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 자연 그리고 만남

설경에 함락된 충주산성_20201218

사려울 2023. 1. 5. 20:39

눈이 소복이 덮인 성벽을 따라 걷는 동안 무심한 시간을 탓할 겨를 없이 허공을 채우고 있던 연무와 햇살이 뿔뿔이 흩어져 버렸다.
일상을 한발 벗어나고, 인파를 잠시 등지고 있던 찰나가 마치 정적에 휩싸인 허공처럼 한결 같이 머릿속을 맴돌던 잡념은 갈피를 잡지 못한 채 뿌연 안개처럼 걷히며 무념의 가벼움에 도치되었다.
대부분의 산성들이 근래 들어 고증된 역사를 발판 삼아 복원되었지만, 그 땅에 서린 처절 했던 흔적과 달리 마냥 평화롭기만 했던 건 어쩌면 수 없이 흘린 피의 궁극적인 신념과 바램 아니었을까?
위태로운 비탈길을 따라 밟는 오르막길보다 더욱 긴장되는 내리막길은 양귀비의 마력에 혼이 나간 나머지 제 생명을 압박하는 권력의 추악한 이면을 반증하는 만큼 때론 중력이 잡아 끄는 방향을 모르는 게 약이라는 서글픈 깨달음이다.
한 때 처절 했던 역사와 달리 이제는 고이 자리를 잡고 한 도시를 내려다보며 잠시 평온의 일생을 보내는 산성은 모름지기 일류가 도달하지 못하는 궁극의 지향점인 안락의 단상을 누리는 찰나와 같다.
그럼에도 오르는 길은 설레고, 내려가는 길은 아쉽다. 

남산 정상을 내려와 진행 방향으로 다시 나아갔다.

북문 건너 남문 방향은 양지녘이라 표독스런 바람이 불지 않았고, 뺨에 닿는 햇살 자체도 온기에 신경이 반응했다.

남쪽 겹겹이 쌓인 능선도 백두대간을 향해 쉼 없이 이어져 충주에서 시작되는 일련의 산마루가 마치 서로 경쟁하듯 키재기를 하며 그 길을 지나는 세상의 발길도 쉽게 허락하지 않을 기세였다.

오후로 접어들면서 연무와 두터운 구름이 걷히고 쨍한 대기가 길을 안내하기 시작했다.

양지바른 곳은 벌써 대부분의 눈이 녹아 버렸다.

북문의 수호신이 자그마한 체구에 야무지면서 다소곳한 기품을 유지하고 있다면 남문의 수호신은 경쾌하면서 세상에 대한 표현을 솔직하게 드러냈다.

시간의 파고에 따라 뒤틀리고 때론 곧게 자라며 격변의 시대를 굽이 내려보고 애닮픈 세상에 대한 고통을 함께 짊어진 굴곡 아닐까?

발 아래 펼쳐진 충주호 일대 설경이 장관이다.

미세 먼지가 자욱한 대기라 그 너머 월악산은 아주 희미하게 보였다.

계명산의 자태가 점점 선명해졌다.

언젠가 휴양림에 들렀다 해 질 녘에 산 언저리를 잠시 오른 적 있지만 선한 모습과 달리 꽤 가팔랐다.

아이젠 없이 오로지 스틱만으로 내려오다 보니 꽤 조심스럽게 발을 디딜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길은 너무 태연하고 평화롭다.

조망점이 있어 잠시 서서 세상을 내려다봤다.

연이어 산의 복잡한 주름이 시름을 잊게 하고, 눈부신 설경의 뽀얀 여백이 겨울 정취에 방점을 찍었다.

성곽을 따라 조금 더 내려가면 동문이 있었고, 다시 오르막길을 따라가면 조망점이 나와 우선은 동문을 지나쳐 조망점에 올라갔다.

동문 앞 연못은 겨울잠에 빠졌다.

동문을 지나 기어서 조망점에 도착했다.

진행 방향으로 조금만 더 걸어가면 진입했던 북문의 수호신이 지키고 있었다.

고개 돌려 왔던 길을 되짚어봤다.

눈이 오면 온대로, 더우면 더운 대로 하루 시간을 천천히 걸으며 사색하기 알맞은 충주산성은 적당한 거리감과 산성에 올랐을 때 멋진 절경을 보상했다.

한 바퀴 돌고 내려가는 길, 아마도 적군이 이 길로 쳐들어 왔다면 꽤나 진땀 흘렸을 모양새다.

동문을 빠져나와 산성 둘레길로 걸어서 내려가기로 했다.

동문 방면도 아침을 제외한다면 남산 정상에 가려 대부분 햇살이 들어오지 않는 위치라 눈이 그대로 쌓여 걸을 때마다 사각사각 소리를 냈다.

그 소리가 무척 이쁘고 경쾌하게 들렸다.

석양이 비킨 충주 시내는 차분한 저녁을 맞이하며, 무척 평온해 보였다.

계명산도 석양에 붉게 그을렸다.

붉은 석양과 겨울 눈이 서로 부딪혀 눈부신 하루로 마무리한다.

다시 왔던 길을 따라 내려가며 오를 때 보이지 않던 발 아래 풍경을 다시 정독했다.

어느새 음지에 머무르던 밝은 빛이 사라지고 성급한 땅거미는 고개를 내밀었다.

설경에 휩싸인 충주산성에서 겨울 진면목과 평온에 취한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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