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당한 물비린내와 풀내음이 뒤섞인 비내섬은 남한강이 만든 섬으로 장자섬과 함께 가끔 들러 봄에는 공허함 가운데 신록의 파릇한 민낯을, 가을엔 생명의 성숙을 가르며 잔잔한 산문집을 읽는 기분으로 거닐던 곳이었는데, 문화 컨텐츠의 화력으로 인해 갑자기 신데렐라가 된 명소다.
산문집이 그렇듯 그리 드라마틱하지 않았고, 그렇다고 쉽게 읽히지도 않는 것처럼 빼어난 풍광이나 특출 난 경관을 바란다면 이 또한 처음 몇 페이지만 읽다 덮고 서가에 먼지가 쌓이는 산문집과 같았다.
걸음을 멈추고 익숙해진 화이트 노이즈를 잊어버린다면 무성한 풀섶 어딘가에서 들리는 여러 종의 새소리 화음이 뒤늦게 들렸고, 여러 종의 생명이 바람에 응수하는 제각각의 노래를 깨칠 수 있었다.
이왕 비내섬에 왔다면 이미 떠나버린 사랑의 불시착보단 늘 같은 자리에서 든든한 실체로 치유를 귀띔하는 곳들을 두루두루 만나 보면 어떨까?
옛 상인들이 들러 갈증을 해소하며, 각자의 살아가는 지혜를 나누던 샘개우물에서 물 한 모금을 하고, 냉탕임에도 한참을 몸 담궈도 춥지 않은 능암온천에서 지친 육신을 달래고, 조금 높은 자리에 솟은 장미산성에서 억겁을 이어온 남한강의 힘찬 줄기에 눈을 씻고, 한 때 한반도와 만주를 호령하던 고구려의 자취인 고구려비에서 지친 기개를 달래면 어떨까?
충주에 건너왔다 조용히 돌아간 반나절 시간은 이렇게 여름의 풀내음을 담았다.
비내섬은 충청북도 충주시 앙성면 소재의 남한강 하중도.
갈대와 나무를 베어내는 섬이라는 뜻의 억새밭이 일렁이는 섬으로 철새들의 낙원으로도 유명하다.
강변과 숲, 논을 따라 걷기 좋은 비내길이 조성되어 있고, 비내섬의 아름다운 경관을 망원경으로 자세히 둘러볼 수 있는 전망대도 자리해 있다. 해 질 무렵 노을과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가 어우러진 풍경이 아름다워 출사지로 유명하며, 드라마 '사랑의 불시착' 촬영지로도 알려져 여행객들이 많이 찾는다. 최근 자연휴식지로 지정되면서 차량 출입과 야영이 제한되어 도보로만 들어갈 수 있으니 참고하도록 하자.
[출처] 비내섬_인터파크 트리플
집에서 딱 1시간 거리에 모처럼 남한강변을 찾았는데 장자섬, 여우섬과 함께 남한강이 만든 기름진 섬이 어느덧 명소가 되었다.
그런 걸 보면 문화 컨텐츠의 위력을 새삼 실감하는 게 이름 없는 섬이 하루아침에 연인들의 필수 코스가 되어 버릴 정도였다.
2주 가까이 폭염의 기세는 꺾일 줄 몰랐고, 이따금 옅은 구름이 끼이긴 했지만 강렬한 햇살 또한 지치줄 몰라 주차장 초입의 작은 그늘도 그저 반가울 뿐이었다.
가까이 봤을 때는 그저 들판의 흔한 나무라 여겼는데 이렇게 거리를 두고 보면 전체적인 모습에서 아우라가 느껴졌다.
도로 건너편 조천마을 초입에 우뚝 선 나무는 자태만으로도 달려온 보람이 충분할 정도였고, 그래서 잠시 둘러보며 감상에 젖었다.
그 오랜 시간을 이렇게 당당히 버틴 것만으로도 우리가 배워야 할 인내와 사려를 짐작케 했다.
이제 비내섬으로 발을 들이기 전의 작은 설렘과 두근거림을 애써 억눌렀다.
예전에 비해 어떻게, 얼마나 달라졌을까?
소리의 섬, 비내길 코스 지도가 있어 참조하면 되겠지만 무조건 한 바퀴 도는 코스를 선택했고, 총 4km 정도면 생각보다 너른 편이었다.
