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 자연 그리고 만남

꽃무릇 화염 속 선운산 도솔암_20220917

사려울 2023. 12. 4. 21:34

파도를 타듯 엄청난 인파에 휩쓸려도 좋다.
선한 여름기 남아 성숙의 결실을 위한 파란만장한 자연의 추동과 더불어 그 모든 걸 담은 선운산의 옹골찬 의지와 염원은 인파만큼 충천한 꽃무릇과 비할만하다.
급한 계단을 오른 의지는 바위틈을 흐르는 목탁소리의 유혹이라 하기엔 이끌린 여운이 대기를 비집고 사방으로 은은히 퍼지는 풍경소리에 비할 수 있다.
지고지순한 소망의 결정체, 석탑의 한 귀퉁이가 깨질지언정 바스러질 수 없고, 산사의 기세 등등한 칼바람이 옷깃 여밀지언정 끈끈한 거미줄의 숙명을 도려낼 수 없다.

선운산은 전북특별자치도 고창군 아산면과 심원면에 걸쳐 있는 산으로 그리 높지 않은 336m 고도지만 울창한 수림과 계곡, 사찰과 많은 문화재가 있어 1979년 12월에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원래 도솔산이었으나 백제 때 창건한 선운사가 있어 선운산이라 불리게 되었다. 선운이란 구름 속에서 참선한다는 뜻이고 도솔이란 미륵불이 있는 도솔천궁을 가리킨다.
[출처] 선운산_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선운산(禪雲山)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ncykorea.aks.ac.kr

이튿날 조금 늑장을 부렸지만 게으름을 과감하게 떨쳐내고 숙소를 나서 가장 먼저 전날 저녁에 찾았던 외정공원을 스치듯 지났다.

공원 건너 펜션 초입에 어린 치즈냥을 만나 간식을 주었는데 가까이 있으면 피했고, 사진 찍느라 돌아서면 어느샌가 나타나 간식 그릇을 싹 비웠다.

그래도 녀석이 간식을 먹어서 다행이었다.

그릇을 회수해서 공원으로 다가가 일대를 바라봤는데 이 멋진 탁 트임이란...

기대되는 하루의 시작이었다.

곧장 선운산 도립공원 공영주차장에 도착하자 비포장인 거대한 주차장에 여백이 없을 만큼 차량과 인파가 몰렸고, 그보다 더 대단한 건 일대가 꽃무릇 천국이었다.

공영주차장에서 출발하여 선운사로 가는 길은 그 일대가 거대한 공원이자 광장과도 같았는데 산운산자락으로 둘러싸인 땅에 이런 거대한 공간이 있을까 싶을 정도였다.

인파가 흐르는 방향으로 합류하여 걷다 보면 잔디 광장을 비롯하여 길가 여러 노점과 상점, 식당이 즐비했고, 광장을 지나면 호수라고 하기엔 작고, 연못이라고 하기엔 큰 생태연못과 더불어 생태숲이 있었는데 거기를 지나면 비로소 산의 정취가 느껴졌었다.

꽤 긴 거리의 광장과 공원 구간을 지나는 동안 그늘이 거의 없어 여름을 비웃는 늦더위 폭염이 기승을 부렸고, 그에 반해 하늘은 맑기만 했다.

나무 그늘 아래 작은 틈으로 햇살이 비추는 자리에 꽃무릇이 뽀얀 얼굴을 드러냈다.

선운사 도착.

천왕문 앞다리에서 인파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겨우 사진 한 장 건질 수 있었는데 여울은 어찌나 청명하고 맑은지.

끝이 없을 것만 같은 인파의 줄줄이 행렬은 선운사를 중심으로 엄청나게 이어져 있었다.

공간만 있으면 꽃무릇 천지였다.

고사된 나무 둥치 앞에도 꽃무릇이 환하게 피었는데 평생 본 꽃무릇 군락 중 단연 으뜸이었다.

첫 목표인 도솔암 이정표가 눈에 띄었다.

선운사에서 그 많던 사람들이 여러 갈래 길 따라 뿔뿔이 흩어졌는데 덕분에 도솔암으로 향하는 길은 거짓말처럼 인파가 줄었다.

엄청난 꽃무릇 군락이라 했거늘 역시나 국내 최대 꽃무릇 군락지였단다.

도솔암으로 향하는 길 또한 걷기 수월했다.

길 폭도 넓은 데다 노면이 좋아 단순하게 걷기 수월한 걸 넘어 걷는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바위가 많은 산이라 그런지 길가에 이따금씩 비집고 나온 기암들도 있었고, 길가 꽃무릇 또한 밀도는 조금 낮아졌지만 여전히 여기저기에 붉은빛을 발산했다.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는 길 옆에 거짓말처럼 호젓한 도보길이 있어 이 길을 이용하여 도솔암으로 향했다.

도솔암 바로 아래 장사송이라는 멋진 소나무와 꽃무릇 조합이 있는 곳으로 오를 때엔 사람들이 너무 많아 지나쳤다.

걷다 뒤돌아서자 장사송이 멋진 자태로 훤칠하게 서 있었다.

도솔암 바로 아래 다다르자 아직도 지칠 줄 모르는 꽃무릇 행렬이 여전했다.

도솔암 맞은편에 도드라진 기암.

선운산에 이런 기암괴석이 많았다.

특히 나중에 들릴 병바위가 그랬다.

도솔암에 도착.

역시나 거대 기암을 배후에 두고 원래부터 하나였다는 듯 절이 절묘하게 뒤섞여 어울렸다.

