 버렸던 걸까?
탄탄한 길을 걷는 동안 바닥의 돌부리조차 발길에 문드러져 어느 하나 걸리적거리지 않을 것 같은 믿음에 시선은 가벼이 위로 치솟았다.
미륵리 주차장에서 하늘재까지는 2.5km라 오래된 길 내음을 감상하기엔 생각보다 짧았다.
갈림길의 끝은 물론 만나서 하늘재로 향하지만 이왕 두 갈래 길 모두 걷고 싶어 오를 때는 한길로, 내려올 때는 다리 건너 숲길인 자연관찰로를 선택했다.
본격적으로 길이 숲에 들어서기 전, 양옆엔 이따금 민가가 있어 오로지 하나의 길만 추종하면 그만이었다.
월악산 국립공원 내 하늘재로 향하는 길의 좌측인 포암산 기슭은 멋진 기암의 연속이었다.
하늘재는 누구든 걷기 수월하다.
또한 길 양 옆에 나무숲의 야생적이면서도 질서 정연한 묘한 이중적 매력이 있었고, 그 나무숲은 산허리와 여울까지 아우를 정도였다.
다람쥐 한 녀석이 뛰쳐나왔다 눈이 마주치자 놀라며 급히 사라졌다.
두 갈래로 나뉘었던 길이 여기서 다시 만나 한 마음으로 하늘재 마루로 나아갔다.
의도한 대로 내려가는 길엔 숲 속의 오솔길과 같은 자연관찰로를 이용할 예정.
아무런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면 흔한 숲길과 다름없었지만, 하늘재에 첫 발을 들이는 순간부터 그 깊고 뚜렷한 상징성은 분리되지 않고 시종일관 따라붙으며 오랜 시간에 걸쳐 이 길을 걷는 사람들이 오버랩되었다.
백자 가마터는 백자를 생산하던 가마터로 길이 20m, 폭 5m 정도이고, 남아있는 상태로 보아 소성실은 7개로 보인다.
인근에 미륵리 요지가 있고 문경지역에도 조선 후기 가마터가 존재하는 것으로 보아 조선 후기부터 일제 강점기까지 백자를 생산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 가마터에서 생산된 백자는 민수용으로 막사발이나 접시가 주를 이루며 문양이 없는 순백자이다.
이따금 무리 지어 길을 걷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가볍게 대화를 나누며 걷는 모습을 뒤로하고 잰걸음으로 하늘재를 걸었다.
연아 닮은 소나무?
호기심이 급 발동했다.
피겨의 전설인 김연아?
정말 김연아 선수의 연기를 닮았다고 하여 보호수로 지정된 나무였는데 정말 빙판 위에서 전위적인 연기를 하는, 영락없는 김연아 선수였다.
정말 절묘했다.
한쪽 다리를 뒤로 젖혀 회전할 때의 아름다운 자태 그대로였다.
멀리 하늘재 마루가 보였다.
충주를 넘어 문경으로, 현재를 초월하여 역사로 이어지는 길은 각별하기보다 무덤덤했다.
그게 장수의 비결 아닐까?
고갯마루에 오르자 양 옆으로 까마득한 산을 오르는 등산로가 열려 있었다.
여긴 남쪽 탄항산과 마패봉, 문경새재로 향하는 길이었다.
반대로 북쪽 등산로는 멋진 바위 커튼 같은 포암산과 만수봉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군사들이 다녔고, 야망을 품은 자들이 다녔던 오랜 역사의 하늘재는 그 연륜이 숲의 그늘처럼 진중하여 이제는 문명에 찌든 사람들의 넋두리가 되어줬다.
길 양 옆은 가파른 산허리가 버티고, 이끼 자욱한 나무와 여울이 버티며 오로지 하나의 명확한 길을 만들어 걸음에 대한 의심을 거둘 수 있었다.
녹색의 푸르름과 견조한 산은 어떠한 풍파에도 움직이거나 변이 될 여지가 없건만 때론 격변과 격동에 지친 가슴을 달랠 때 최선의 치유는 이런 신뢰와 믿음 아닐까?
걸음 내디딜 때마다 사유의 앙금은 떨어져 나갔고, 시선을 움직일 때마다 경직된 오감은 이완되는 곳, 하늘재는 언제나 가슴 열어 포용의 품을 허락했다.
충주 계립령로 하늘재는 북쪽으로 포암산(962m), 남쪽으로 부봉(925m)과 월항삼봉(847m) 등으로 이어지는 산맥 사이에 말안장처럼 움푹 들어간 곳에 위치한 고개이다. 하늘재 고갯길은 오랫동안 사용되지 않은 옛길로, 계립령 중 미륵대원지(彌勒大院址)에서 문경으로 넘어가는 길이다. 지금도 충청북도 충주시 구간은 비포장도로로 남아있어 옛길의 정취가 잘 보존되어 있어 2008년에 명승으로 지정되었다.