대문을 지키던 나무 행님들께 인사드린 뒤 바로 인척의 비내섬으로 건너는 다리에 들어서면 남한강의 잔잔한 샛강이 보였다.
얇은 구름을 뚫고 뙤약볕이 소나기처럼 내려 이내 등짝에서 땀이 흘러내렸다.
비내섬에 진입하면 가장 먼저 보이는 안내판으로 여기서부터 우회전하여 시계 반대 방향으로 걸었다.
원래 비내섬은 미군 훈련장으로 쓰였고, 틈틈이 차량이 출입하며 캠핑족들의 이용으로 훈련과 쓰레기 투기 등으로 몸살을 앓다 2020년 9월 24일 습지보호지역으로 지정되면서 지자체의 자정 노력이 빛을 발했단다.
실제 비내섬을 걷는 동안 여러 조류들의 지저귐이 화음처럼 은은하게 들릴 때가 많았다.
장자섬에 비해 작고 경작지가 없어 너른 초원을 걷듯 담담히 걷기에 그만이었다.
둘레길에서 섬 중앙으로 뻗은 곁길로 접어들었는데 마치 너른 초원의 풀밭을 걷는 기분이었고, 다시 뒤돌아 왔던 둘레길로 돌아나갔다.
정면에 원래 방향대로 진행하던 둘레길로 키를 훌쩍 넘는 물억새 사잇길이 숲과는 다른 기분과 경험을 제공했다.
둘레길에 합류하여 멀대 같은 물억새의 갈림길이 나왔는데 최대한 바깥의 먼 궤적을 걷기로 했던 만큼 우측 갈림길로 의식 없이 진행했다.
볕이 강한 날이라 쉬어가는 쉼터가 아닌 사진 결과물이 무척 이쁠 것 같았다.
잠시 앉자 새들이 익숙한 듯 여린 화음을 연주했다.
무성한 물억새밭에서 들리는 여러 종의 새소리가 듣기 좋아 걷던 도중 자주 발길을 멈췄다.
들판에 공명되는 소리라 언뜻 들어보면 소리를 구분할 수 없었지만 자세히 듣다 보면 고유 종마다 특징적인 소리를 일정한 간격으로 지저귀는 덕분에 각각의 소리들이 함께 뒤섞이거나 따로 울렸고, 그 소리들을 구분하는 순간부터 일상의 소리들을 뚫고 들리는 소리들이 청각의 아름다움을 과시했다.
더불어 물억새밭이라고 해서 억새만 있는 게 아닌 여러 종의 식물도 함께 공존했다.
스즈메의 문단속?
아님 이승과 저승을 넘나드는 문짝?
두 인연을 이어주는 마음의 문이라 여기자.
별 게 없는데도 왠지 영화 화보 같았다.
좀 전까지 그네를 타던 커플이 떠나고 다시 적막이 찾아왔다.
낯익은 야생화가 수풀 속에 뒤섞여 빛을 발했다.
이따금 한길에서 곁가지처럼 뻗어나가는 쪽 길엔 누군가 남겨둔 속삭임의 잔해가 메아리처럼 들렸다.
무심히 핀 화사한 꽃, 사상자?
여기 또한 화보 사진을 위해 수풀이 내어준 곳이었다.
야생의 거칠고 날카로운 부분이 아닌 묘하게 유연하고 보드라운 분위기가 맴돌았다.
무성한 물억새밭 사이로 옛 나루터와 잠수교로 넘어가는 보도교가 있어 거기로 향했다.
다리를 거의 건널 즈음 작지만 옹골찬 나무 터널을 지나게 되었다.
빛이 가려진 나무 터널 너머 희망인 양 다시 밝은 세상이 맞이했다.
나무 터널을 지나면 다시 야생의 강변과 찌는 더위가 기다렸다.
나루터와 잠수교를 지나면서까지 햇살이 그대로 내려 꽂히는 길이라 여기서 다시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길 한쪽은 전형적인 야생의 강변이라면 다른 한쪽은 온통 개망초가 흐드러지게 핀 들판이었다.
왔던 길을 되돌아가면 필연적으로 다시 관통하게 되는 나무 터널.
원래 가던 방향 그대로 길에 합류하여 걷자 지금까지와는 사뭇 다른 크고 작은 돌이 널려 있었고, 그 돌을 작게 쌓아 소망을 대신한 흔적들이 널려 있었다.
