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 자연 그리고 만남

가을에 남는 미련과 기억_20191103

사려울 2019. 12. 5. 21:02

아침부터 돌풍에 비가 추적추적 내려 마치 돌아가는 적적함을 날씨가 알아 채고, 위로를 해 주는 것만 같아 살림살이를 주섬주섬 챙기는 기분이 조금 진정은 됐다.

다른 곳으로 둘러볼 겨를 없이 고속도로 정체를 감안하여 집을 향해 출발했지만 영동 고속도로 진부IC 채 못간 지점부터 정체가 심각해 잠시 정차된 틈을 타 고속도로 교통정보를 훑어 본 즉슨 유독 영동 고속도로의 정체가 심하고 가던 중 벌써 정체 구간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그럼 내가 속한 이 정체의 무리가 앞으로 쭈욱 이어지고 갈수록 정체 구간이 길어진다는 건데 진부를 지나 속사까지 정체와 소통을 반복하던 중 차라리 도로 위에서 시간을 보낼 바에 평창을 들리자 싶어 평창IC 부근 정체 무리에 끼어 있다 바로 평창IC를 빠져 나와 평창으로 내달렸다.

도로가 좋아지려는 건지 평창IC에서 평창으로 가는 길은 공사 구간이 길었는데 반대 차로인 고속도로 방면으로 가는 차량들이 꽤나 많은 걸 보면 정체가 점점 심각해질 게 뻔한 사실이라 이렇게 옆으로 새길 잘 했다며 스스로를 다독였다.





평창을 바라보고 10분 넘게 달렸을까?

도로 우측에 하천 너머 너른 공원과 가로수길을 노랭이 잔치로 물들인 일련의 은행나무 행렬을 보고 가던 발길을 멈추고 심취했다.

가을 주인공은 단풍만 있는게 아닌데 잠시 눈이 멀었던지 자욱한 은행나무 가로수길을 걸으며 지금까지 하나만 쫓은 무모함에 숙연해졌다.

더불어 송이송이 영근 은행을 보니 조금 지독한 찰나를 감수해야 겠지만 이 정도 사람을 매료 시킨다면 잠깐 겪을 후각의 고통은 아무 것도 아니다.

1시간 정도 텅빈 공원에 머물며 은행 낙엽 자욱한 길을 걷다 보니 이 계절이 세상에 주는 희열은 결코 가볍지 않아 그래서 늘 사람들은 가을을 기다리고 아쉬워하는지를 새삼 실감했다.






1km가 채 안되는 거리지만 그 너른 일대에 서 있는 은행나무를 하나하나 마주치는 사이 먼길을 가야된다는 골이 따분한 생각을 잊고 시간이 멈춘 착각에 아주 천천히 가을 정취에 빠져 있게 되었다.




다시 정신을 추스르고 평창으로 달려 간단히 점심을 해결하곤 주위를 서성이는데 산 언저리를 타고 완만하게 오르는 도로가 멀리 한눈에 들어왔다.

그 도로는 산을 굽이쳐 고갯길로 향하는데 그 모습이 마치 미지의 세계로 가는 길처럼 인적은 드물지만 고갯마루를 넘어서면 현재 서 있는 세계와 완전히 다른 세상이 펼쳐질 것만 같아 호기심을 챙겨 고갯길로 저속 주행을 하며 올랐고, 아니나 다를까 예상했던 대로 고갯마루에서 부터 낯선 풍경이 광활하게 펼쳐져 있었다.

숨바꼭질에서 술래가 전혀 생각치 못한 곳에서 숨은 아이를 찾은 희열과 같은 느낌이었다.

평창강이 바다를 향해 흐르다 산을 뚫고 그 산 뒷녘을 돌아 먼길을 가기 전 잠시 쉬었던 흔적처럼 산으로 둘러 쳐진 분지가 한순간 눈 앞에 펼쳐지는 감회 였다.

고갯마루에는 육각정 전망대가 있었고, 그 주위에는 누군가 꾸준하게 가꿨는지 오색의 꽃밭이 가늘어진 비바람에 나풀거렸다.





아침부터 내린 비가 거의 그칠 무렵 이라 창을 살짝 열고 고갯길을 내려와 유턴해서 다시 고속도로를 향해 달리다 또 다시 시선을 사로 잡는 은행나무 가로수길로 인해 핸들을 돌렸다.

처음 방문했던 공원에 비해 여긴 은행나무 낙엽이 더 풍성한 농공단지 도로인데 사실 모든 가로수가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 였고, 주위에 낮은 산으로 둘러싸여 바람이 잔잔한 탓에 떨어진 낙엽이 도로와 인도에 고스란히 쌓여 있어 두터운 낙엽을 밟는 느낌이 각별했다.

노란 낙엽이 눈부신 광채를 발산하여 마치 공중에 살짝 떠서 걷는 것처럼 중력감과 지면에서 발바닥을 타고 올라오는 감촉이 일상적으로 흔히 체험할 수 있는 느낌이 아니었던데다 무성한 가지에 매달린 은행잎이 시각마저 마비 시켰기 때문이었다.










평창농공단지의 은행나무 가로수에 취해 카메라를 대쉬보드 위에 올려 놓은 것도 방림을 지날 무렵 알아챘고, 카메라를 추스림과 동시에 잠시 쉬어갈 목적으로 평창강 유원지에 들렀다.

하루 해가 거의 서녘으로 기울 무렵이라 얼마 남지 않은 낮시간이 아쉽기도 했고, 정체길을 피할 요량으로 느긋하게 마음을 먹고 있었던 터라 심적인 여유는 푸짐했기에 낮을 이용한 활동을 멈추기 싫었다.

방림체육공원은 한적한 시골에 있기 아까울 만큼 꽤나 너른 공원으로 고프로로 타임랩스를 촬영하는 긴 시간 동안에도 사람들의 왕래는 없었고, 그와 걸맞게 바로 옆을 흐르는 평창강 조차 강물을 잊게 할 만큼 모든 공간이 적막했다.

이번 여행은 처음 의도와 다르게 진행 되었지만 일상처럼 빼곡한 일정을 강요하지 않았고, 평소 다니던 여행 마냥 최종 목적지를 제외한다면 '가던 길에 잠깐' 발길이 허락되는 대로, 마음이 끌리는 대로 충실했다.

그래서 평소보다 훨씬 속도를 늦추며 내가 스치는 세상에 가급적이면 골고루 시선을 던졌고, 이동도 곧 여행이었다.



올 가을의 마지막 여정을 정리하자면...

찰나 같은 순간이지만 어김 없이 시간의 기억들을 쌓아둔 가을이었다.

신록의 성숙과 뜨거운 열정의 단풍, 심연의 하늘과 재회를 위한 낙엽을 통해 여전히 매력 넘치는 가을에 열광하고 가을을 만나러 가는 희열에 발걸음 경쾌 하던 기억은, 이제 지난 한 해에 대한 추회의 답습이자 새로운 결심의 거푸집으로 삼자.

경박하게 표현할 바에 차라리 가을처럼 서서히 익으며 처음부터 열렬한 관심이 없더라도 내 자리, 나만의 색깔을 지키자.

문득 가을과 인생의 통찰을 넌지시 귀띔해 주는 싯구가 생각 난다.


시월의 붉은 달이 지고

창밖에 따스한 불빛이 그리운 날.

이제는 누구를 사랑하더라도

한 잎 낙엽으로 떨어질 수 있는 사람을 사랑하라.


-선암사 낙엽들은 해우소로 간다 <정호승>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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