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답을 듣지 않아도 좋다.
어떤 혼탁한 푸념에도 거울빛 드리운 모습 너머 속삭임에 위안을 낚아 가슴 고이 두더라도 사무친 질곡이 스스럼없이 열린다.
자연은 그저 방치했을 뿐인데 방종이 깨뜨릴 수 없는 포용의 온기는 그 어느 성벽보다 견고하고, 심연은 가늠할 수 없다.
출렁이는 다리를 걸으며 불안의 씨앗은 메말라 싸늘한 잡념의 죽어가는 잡초가 되고, 집요 하던 추회는 기름진 돌뿌리가 되어 절벽에 새겨진 미소의 청사진이 된다.
잠시 이 자연을 만나는 동안 해답을 듣지 않아도 좋다.
예던길은 봉화 청량산과 안동 도산을 잇는 국도 35번 주위의 강변길로 퇴계 이황이 젊은 날 입신을 위해 즐겨 걷던 옛길이다. 은퇴 후 노년에도 학문의 깊이를 더하기 위해 제자들과 함께 이 길을 걸었으며 그가 세상을 뜬 후에도 많은 후학들이 먼 길을 마다 않고 찾아와 옛 스승이 다니던 길을 즐겨 밟았다. 예던길은 퇴계 선생이 봉화 청량산을 오가던 길을 복원한 길로 퇴계선생의 종택이 있던 곳에서 봉화 청량산까지의 50리길이며 퇴계선생이 배움을 찾아 13세부터 숙부 이우를 찾아 청량산 오산당(지금의 청량사)까지 걸어 다녔던 길이라고 한다. 예던길의 예던이란 말은 요즘엔 안 쓰는 말이지만 예다는 “다니다”라는 뜻으로 “다니던 길”이란 정도의 뜻이라고 한다.
[출처] 예던길_봉화군청
다른 가족들과 만나 들른 선유교는 절벽 사이로 교묘히 흐르는 낙동강 상류의 모습을 절경이라는 화답으로 감상할 수 있는 곳이라 봉화 방문 길에 여기는 거의 필수 코스로 거쳐 갔었고, 바로 비가 내리더라도 하등 이상할 것 없을 만큼 하늘은 무겁지만 시선이 뜨겁지 않았다.
구불구불 바위 절벽 사이를 지나며 강물은 오로지 바다에 닿을 약속만 잊지 않고 전진했다.
여기 흐르는 강은 절벽 바위를 헤치고 바다로 달려가는 건지, 아님 절벽 바위가 뒤늦게 비집고 들어와 강물을 사행시킨 건지...
까마득히 뻗은 곡선이 미려한 건 틀림없었다.
이런 모습에 마음 열지 않을 수 있을까?
때마침 강물 따라 래프팅 하는 사람들이 드문드문 지나갔었는데 이 지점 정도에서 다리 아래를 지나는 한 팀이 반가운 손짓을 날려 똑같이 손짓하며, 한 마디 응수했다.
"바다에서 만나요!" 외치자,
"뛰어내려 같이 가요!" 그랬다.
재치 있는 사람들이었다.
피서 극성수기지만 여느 일상처럼 한적한 곳, 바로 예던길 선유교와 둘레길이었다.
앞서 피리 불던 그녀는 어딜 가고 또 다른 멋진 조형물이 반겼다.
불완전한 네모에 정감을 얻었고, 그 너머의 절경에 희열은 배가 되었다.
바위가 작은 틈을 열어 또 다른 생명에게 내어줬다.
이런 장면이 감동이었다니.
도시에서 사치라 여겼던 감정이 여기에선 미덕이 될 줄 몰랐다.
이어 자리를 옮긴 곳은 만리산길 따라 깊은 산중으로 진행했다.
멀리 청량산과 문명산이, 까마득히 멀리 우뚝 솟은 산은 영양 일월산으로 산중 고랭지 경작지치곤 꾸준히 가꾸면서도 경관이 좋은 곳이었다.
말처럼 쉽지 않은 것 중 하나, 마음을 비운다는 게 그 마음의 가면을 쓴 잡념은 그리 호락호락하게 떨칠 수 없다.
더운 여름 가운데 산중 저녁 하늘에 실린 수분끼 없는 서늘한 바람과 스펙트럼을 맞이 하노라면 그 지겹던 잡념은 너구리를 만난 두더지처럼 땅속 깊이 숨어 활력까지 낌새를 감춘다.
상영관에 들러 스펙터클한 영화에 넋을 놓은 사람처럼, 그렇게 산중의 '느림 마법사'는 잡념의 잔인한 천적으로 어렴풋 모습 드리운다.
우측이 청량산, 좌측에 조금 가려진 산이 문명산, 배후에 거대한 산은 일월산인데 한참 뒤 지도를 곁에 두고 사진을 보고 나서야 알 수 있었다.
장관이 아닐 수 없다.
쉼터 겸 전망대는 2019년 당시와 비교해도 거의 변화는 없었지만 자세히 보면 군데군데 낡은 흔적이 보였다.
그래도 네 덕분에 좀 더 먼 시야를 빌릴 수 있어서 다행이다.
밤부터 추적추적 이슬비가 내렸고, 어차피 여기서 비를 맞는 것도 나쁘지 않아 스피커 몇 개를 100도 정도 범위로 배치시켜 언제나처럼 크게 음악을 틀어 심취했다.
여기서만 누릴 수 있는 것들.
크게 음악을 듣고, 따라 부르며, 누구 하나 의식하지 않아도 된다는 해방감은 아주 짧긴 해도 그 효과는 엄청났고, 그렇게 오지의 밤은 깊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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