돌을 보면 거친 강물과 숱한 마찰을 통해 다듬어진 돌이었고, 아무렇게 널려 있는 것 같아도 사실 상류에서 바다를 향한 거친 강물에 생존의 징표이기도 했다.
상류에서 흘러온 강물이 이 지점에서 다른 존재들과 부딪혀 쌓인 흙은 견디지 못해 하류로 휩쓸려 유독 드러난 돌이 많았고, 그래서 수풀도 높게, 빼곡히 자라지 못했다.
지금까지 지나왔던 멋진 물억새밭의 보드라운 토양이 이로 말미암은 상호작용이었다.
자연의 절묘함이란...
작은 돌탑들이 빼곡한 물억새를 대신한 곳인 만큼 켜켜이 쌓아놓은 조악한 돌탑들 중 유독 눈에 띄는 하나, 예술가를 꿈꾸는 사람의 작품인지 절묘하게 돌을 올렸다.
돌무리가 많은 곳을 지나 섬을 반바퀴 돌 무렵 앞서 물억새밭과 또 다른 정취의 수풀 지대가 펼쳐졌다.
수풀 틈에서 간헐적으로 솟은 나무가 무심히 서 있거나 이렇게 절묘한 터널을 만들기도 했다.
생동감이 넘치는 수풀 사이에 듬성듬성 허약한 나무들이 서 있는 모습에서 묘한 조화를 느낄 수 있었다.
어느 하나 정해진 곳도, 같은 곳도 없었다.
멀리 치마산자락이 펄럭이는 치마처럼 넓게 자락을 드리웠고, 그 사이 태울 듯한 뙤약볕이 분노를 드러낸 채 소나기처럼 쏟아졌다.
영화 촬영지에 대한 환상이나 입소문으로 마치 드라마틱한 환상을 품고 온다면 실망스런 대답을 들려주고, 가공과 편파에 피로감을 느낀다면 자유로운 자연의 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곳이 바로 비내섬이었다.
탁 트인 벌판에 넓고 깊은 남한강의 울타리가 뒤섞여 묘한 안정감과 격리감을 느낄 수 있었다.
비내섬에 진입하여 둘레길의 곁길로 잠시 걸었는데 그 길 건너편 지점.
사랑의 불시착 촬영지는 그냥 강변의 너른 돌밭이었고, 남한강 건너편엔 자연이 만든 굴과 전망대가 있었다.
구름도 가리지 못한 강렬한 하루 해가 어느새 많이 기울었다.
비내섬 북쪽 지점은 야생이 그대로 보존된 비밀 정원 같은 곳이었다.
어느 하나 다듬거나 의도하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형성된 밀림 같은 곳으로 누군가 풋풋한 사진을 남기고 싶다면 이 자리에 서는 순간 그게 가능했다.
강, 나무, 초원이 만든 은둔의 쉼터 같은 곳.
여긴 가을에 진가를 발휘할 수 있겠다.
초원과 수풀 사이 허전하면서 짙은 녹음 사이의 절묘한 정취가 흘렀다.
여러 수풀이 한데 어우러진 곳은 비내섬에 들어서 거의 한 바퀴 가까이 걸은 지점으로 어느 하나 정형화된 모습도 찾아볼 수 없었던 만큼 늪 가운데 서 있는 기분이 들었다.
비내섬을 한 바퀴 돌아 건너왔던 다리를 다시 건넜다.
비내섬 주차장에서 가장 눈에 띄었던 나무는 얼마나 오랜 시간을 버텼는지 속은 비어 있었고, 습한 내음이 가득했지만 여전히 녹음을 잃지 않았다.
또한 텅 빈 나무속에서 또 다른 생명의 잉태를 보노라면 어느 하나 독보적이거나 맹목적이지 않은 자연의 화평도 깨쳤다.
멀리서 그리 매끈해 보이던 나무를 가까이에서 보면 상반되게도 온통 문드러지고 갈라졌다.
4km 조금 넘는 섬을 한 바퀴 둘러 다시 출발 원점에 섰다.
이게 일상이다.
잠시 벗어나더라도 떨치고 멀어지고 뿌리칠 수 없는, 그게 바로 일상이었다.
비내섬을 뒤로하고 꾸준히 찾던 능암온천에 다다르자 생각보다 일찍 마감하는 바람에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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