도솔암에서 나한전으로 오르는 짧은 오르막길로 향했다.

세상을 불태울 듯한 따가운 햇살이 쏟아졌지만 무성한 나무숲 덕분에 타지 않고 온전히 선운산의 진면목을 둘러볼 수 있었다.

도솔암의 명물은 바위절벽 위에 세워진 도솔천 내원궁이었고, 이 자리에 서기 위해 선운산 여정을 굳혔다고 여겨도 무방할 정도였다.

경사가 급한 돌계단을 올라 그 계단이 끝나는 바위 절벽 위 작은 터에 이렇게 또 다른 세상이 있었고, 거기 서는 순간 그 유명세의 원천을 실감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원궁 앞에 간이 의자 몇 개가 나그네 피로를 잠시 덜어줬는데 거기에 앉아 고성으로 떠드는 사람들은 좀 꼴불견이긴 했다.

이렇게 누군가는 염원을 빌었고, 또 다른 누군가는 염원을 방해한 곳, 워낙 많은 사람들이 찾다 보니 빚어진 부작용 아니었나 싶었다.

나한전과 도솔천 내원궁을 연결해 주는 아찔한 돌계단은 선운산, 도솔암을 돋보이게 날개를 달아주는 양념과도 같았다.

이 계단을 오를 때 육신의 무게감은 느껴도 번뇌와 잡념은 잊을 수 있는 곳이었다.

도솔암 나한전 앞 석탑은 귀퉁이가 깨졌다.

허나 무엇보다 강인한 염원이 석탑의 받침이 되어 줬다.

도솔천 내원궁으로 오르는 가파른 돌계단에 발을 딛기 전 작은 문을 건너야만 했다.

내원궁에 오르면 '등산로 없음'

대신 선운산으로 오르는 길은 좌측으로 나한전을 지나 마애불 옆에 있었다.

나한전 옆 마애불은 제법 규모가 컸는데 대략적인 위치가 도솔천 내원궁 앞 간이 의자 아래 부분이었다.

돌리면 경전을 읽은 것과 같다는 윤장대는 도솔암을 들린 사람들의 필수 코스였다.

종교를 거부한 나조차 윤장대를 돌렸는데 아쉽게도 소망이나 반성하는 걸 깜빡했다.

작지만 단아하고 온화한 나한전.

워낙 햇살이 강했지만 그래도 나무의 저리도 푸르고 무성한 이파리 덕분에 햇살이 닿는 고통을 잊을 수 있었다.

내려가는 길에 도솔암에 서서 파란 하늘과 멋진 선운산자락을 읽었다.

오를 때 다시 들르겠노라 다짐했던 장사송은 마치 풍성한 꽃다발이나 브로컬리 같았다.

규모에 더해 그 퍼질 듯 풍성한 소나무의 특이한 자태를 그냥 지나칠 수 없지.

장사송 옆 작은 동굴은 줄을 서서 사진을 찍을 정도.

다행히 사람이 없을 때 재빨리 올랐고, 한 사람이 여러 포즈로 셀카 놀이 중이었는데 잠시 기다려준 사이 몇 컷 찍자 다시 줄지어 사람들이 다가왔다.

늦여름이자 초가을에도 전혀 주눅 들지 않은 녹음 틈사이로 바위 절벽이 모습을 드러냈는데 그 형체가 흔히 볼 수 있는 절벽과 기암이 아니었다.

삼삼오오 그리도 많은 사람들이 찾은 선운산, 다시 돌아갈 무렵엔 길에 사람들이 그나마 뜸해졌지만 그 인파의 흐름은 산아래로 향했다.

대부분 이렇게 무장애길이라 걷기엔 무리가 없었다.

또한 오래된 길 특유의 길가 이끼와 오래된 것들의 조화로움은 부럽기까지 했었다.

꽃무릇이 마치 길가 작게 이글거리는 불꽃같았다.

심장은 멎었지만 여전히 삶을 영위하고 있는 고목은 제 2의 삶에 있어서도 이렇게 멋진 시간을 기록했다.

어느새 선운사 도착.

인파가 가득하던 사찰이 이제는 숨통이 트였고, 뒤늦게 담장과 나무의 섬세한 현재를 관찰했다.

선운사 경내에도 그 많던 사람들이 떠나고 다시 고요의 하늘바다 아래 놓였다.

몇 개의 감이 힘겹게 가지를 붙들고 있었다.

짙은 녹음도 계절의 다스림을 거스를 수 없었던지 나무 아래 가을 흔적들이 희미하게 쌓여있었다.

꽃무릇 불꽃은 초가을의 강렬한 햇살 못지않게 뜨거웠고, 사람들은 한결 같이 그 불구덩이 속으로 몸을 던졌다.

그러곤 고통이 아닌 희열의 하얀 이빨을 드러냈다.

아래로 내려온 사이 시간은 제법 많이 흘렀다.

생태공원 내 연못이 있어 가까이 다가갔을 뿐이었는데 녀석들은 콩고물이라도 떨어지는 줄 알고 바글바글하게 모여들었다.

허공에 대고 손을 휘젓자 환장파티로 시끌벅적했는데 츄르라도 하나 뿌려 줘야 했었나?

선운산에서의 짧은 시간, 아쉬움의 허기는 가시질 않았는데 인정머리 없는 하늘은 무심하게도 장관만 연출했지만 그 또한 희열과 비슷한 결을 가진 흥분이었다.

또한 선운산자락 무릇고을에 가을 찾아올 때면 파란 하늘 구름 깃털 날리우며 처맛자락 풍경소리 영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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