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도, 그리움도 못내 지우지 못할 운명, 그러면서 홀로 설 수 없는 숙명을 가진 묘한 인연은 마치 악몽을 떨치기 위한 유일한 선택이 현실임을 간파하는 형세였다.
서강의 선돌이 그렇고, 선유도 망주봉이 그렇듯 절묘한 간극이 빚어낸 두 개의 홀로서기가 그려낸 하나의 평행은 병바위 또한 시선의 종착점을 기렸다.
석양이 지기 전 마지막 여정, 무장으로 떠나는 걸음이 무거운 이유였다.
병바위는 고창군 아산면 반암리에 위치하며, 신선이 잔치를 벌이고 취하여 자다가 소반을 걷어차 거꾸로 선 술병이 병바위가 되었다는 유래가 있다. 1992년 고창군지편찬위원회에서 발행한 '고창군지'에 실려 있으며, 2009년 고창군지편찬위원회에서 간행한 '고창군지'에 병바위라는 제목으로 수록되어 있다.
선동(仙洞) 뒤 선인봉에 사는 신선이 반암(盤岩) 뒤의 채일봉에서 잔치를 하여 몹시 취했다. 취하여 자다가 잠결에 소반을 걷어차서 술병이 거꾸로 선 것이 지금의 병바위이고, 반암에 있던 소반이 굴러 영모정 뒤 지금의 자리에 놓이니 바로 소반바위이다. 그래서 이곳에 반암, 호암의 마을 이름이 생기고 금반옥호(金盤玉壺), 혹은 선인취와(仙人醉臥)라고 하여 명당을 찾는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또 병바위 위에 금복개[금 술잔]가 있는 것으로 전하나 워낙 가팔라서 아무도 오를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근년에 산악인 김효영이 등반하였으나 금복개는 찾지 못했다고 한다.
[참조] 반암리 병바위_디지털고창문화대전
두암초당을 떠나 선운산 가던 길에 눈여겨 봤던 기암괴석, 병바위로 향했다.
거리는 두암초당 뒷편 직선거리로 200m 정도밖에 되지 않는 지척인데 차를 몰고 가는 바람에 꽤나 두르고 둘러야만 했다.
다음엔 산책 삼아 주진천변으로 찬찬히 걸어가야겠다.
병바위에 들기 전 선운산으로 가는 강변도로에서 보면 마치 사람 얼굴의 기암이 어딘가 응시하는 형상이라 그냥 지나칠 수 없어 선운산과 두암초당에 이어 여정길에 급히 끼워 넣었는데 두암초당과 바로 연결된 줄 알았지만 차가 지날 수 없어 강변도로를 타고 멀리 돌아서 갈 수밖에 없었다.
고창엔 세상에 눈 뜬 바위가 참 많았다.
각각 이름 붙여진 바위를 비롯하여 고인돌유적지도 인척이었는데 망각된 시간에 비춰 사람 살기 좋은 곳이란 방증 아닐까?
병바위에 오면 바위 바로 아래 차량 몇 대 넉넉하게 주차할 공간이 있었고, 거기서부터 나무 계단 따라 바로 병바위로 접근할 수 있었다.
게다가 두암초당 아래에 위치한 아산초등학교가 0.7km라면 몇 번 구르는 사이 도착할 수 있을 정도.
멀리서 봤을 땐 인간의 두상이었으나, 가까이 다가와서 보면 정말 술병을 뒤집어엎은 모양이었고, 생각보다 규모는 불어났다.
병바위를 끼고 있는 계단길은 작고 이뻤다.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었는지 계단으로 오르면 공사 장비와 도구가 널려 있었고, 계단의 끝엔 묘지가 있었는데 실제 한 분이 계단길 인근으로 무언가 손질하고 계셨다.
그리 관심을 두지 않았지만 아마도 계단길 잡초 정리를 하신 게 아닌가 싶었다.
병바위와 붙을 수 없는 숙명, 옥단바위의 규모는 병바위보다 몇 곱절 거대한 하나의 바위이자 절벽이었다.
병바위와 옥단바위 사이로 계단길이 놓여 있어 그 길 따라 계속 올라오자 묘지가 하나 있어 다시 천천히 내려갔다.
병바위에서 선운산 탕건바위가 손 뻗으면 닿을 듯한 거리에 서있었다.
병바위를 감상한 뒤 진입할 때와 마찬가지로 농로길과 같은 뚝방길을 타고 호암교를 건너며, 더 멀어지기 전 뒤돌아 인사를 나눴다.
진입할 때처럼 이 지점에서는 얼굴 옆모습 같았는데 심지어 안위를 바랬는지 고개를 돌린 방향은 다음 여정지 무창읍성으로 향한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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