하늘재는 고개가 하늘에 맞닿을 듯 높아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한자로는 천치(天峙)라 표기하기도 하고, 우리말로는 하니재 · 하닛재 등으로 발음을 달리하여 부르기도 하였다. 또한 높은 고개라는 뜻에서 한치라고 했다고도 한다.
신라시대에는 계립령 · 마목현이라 불렸으며, 고려시대에 계립령 북쪽에 대원사가 창건되면서 절의 이름에서 따와 대원령이라고 하였다. 조선시대에 들어오면서 고개 부근에 한훤령 산성이 있으므로 한훤령이라고도 불렀으며, 시간이 지나면서 한원령으로 변화된 것으로 추측된다.
충주 계립령로 하늘재는 충청도 충주와 경상도 문경 사이의 가장 낮은 고갯길로서 156년(신라 아달라이사금 3)에 개척되었다. 고구려와 백제의 영토 분쟁 역사가 전해오는 오랜 역사의 옛길로서, 백두대간을 넘는 최초의 통행로가 된 길이다. 하늘재에는 많은 전설과 유래가 깃들어 있고, 『삼국사기(三國史記)』 · 『삼국유사(三國遺事)』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등 다수의 고문헌과 자료에 기록되어 있다.
고려 말기에 왜구가 창궐하면서 조운(漕運)이 육운(陸運)으로 바뀔 무렵부터 지금의 조령(鳥嶺)인 초점(草岾)이 크게 개척되면서 가치가 상실되었다. 임진왜란 이후에는 조령이 중요한 구실을 하면서 새재에 관방시설을 설치하고 인근의 다른 통행로를 폐쇄할 때, 하늘재 옛길도 폐쇄되었다.
[출처] 충주 계립령로 하늘재_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고갯마루 또한 단아했다.
기억을 초월하여 낯익은 이유가 뭘까?
계립령 유허비와 역사적 동행에 선 나무.
산신각은 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문경 관음리로 넘어오자 차박 중인 몇 대의 차량이 포진한 너른 공원 주차장도 있었다.
포암산 남쪽 사면 절벽은 흰 베를 널어놓은 모습과 비슷하여 베바위라 불렀다.
그래서 그 장대한 모습에서 시선을 거둘 수 없었다.
사진으로 담을 수 없었던 포암산 베바위의 장쾌한 모습은 보는 내내 인상적이었다.
하늘재 문경주차장에서 탁 트인 문경을 바라봤다.
여기서 잠시 땀을 훔치고 생수로 갈증을 삭혔다.
고갯마루에 이런 주차장이 있을 줄이야.
그렇더라도 편한 여행 대신 조금 힘들고 불편하더라도 하늘재를 정독하고 싶었다.
포암사로 이어지는 하늘재옛길로 들어서기 전, 작은 쉼터가 있어 다가가자 누군가 막걸리 마신 흔적을 남겨 놓았다.
오래된 고갯길에 막걸리는 어울리긴 하나 쓰레기 투기는 익명이란 미명하에 버린 사람의 쓰레기 인성을 인증하는 꼴이었다.
여기서 포암사로 이어지는 하늘재옛길로 접어들었다.
이 길은 지금까지의 길과 달리 적막하고 조금은 음산한 숲길이었는데 굳이 빗대어 비교하자면 조령산 고갯길과 그 옆 오솔길과 같은 문경새재 옛길과 흡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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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성한 나무숲 사이 인적 없는 하늘재옛길은 비교적 잘 정비가 되어 있어 걷기 수월했음에도 개망초와 우거진 나무숲에 초입이 잘 보이지 않아서인지 무척이나 적막했고, 들리는 소리는 가끔 지저귀는 새소리를 제외한다면 거의 무음 지대나 마찬가지였다.
이런 길은 갠적으로 무척 좋아하는데 이런 길을 만난 게 얼마만이었나.
대장군들이 묘하게 음산한 숲을 걷는 나그네들을 잘 지켜주겠지?
폭염 사이에 미세한 숲의 향기가 기분을 흐뭇하게 단장시켜 줬다.
이 부근에서 뱀을 만났다.
지나간 길에 스치는 소리가 들려 뒤돌아 길을 바라보자 화들짝 놀란 녀석이 허겁지겁 데크길 틈으로 몸을 던지다시피 숨었다.
길만 걷는 데도 숲에서는 간헐적으로 뱀이 보였는데 길을 벗어나면 정말 위험하겠다.
평탄한 매트길과 데크길을 번갈아 걷다 보면 사찰이 무척 가깝게 느껴지는 순간 긴 내리막 계단이 나왔고, 여기서 길 따라 조금 더 진행하게 되면 관음사와 포암사가 나왔다.
관음사 뒤편 산길을 지날 무렵.
포암사로 가는 길은 하늘재 주차장과 연결된 도로와 숲으로 이어진 하늘재옛길로 갈 때는 숲길을 이용했고, 돌아오는 길은 아스팔트 도로를 이용했다.
미리 계획한 건 아니지만 하늘재옛길을 걷다 문득 오늘의 최종 반환점인 포암사는 불현듯 다가와 독특한 사찰의 모습을 살포시 보여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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